"재건축 아파트보다 더 높게 자란 나무, 살릴 순 없나요"

입력 2017-11-27 11:30  

"재건축 아파트보다 더 높게 자란 나무, 살릴 순 없나요"

수십년씩 자란 나무들, 비싼 이식 비용으로 폐기될 처지

재건축 때 전문가 자문 거쳐 '나무 살리기' 추진…서울시, 조례개정 방침



(서울=연합뉴스) 박초롱 기자 = '개포주공4단지 아파트 거주민 이주 개시!'라는 플래카드가 걸린 아파트 정문 옆의 시계는 4시 44분에 멈춰 있었다.

재건축을 앞두고 주민 80% 가까이가 떠나 시간이 멈춘 것만 같은 아파트 단지를 '나무산책' 팻말을 든 10여 명이 지난 토요일 거닐었다.

이른 추위가 찾아온 날이었지만 모두 카메라를 들고 단지 내 나무 사진을 찍느라 바빴다. 5층 높이 아파트보다 더 크게 자란 거목들이 얼마 후면 잘려나갈 운명에 처해서다.

다음 달 15일 주민 이주 기간이 끝나면 서울 강남구 개포주공4단지는 폐쇄되고, 건물 허무는 공사가 시작된다. 재건축 아파트에 심어진 나무 대부분은 판매가 어렵고 이식 비용이 부담된다는 이유로 버려진다.

재건축 과정에서 왜 사람만 떠나고 나무는 사라져야 하는지 의문을 품은 이들이 매달 한 번씩 아파트 단지를 돌며 메타세쿼이아, 향나무, 소나무, 은행나무의 마지막 모습을 남기고 있다.


◇ 30대 아파트 키즈에겐 '고향'…1만여가구 재건축

개포동은 재건축이 한창이다.

1982년 입주한 주공아파트 1∼4단지 1만여가구 재건축이 한꺼번에 진행되고 있다.

개포주공2·3단지는 이미 높은 가림막을 세워 놓고 '래미안블레스티지', '디에이치아너힐스'로 변신 중이다. 5층 높이 아파트 58개 동(2천841가구)이 늘어선 4단지는 3천256가구 규모의 '개포그랑자이'가 된다. 5천40세대로 가장 규모가 큰 1단지도 재건축에 속도를 내고 있다.

개포동 '나무산책'을 기획한 사진·영상작가 이성민 씨는 개포주공 1단지에서 13년간 거주하며 학창시절을 보냈다.

재건축 소식을 접한 이 작가는 옛 동네의 모습을 남겨두려고 2014년 개포주공아파트를 다시 찾았다. 사진 작업을 하던 중 눈에 띈 게 그와 함께 자라나 거목이 된 나무들이다.

"곳곳에 추억이 남아 있는 나무를 그냥 다 없애지 말고, 보존한 채 재건축을 할 수는 없을까요? 보존 계획을 세울 순 없는 걸까요?"

SNS에 글을 올리자 아파트에서 태어나 초중고교 시절을 보낸 30대 '아파트 키즈'들이 호응했다. 이렇게 만들어진 게 '나무산책' 프로젝트다.

산책에 참여한 이들은 아파트 단지를 돌며 즐겁게 옛 추억을 떠올렸다.

개포주공4단지에서 15년간 거주한 이선우 씨는 개포초등학교 앞을 지나다 "겨울에 선생님들이 물을 붓고 얼리면 운동장이 스케이트장으로 변하곤 했다"고 말했다.

개포주공2단지에 1982년 입주해 1남 2녀를 길러낸 한란희(72) 씨는 "처음 입주했을 때부터 마을이 참 아름다웠다"며 "양재천도 지금처럼 정비된 것이 아니라 자연스러운 모습이어서 그야말로 전원생활이었는데, 전부 다 높은 아파트가 된다니 기분이 이상하다"고 말했다.

한 씨는 "30대 후반에 초등학생 아이 셋을 데리고 방 세 칸짜리 집으로 이사해 얼마나 신이 났는지 모른다"며 "그땐 아파트에서도 연탄을 땠다"고 회상했다.

개포주공은 30대에게는 고향, 50대 이상에게는 처음 장만한 내 집·첫 아이를 낳은 집이다. 나무산책 참가자들은 가장 마음에 드는 나무를 골라 이름을 붙이고 사진을 찍으며 추억을 '박제'한다.





◇ "개포주공 나무는 이대로 보내지만 다음번엔…"

단순히 사라지는 것을 애도하기 위해 나무산책을 하는 것은 아니다.

참가자들은 "개포주공아파트의 나무들은 이대로 떠나보내지만, 다른 재건축 단지는 달라야 하기 때문에 사라질 나무를 더 열심히 기록한다"고 얘기한다.

재건축 사업계획 터가 30만㎡를 넘으면 환경영향평가를 받아야 하고, 이때 재건축조합은 단지 내 '수목 활용 계획'을 제출하게 돼 있다.

이에 따라 개포주공과 비슷한 대단지인 강동구 둔촌주공아파트 재건축조합은 단지 내 나무 3만3천주 가운데 8%인 2천579주를 옮겨심겠다는 계획을 세웠다. 공원으로 계획돼 있는 아파트 단지 내 부지에 나무를 옮겨심어 놨다가 재건축이 끝나면 다시 단지 안에 들이기로 했다.

그럼에도 많은 주민이 아파트 단지를 포근히 감싸줬던 나무를 8%밖에 살릴 수 없다는 점에 아쉬워하고 있다.

개포주공의 경우 수목 활용 계획 자체가 제대로 공론화되지 않고 넘어가 버렸다.

이성민 작가는 "재건축 아파트 환경영향평가의 수목 활용 계획을 작성할 때 주민들 의견을 듣는 기간이 있는데, 이때 의견 수렴이 제대로 되지 않는 것 같다"며 "대화가 충분히 오가지 않는 현 상황이 아쉽다"고 말했다.

'나무산책' 참가자들은 아직 주민 이주가 시작되지 않은 개포주공1단지 아파트의 메타세쿼이아 나무길 일부를 보존해야 한다는 목소리를 내고 있다. 특히나 큰 나무들이 몰려 있는 테니스장 옆 공터는 여름에 개망초꽃도 흐드러지게 피어 주민들이 즐겨 찾는 곳이다.





◇ 나무 이식 비용이 발목…토심 얕은 곳에선 생존 어려워

서울시도 재건축 아파트의 수목 보존 문제에 관심이 있다.

서울시는 지금처럼 재건축조합에서 수목 활용 계획을 일방적으로 결정해 제출할 것이 아니라 전문가 자문을 받은 뒤 제출토록 하는 방향으로 조례 개정을 추진하고 있다.

서울시 관계자는 "그간 서울의 기존 건축자산을 싹 밀어버리고 새로 지어온 것처럼 나무도 너무 당연하게 베어낸 측면이 있었다"며 "좀 더 성숙하게 접근해야 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재건축 아파트의 나무 보존은 돈 문제로 귀결된다.

재건축조합이 나무 일부를 살려내겠다는 수목 활용 계획 작성한다 해도 비용 문제로 잘 지켜지지 않는 경우가 많다. 수목 활용 비용을 조합이 부담하기 때문이다.

한 구청 관계자는 "재개발 조합은 차라리 새로 사서 심는 게 돈이 덜 든다는 판단을 하고선 대체로 나무 보존을 하지 않으려 한다"고 했다.

옮겨 심을 자리를 마련해 기존 나무를 이식하고, 재건축이 끝난 뒤 다시 단지 안에 옮겨 심으려면 적지 않은 비용이 드는 게 사실이다. 30∼40년 된 거목은 크레인을 써 들어내야 한다.

오래된 나무의 가치를 고려해 옮겨 심는다 해도 다른 문제가 남는다.

최근 짓는 아파트는 지하를 넓게 파내 주차장을 만들기 때문에 토심(土深)이 얕다. 이런 곳에선 깊게 뿌리내렸던 나무가 생존하기 어렵다.

일부 구청에서 재건축 아파트 내 나무를 살려낸 사례가 있지만 드물게 나타나는 일이다.

지난해 10월 강남구는 개포시영아파트 단지에 있던 나무 중 264그루를 영동대로 녹지, 세곡사거리 인근 공원, 학교 등으로 옮겨 심었다. 서초구는 올해 4월 잠원동 신반포6차와 서초동 우성1차아파트 내에 있던 나무 5천여 그루를 여의천과 양재천 주변으로 옮겼다.


chopark@yna.co.kr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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