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희용의 글로벌시대] 윤동주 애국혼 키워준 김약연과 명동학교

입력 2017-12-26 07:30  

[이희용의 글로벌시대] 윤동주 애국혼 키워준 김약연과 명동학교


(서울=연합뉴스) 이희용 기자 = 윤동주(1917∼1945)는 독립투쟁의 선봉에 서서 산화한 열사가 아니고 숱한 저작을 남기며 당대에 이름을 떨친 문사도 아니지만 이육사와 함께 일제강점기를 대표하는 민족시인으로 꼽히고 그가 남긴 '서시'는 오늘날 김소월의 '진달래꽃'과 한국인 애송시 1, 2위 자리를 다툰다. 맑은 영혼과 간절한 소망을 아름다운 우리말로 그려낸 시구에다가 광복을 몇 달 앞두고 28살의 젊은 나이로 옥중에서 숨진 안타까운 사연이 더해져 지금도 우리에게 큰 울림을 주고 있기 때문이다.

짧은 생애 가운데서도 그가 조국 땅에 머문 기간은 평양 숭실중 1년과 서울 연희전문 4년을 합쳐 5년뿐이고 일본 체류 3년을 제외한 대부분의 발자취는 중국 북간도에 남아 있다. 윤동주가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괴로워하는' 뜨거운 애국심과 순수한 감수성을 키운 것은 당시 북간도에 충만해 있던 독립정신과 온 집안이 믿어온 기독교사상 덕이었고 그 중심에는 '북간도의 대통령'으로까지 불리던 그의 외삼촌 김약연(1868∼1942)이 있었다.


1899년 2월 18일 김약연·김하규·문병규·남도전을 비롯한 네 가문의 가족 142명은 고향 함경도를 등진 채 두만강을 건너 중국 지린(吉林)성 허룽(和龍)현으로 이주했다. 이들 가운데 지도자는 가장 젊은 김약연이었고 그의 일가는 장재촌에 터전을 마련했다. 윤동주의 조부인 윤하현도 1년 뒤 그곳에 자리 잡았다. 이들은 '동방을 밝힌다'는 뜻으로 마을 이름을 '명동촌'(明東村)이라고 지었다. 윤하현 집안을 포함한 다섯 가문은 혼인을 통해 인척 관계로도 발전했다. 김약연의 누이동생은 윤하현의 아들 윤영석과 결혼해 윤동주를 낳았고, 김하규의 딸 김신묵과 문병규의 손자 문재린 사이의 아들이 문익환(1918∼1994) 목사다.

이들은 땅을 공동으로 사서 나누며 반드시 1%를 교육 자금 충당을 위한 학전(學田)으로 활용했다. 처음에는 서당을 열었으나 이상설·이동녕·정순만·박정서 등이 1906년 10월 명동촌에서 40리 떨어진 용정촌에 '서전서숙'(瑞甸書塾)을 짓고 신학문을 가르치다가 1년 만에 문을 닫자 서전서숙의 창설 이념과 교육 정신을 이어받아 1908년 4월 27일 '명동서숙'을 설립했다. 서전서숙에 참여한 박정서가 서숙 대표인 숙장, 김약연이 실무 책임자인 숙감을 맡았고 교무주임으로 정재면을 초빙했다. 정재면은 주민들에게 기독교를 전도하고 학교 이념도 기독교로 바꿨다. 1909년 명동서숙을 명동학교로 개칭하고 김약연이 교장으로 취임했다. 이듬해 중학교, 1911년에는 여학교도 생겨났다.


민족교육의 요람으로 떠오르며 숱한 인재를 길러내던 명동학교는 1920년 들어 위기를 맞았다. 그해 10월 청산리전투에서 대패한 일본군이 간도의 한인들을 살육하고 마을을 파괴하는 경신참변을 일으킨 것이다. 이때 명동학교에도 불을 질러 잿더미로 만들었다. 1923년 건물을 복구하고 김약연이 다시 교장으로 부임했으나 기독교 신자와 공산주의자들의 갈등에다가 이듬해 대흉년까지 겹쳐 1925년 소학교만 남기고 중학교는 문을 닫았다. 윤동주는 그해 명동소학교에 입학했다. 명동학교 조선어 교사이던 송창희와 윤영석의 여동생 윤신영 사이에서 난 동갑내기 고종사촌 송몽규(1917∼1945), 한 살 아래인 문익환과 함께였다. 민족의식에 눈을 뜨고 문학에 심취한 이들은 5학년 때 원고를 모아 '새 명동'이라는 잡지를 펴내기도 했다.

1932년 윤동주·송몽규·문익환은 캐나다장로회가 세운 용정의 은진중에 진학했다가 송몽규는 뤄양(洛陽)군관학교로 떠나고 윤동주는 문익환을 따라 1935년 평양 숭실중으로 편입했다. 신사참배 명령을 거부해 숭실중 교장이 파면되고 휴교에 들어가자 둘은 용정으로 되돌아와 친일계 광명학원을 다녔다. 그 뒤 송몽규와 함께 연희전문에 입학한 윤동주는 최현배에게 조선어를 배우고 손진태의 역사 강의를 들으며 우리말 글쓰기를 가다듬고 민족사관을 형성해갔다. 졸업 후에는 송몽규와 일본 유학을 떠났다. 윤동주는 도쿄의 릿쿄대를 거쳐 교토의 도시샤대를 다녔고 송몽규는 교토제대에 적을 두었다. 그러던 중 둘은 치안유지법 위반 혐의로 후쿠오카 형무소에 수감됐다가 1945년 2월과 3월 차례로 옥중에서 의문의 죽음을 맞았다.

오늘날 명동학교 옛터에는 기념관이 들어서 개교 당시의 모습을 담은 사진, 김약연이 쓰던 책상과 친필 편지, 교실과 교과서, 윤동주 친필 원고 등을 전시하고 있다. 인근 윤동주 생가터와 주변에도 118년 된 북간도 최초의 개신교회인 명동교회, 윤동주와 송몽규 고택, '서시' 등을 비롯한 윤동주 시비, 김약연·윤동주·송몽규의 묘소 등이 자리해 100년 전 애국지사들의 숨결을 느낄 수 있다. 그러나 이들 유적과 기념관은 박제로만 남아 있을 뿐 이제 명동촌은 만주로 건너간 한인들의 제2의 고향이 아니다. 조선족이라는 이름으로 이곳에 살던 동포 후손들은 한국이나 베이징 등 대도시로 떠나 공동화 현상을 빚고 있고 그나마 남은 이들의 기억 속에서도 희미해져 김약연과 윤동주의 발자취를 찾는 이들도 한국 관광객과 답사객뿐이다.

국내에서도 북악산과 인왕산 사이에 윤동주의 이름을 딴 '시인의 언덕'이 조성되고 문학관이 들어섰으며, 연희전문 후신인 연세대에도 윤동주 기념관이 꾸며졌다. 아밖에도 그의 시비는 교토 도시샤대, 충남 천안시 독립기념관, 유고시집이 발견된 전남 광양시 망덕포구 등 곳곳에서 찾아볼 수 있다. 그를 기리는 기념물은 늘어나고 그가 지은 시구를 외는 사람도 여전히 많지만 정작 그가 찾고 지키려 했던 민족정신과 아름다운 우리말은 갈수록 흔들리는 느낌이다.

오는 30일은 윤동주가 탄생한 지 꼬박 100년이 되는 날이다. 내년은 김약연 탄생 150주년이자 명동학교 개교 100년이 되는 해이다. 이준익 감독은 지난해 영화 '동주'를 통해 윤동주의 평생 동지인 송몽규의 이름을 관객에게 각인시켰다. 이제는 윤동주를 키워낸 김약연과 명동학교의 이름도 기억하면 좋겠다. 이와 함께 조선족 동포들이 이들의 친구이자 이웃의 후손이라는 사실도 한번쯤 떠올리기 바란다.

heeyong@yna.co.kr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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