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합이매진] '왕복 6천리' 燕行길

입력 2018-08-08 08:01  

[연합이매진] '왕복 6천리' 燕行길
조선 실학자 후손 23명이 다시 밟다

(서울=연합뉴스) 홍덕화 기자 = "아, 슬프도다(嗚呼)! 한나라 낙랑군이 있었던 평양은 지금의 평양이 아니라 요동의 평양인데도 한사군을 압록강 안으로 몰아넣어 조선의 강토가 줄어들었도다."
연암(燕巖) 박지원이 지은 열하일기 제1권 도강록(渡江錄)의 한 구절이다. 조선 후기 북학파 영수였던 연암의 베이징(옛 이름 燕京) 방문, 다시 말해 연행(燕行) 길은 탄식과 통곡으로 시작됐다. 연암은 44세 때인 1780년 6월 24일(음력) 외교사절단으로 청나라에 가는 팔촌 형 박명원을 따라 6개월(여행 3개월, 체류 3개월)간 연경을 왕복하는 6천 리 대장정에 나섰다.



서계 박세당(1629~1703), 성호 이익(1681 ~1763), 담헌 홍대용(1731~1783), 연암 박지원(1737~1805), 다산 정약용(1762~1836), 추사 김정희(1786~1856), 혜강 최한기(1803 ~1879)….
초중고 교과서에서 숱하게 접했던 조선 후기의 대표적인 실학자들이다. 이들 후손 23명이 지난 6월 5일 인천국제공항에서 5박 6일 일정으로 중국 선양행 비행기에 올랐다. 선조들의 발자취를 따라 걸으면서 그 정신을 배우기 위해서다.
중국여행을 통한 선진문물 체험은 홍대용, 박지원, 박제가 같은 북학파 지식인들에게 자각과 실학적 면모를 형성하는 기회로 작용하는 등 조선 후기 정신사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조선 초기에는 원·명·청의 수도 연경(燕京)을 다녀오는 사절단을 '천자에게 조회하러 간다'는 뜻에서 '조천사'(朝天使)로 불렀으나 후기 들어 '연행사'로 명칭이 바뀌었다. 그런데 개명 배경이 흥미롭다. 양대 호란(정묘·병자) 후 오랑캐를 떠받드는 말을 쓰는 것이 자존심에 어긋나 가치관이 배제된 '연행'이라는 용어를 쓰게 됐다는 것이다.
연행답사의 첫 일정은 랴오닝성 단둥의 마시장 터(馬市場台)에서 시작됐다. 촉박한 일정이어서 선양 도착 후 단둥 시내 호텔에 여장을 풀기 전 압록강 유역으로 이동하는 강행군에 들어갔다. 30인승 버스로 3시간을 달려 도착해보니 이성계가 '4대 불가론'을 내세워 반기를 들었던 위화도가 눈앞에 있었다. 마시장 터는 문패만 남아 있어 가이드 설명이 없었다면 이곳이 강을 건넌 연행사들에게 일종의 비자를 발급했던 도강처(渡江處)인 줄을 몰랐을 것이다.





이튿날 압록강 단교로 이동, 유람선을 타고 압록강을 한 바퀴 돌면서 북한 땅 가까이에 접근해봤다. 유람선 안에서는 북한 화폐와 담배를 팔고 있었다. 위화도는 손짓하거나 이름을 부르면 보이고 들릴 정도로 가까이에 있다. 이곳은 북·중 경협의 상징으로 수년 전 열기가 올랐다가 북한의 연이은 핵실험으로 중단된 두만강 유역 경제벨트 '창지투(長吉圖·창춘-지린-투먼) 개방 선도구' 프로젝트 현장인 황금평(전체 면적 14.4㎢)이었다. 북·중은 오랜 퇴적으로 단둥과 맞닿은 압록강 하류의 섬 황금평에 기업을 대대적으로 유치하는 대규모 경제특구 개발계획을 밝힌 데 이어 2011년 6월 양국 고위층이 참석한 가운데 착공식을 했다. 의주와 단둥을 연결하는 압록강 다리에도 올라가 봤는데 북한에서 나오는 화물 적재 차량이 끊이지 않고 오가는 것이 눈길을 끌었다.

◇ 안개·먼지·바람 등 '三苦' 겪은 연행사절단



의주와 베이징을 잇는 연행길은 초절(압록강~선양/10일), 중절(선양~산하이관/11일), 종절(산하이관~베이징/9일 소요) 등 세 마디(三節)로 구분한다. 답사단이 차량편으로 농촌 신작로와 고속도로를 쉼 없이 달려 따라가 본 초절 구간을 선조들은 9박 10일에 주파한 것으로 기록돼 있다. 한여름의 뙤약볕과 장마, 돌풍 등 극도로 열악한 기상 조건에서 강행군하느라 얼마나 힘들었을까 하고 생각해본다. 열하일기를 비롯한 연행 기록들에 따르면 사절단은 낮에는 소나기와 장마, 땡볕 등 즐풍목우(櫛風沐雨)에 시달려야 했다.
선조들의 연행 과정을 설명하는 신춘호 한중연행노정답사연구회 대표(문화콘텐츠학 박사)에게 일행 중 누군가 "멱이라도 감을 수 있었을까요?"라고 질문했다. 그러자 신 대표는 노천 온천이 있었지만 '오랑캐 땅에서 몸을 씻을 수 없다'는 이유로 들어가지도 않았다는 기록이 있다고 설명했다.
연행사들은 또 밤이면 맹수들의 울음소리와 말 또는 사람을 공격하는 호환(虎患)을 우려해 잠도 편안히 자기 어려웠을 것이다. 중국 땅에 들어서자마자 구련성 인근 들판에서 천막을 치고 옹기종기 모닥불을 피워 추운 몸 녹이던 사행단 모습을 연행록에서는 '하나의 촌락을 이루는 듯했다'라고 기술했다. 신 대표의 설명에 따르면 당시 의주 군관들이 미리 설치한 장막에 삼사(三使)가 들고 나면, 말몰이꾼과 같은 아랫사람들은 밤샘 호각소리며 함성으로 호랑이를 물리치며 첫 밤을 보내야 했다. 이렇듯 중국 땅을 처음 밟았던 선조들은 '새벽엔 안개, 낮엔 먼지, 저녁엔 바람'이라는 3대 괴로움을 겪어야 했지만 새로운 세상에 대한 안목을 넓힐 소중한 기회로 생각했다.



점심을 먹고 탕산성촌의 변문(책문)과 봉성시에 위치한 봉황산 수위아문터를 돌아본 뒤 조선인 후예들이 모여 산다는 문가보(文家堡)를 방문했다. 정묘·병자호란 때 끌려온 국경지대의 조선인이나 청나라 팔기군에 귀순해 통역관 등으로 활동했던 문 씨 집안 후손들이 한때 집성촌을 이룰 정도로 많았으나 지금은 다수가 대도시로 빠져나가고 7~8가구만 남았다. 이들은 200~300년간 한족 또는 만주족으로 살아오다가 1992년 한중수교 후 조선족으로 신분을 바꾼 사람들이 많다고 한다.
연행길 사흘째에 찾아간 회령령과 청석령(고개)은 아직도 옛길 흔적이 가장 온전히 남은 대표적인 곳이었다. 특히 청석령은 청나라에 볼모로 끌려가던 봉림대군(훗날 효종)이 고개를 오르면서 '음우호풍가'(陰雨胡風歌)를 읊었다는 곳이다. 이 때문에 이곳을 넘나드는 조선인들은 청에 대한 울분과 비분강개의 심정을 표출했다는 얘기가 전해지고 있다. 연행 노정에서 가장 높은 고개인 회령령(지금의 마천령)과 가장 험준한 청석령을 지나야만 요동에 이르게 된다. 회령령과 청석령 고개는 지금도 동팔참 구간에서 가장 험한 산악지역으로 꼽힌다.
답사단 일행은 마천령 아래의 관제묘 터에서 청석령을 바라보며 연암 선생에게 드리는 고유제를 지냈다. 삭령 최씨 종중 회장인 최성교 씨가 제관을 맡고 성호 이익 선생의 후예인 이오형 씨가 축문을 낭독했다. 종손 박찬구 씨가 준비해 온 제사음식으로 실학자 후손들이 처음으로 연행길 답사에 나섰음을 고한 것이다. 김시업 전 실학박물관장(성균관대 명예교수)은 "연암 사후 200여 년 만에 실학자들의 후손들이 그 뒤를 밟고 고유제로 보고를 드리는 일이 긴 역사 속에서 보면 사소한 일이지만 크고 귀한 일임을 느꼈다"고 소감을 밝혔다.



◇ 1천200리 요동벌판…'울어볼 만한 자리'

답사 사흘째에 버스로 이동 중이던 일행의 눈길을 사로잡은 것은 1천200리에 달하는 요동벌판이었다. 연행사들이 압록강을 건너 단둥에 도착한 후 천산만수(千山萬水)의 험난한 노정을 마치면서 만나게 되는 벌판이다. 산기슭을 벗어나자 눈앞에 탁 트인 장대한 광경이 펼쳐지는데 그 길이가 경부고속도로 서울~부산 구간을 능가하는 470㎞에 달한다. 강우량이 부족한 척박한 땅이어서 옥수수를 심어 놓았는데 밭의 끝이 보이지 않았다. 연암은 220년 전 이곳을 지나면서 "한바탕 울어볼 만한 자리가 아니겠오"(好哭場論)라고 감흥을 표현했다고 동포 가이드는 설명했다.



연암은 작은 땅 조선을 떠나 새로운 세상을 만나게 된 감동을 어머니의 뱃속에서 막 나온 아이가 터뜨리는 울음에 비유한 것이다. 요양에서 만난 요동백탑도 '연행길의 장관'이라는 명성에 걸맞게 눈길을 잡아 끌었다. 연암도 '열하일기-요동백탑기'에서 벌판 한복판에 홀로 우뚝 서 있는 이 탑의 위용을 찬탄했다고 한다.
연행이 18세기 이후 조선 지식인들의 세계인식과 사유의 영역이 확장되는 중요한 계기로 작용했다는 설명을 들으면서 "실학 선조들의 발자취를 어떤 마음의 자세로 좇을 것인가?"라고 자문해봤다.
조선 실학자들은 세상의 문제점을 극복하기 위해 실천적인 방안을 고민했던 사람들이다. 고(故) 이성무 실학패밀리 회장은 '신실학운동'의 필요성을 역설한 바 있다. 시대의 질곡을 떨쳐내고자 노력했던 실학 선조들의 삶은 이번 연행길 답사에 나선 후손들에게 많은 깨달음을 주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 왕복 6천리 대장정 '연행길'

연행길은 한양에서 베이징까지 편도 3천리(1천200㎞)가 넘는 먼길이었다. 240년 전 선조들의 연행길 전체 노정을 보면 한양에서 의주까지 약 1천 50리, 의주에서 베이징까지 약 2천61리로 도합 3천111리다. 가는 데만 꼬박 40일 정도가 걸렸다고 한다. 베이징에서 40일쯤 체류하고 귀국하기까지의 여정은 왕복 6천리, 소요 기간은 4~6개월의 대장정이었다. 하루 이동거리는 보통 50~80리(20~32㎞)로 기상 여건 등에 따라 차이가 있었다. 김정호의 '대동지지'에 따르면 중국으로 길이 있는 한양에서 의주까지 약 41개 역참이 운영됐다. 양국 사신들을 위한 휴식처와 숙박소로 모두 25개의 관(館)도 설치돼 있었다.

[사진/실학박물관 안진희 연구원·실학패밀리 제공]

※ 연합뉴스가 발행하는 월간 '연합이매진' 2018년 8월호에 실린 글입니다.
duckhwa@yna.co.kr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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