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양공동선언] 독일 통일의 '아우토반'된 동서독 평화구축·교류확대

입력 2018-09-19 21:35   수정 2018-09-19 21:52

[평양공동선언] 독일 통일의 '아우토반'된 동서독 평화구축·교류확대
꾸준하고 점진적인 교류로 양측 주민간 이해의 폭 넓혀
한국전쟁 치르고 북핵문제 있는 한반도와는 배경 달라



(베를린=연합뉴스) 이광빈 특파원 = 남북 정상 간의 '9월 평양공동선언'으로 군사적 긴장관계를 상당 부분 해소하게 됐을 뿐만 아니라 경제, 문화, 스포츠 교류도 상당히 진전될 수 있는 토대가 마련됐다.
한반도와 조건과 배경이 다른 만큼 독일의 동서독 통일과정과 직접 비교할 수 없지만, 이 같은 군사적 긴장해소와 다방면에서의 교류는 독일 통일의 밑거름이 됐다는 점에서 시사점을 준다.
동서독은 통일 전 많은 조약과 협정으로 이미 통행·통상·통신 등에서 기초적인 인적·물적·정보의 교류가 이뤄졌다.
애초 동서 베를린 시민은 1961년 8월 베를린 장벽이 세워지기 전까지 서로 오갔다. 이후에도 1963년 서베를린 당국과 동독 당국 간의 통행증협정으로 이산가족과 연금생활자 등의 방문이 제한적으로 가능했다.
양측 간에 총성이라곤 대부분 베를린 장벽을 넘어 서베를린으로 탈출하는 동독 시민에게 향한 총구에서 나오는 등 군사적 긴장 상황도 한반도와 비교해선 느슨했다.
남북한은 모두 통일을 지향하고 있지만, 당시 동서독은 사정이 달랐다. 서독은 통일을 목표지점으로 상정했으나 동독은 서독과 개별 국가로 완전히 국제적인 인정을 받기를 원했다. 서독은 동독을 하나의 국가로 인정하지 않으려 했고, 동독은 서독을 외국 취급했다.
1972년 동서독 간 관계의 전환점이 되는 기본조약은 이런 서로 다른 이해관계를 반영해 체결됐다.
양국의 자율성과 독립성을 존중하되 여러 분야에서 교류가 이뤄질 수 있는 길을 열었다. 통일 이전에 긴장완화와 평화 질서를 먼저 실현하겠다는 것이다. 현재 남북 관계의 흐름과 유사한 측면이다. 기본조약이 체결되기 전 단계에서 서독은 소련과 폴란드 등 주변국을 안심시키기 위해 치열한 외교전을 펼쳤다.
1975년 미국과 소련, 유럽 국가 등 35개국이 체결한 헬싱키 프로세스 의정서가 체결된 것은 동서독 교류를 촉진하는 계기가 됐다.
사실상 국제적으로 동서독 간의 평화 정착과 교류 확대가 승인된 셈이었다.
헬싱키 프로세스 의정서는 군사적인 신뢰 구축과 대규모 군사훈련의 사전 통보 등의 군사적 긴장완화 내용뿐만 아니라, 경제·과학기술 분야에서의 협력과 이산가족 재결합 및 이산가족 상봉 추진, 체육분야 교류 증대, 청소년들 간의 접촉 증대, 정보교류 및 전파의 개선 등에 합의했다.
이에 따라 여행 제한이 완화됐고 동독에서도 서독의 방송과 영국의 BBC 방송을 볼 기회가 늘었다.
이후 동독 측의 지연전술이 있었지만 1980년대 청소년 교류 합의(1982년 9월), 문화협정 체결(1986년 5월), 도시 간 최초자매결연(1986년 10월), 과학·기술협정 체결(1987년 9월) 등이 이뤄질 수 있었다. 다양한 분야에서 폭넓게 동서독 간에 모세혈관이 이어지게 된 것이다. 서독의 청소년들이 정부로부터 여행비를 지원받아 동독으로 수학여행을 다녀올 수 있을 정도였다.




동서독은 이러한 조약 및 협약과는 별개로 동독의 정치범을 데려오기 위해 대가를 지불하는 것도 가능했다.
정치범 석방은 뒷거래(이른바 프라이카우프)로 이뤄졌다. 서독은 1962년부터 베를린 장벽 붕괴 전까지 27년간 34억6천400만 마르크를 동독에 지불하고 정치범 34만여 명과 가족 25만여 명을 데려왔다. 정치범 한 명당 10만 마르크를 지불한 셈이다.
동독은 1980년대 후반 소련의 개혁·개방 과정에서 주민들의 개혁 요구를 사전에 봉쇄하고 체제에 불만이 있는 주민들을 서독으로 보내 체제 안정을 꾀하기 위해 서독으로의 이주와 여행을 상당히 완화했다.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기 전 해인 1988년에는 2만9천여 명의 동독 주민이 서독으로 이주했다.
헬싱키 프로세스 이후에도 군사적 위기는 한 차례 있었다. 1979년 소련이 서유럽을 겨냥한 중거리 핵미사일인 SS-20을 동독 등에 배치하자 미국도 1983년 중거리 핵미사일 퍼싱 Ⅱ를 서독에 배치에 군사적 긴장감이 고조됐었다.
이런 동서독 간의 평화구축과 교류협력 과정은 한반도와는 상당히 다른 환경에서 이뤄졌다.
당시 북한과 달리 동독은 핵무기를 직접 갖고 있지 않았다. 더구나 동독은 소련의 철저한 위성국이었다. 핵무기를 외교 협상의 지렛대로 가진 북한과는 달리 외교정책에서 자율권이 제한됐다. 소련은 서독과의 관계 개선을 막아서기도 했고 떠밀기도 했다. 서독은 경제적 지원 등을 내세워 소련을 부단히 설득해나갔다.
더구나 동서독 분단기에는 민족상잔의 비극을 치른 한반도와 달리 애초 전쟁이 없었다. 동독의 엘리트 계층이 서독에 대해 거부감을 느끼고 있었지만, 남북한만큼 양측 주민 간 깊은 골이 파여있지 않았다.
그런데도 동서독처럼 평화체제 구축과 교류확대 과정을 밟을 경우 양측 주민 간 이해의 폭을 넓히고 경제적으로도 서로 도움이 되는 것은 명약관화하다.
베를린자유대학의 이은정 한국학 교수는 통화에서 "동서독은 민간단체와 기업뿐만 아니라 정당도 폭넓게 치열하게 교류했다"라며 "접촉면이 많을수록 관계 증진에 도움이 되는 것은 자명하다"고 말했다.
lkbin@yna.co.kr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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