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쉿! 우리동네] 제주도민 조선시대 200년간 섬에 갇혀 살았다

입력 2018-11-17 11:00  

[쉿! 우리동네] 제주도민 조선시대 200년간 섬에 갇혀 살았다
지리적·인위적 단절…고통 있었지만 제주 나름의 독특한 문화 형성

(제주=연합뉴스) 변지철 기자 = 천혜의 자연환경과 더불어 여유로운 삶을 즐기기 위한 제주도로의 이주 열풍이 뜨겁다.
'말은 제주도로 보내고 사람은 서울로 보내라'는 옛말이 무색할 정도로 많은 사람이 찾아오면서 어느새 제주에 산다는 것은 부러움의 상징이 됐다.
과거에도 그랬을까?
지금으로부터 380여년 전만 하더라도 제주도는 관청의 허락 없이는 아무도 떠날 수 없었던 '창살 없는 감옥'이자 '피하고 싶은 변방'이었다.
약 200년간 화산섬 제주를 철저히 외부와 격리해 놓았던 '출륙금지령'은 왜 생겨났고, 제주 사람들의 삶과 문화에 어떤 영향을 끼쳤을까.

◇ '여다(女多)의 섬'이 된 제주
옛날 제주에서 산다는 것은 고통 그 자체였다.
화산섬 제주는 토양과 기후 등 농사짓기에 적합하지 않은 척박한 자연환경과 왜적의 침입, 태풍과 같은 각종 자연재난에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무엇보다 견디기 힘든 고통은 노역과 군역, 공납의 폐단이었다.
좁은 면적과 적은 인구에도 불구하고 제주 사람들은 공마(貢馬)와 귤, 약재, 해산물, 산짐승 등 다양한 진상 공물을 바쳐야 했고, 갖은 노역을 감당했다.
특히 진상을 위해 해조류와 패류를 채취했던 잠녀역(潛女役·해녀역), 전복을 잡던 포작역(鮑作役), 말을 기르던 목자역(牧子役), 귤을 재배하던 과원역(果員役), 진상품을 운반하는 선격역(船格役), 관청의 땅을 경작해주던 답한역(畓漢役) 등은 모두가 맡지 않으려 했던 괴로운 '6고역'(六苦役)이었다.
조정에 바쳐야 할 진상품 부담이 너무나 과중했고, 중간에서 가로채는 관리들의 수탈이 심해지자 사람들은 견디다 못해 다른 지역으로 도망가거나 바다에 떠돌면서 해적질을 했다.

부역과 진상을 피해 수많은 남자가 섬을 떠나면서 인구는 급격히 줄어들었고, 제주는 '여다(女多)의 섬'이 됐다.
그나마 있던 남자들도 뱃일하러 나갔다가 폭풍우에 휩쓸려 죽어갔다.
인구가 줄어도 부역은 줄지 않았기 때문에 남자들의 빈자리를 고스란히 여자들이 채워야 했다.
1600년대 간행된 김상헌의 제주 기행문인 '남사록'에 기록된 당시 제주 인구가 2만2천990명으로, 남녀의 성비를 보면 남자가 9천530명인 데 비해 여자는 1만3천460명으로 남녀 성비가 0.7대 1로 여자 비율이 압도적으로 많았다.
남자들이 주로 했던 전복을 잡아 올리는 포작역을 해녀들이 떠안아야 했고, 남자들이 도맡았던 군역을 여자들이 대신 지면서 다른 지역에선 찾아볼 수 없는 '여정(女丁)'이라는 말이 생겨났다.
'남사록'에는 당시 남정(男丁)의 수는 500명이지만 여정의 수는 800명으로 기록돼 있다.
결국, 인구이탈을 막기 위해 조선 조정은 특단의 대책을 빼 들었다.

◇ 왕족도 피해가지 못한 출륙금지령
'제주(濟州)에 거주하는 백성들이 유리(流離)하여 육지의 고을에 옮겨 사는 관계로 세 고을의 군액(軍額)이 감소하자, 비국이 도민(島民)의 출입을 엄금할 것을 청하니, 상이 따랐다.'(조선왕조실록 인조 7년 8월 13일)
조선은 인조 7년인 1629년 결국 제주에 출륙금지령을 내리는 강력한 통제정책을 폈다.
국법으로 관청의 허락 없이는 누구도 다른 지역으로 나갈 수 없도록 막아놨고, 제주 사람들은 200년 가까이 섬 안에 갇혀 폐쇄된 생활을 해야만 했다.
출륙금지령은 유배 온 왕족도 피해갈 수 없었다.
인조 6년인 1628년 역모에 휘말려 죽은 선조의 일곱 번째 아들 인성군(仁城君)의 가족들이 제주로 유배 왔다.

오랜 세월 제주에서 유배 생활을 하던 중 인성군의 다섯 아들 가운데 장남 이길과 차남 이억, 사남 이급이 제주 여인과 결혼해 자식을 낳았다.
인조 13년 이들의 유배지를 옮기라는 명령이 떨어졌지만, 출륙금지령 때문에 처자식을 데리고 섬을 빠져나갈 수 없었다.
이후 사면돼 죄인 신분을 벗어나자 이들은 제주에 남아있는 처자식을 데려올 수 있도록 해달라는 청원을 올렸지만, 이마저도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왕이 청원을 받아들이려 해도 조정 대신들은 "제주의 인물이 육지로 나오는 것을 금한 것은 곧 조종조(祖宗朝)로부터 내려온 고칠 수 없는 법입니다. 지금 성상의 하교가 아무리 친족의 우의를 돈독히 하는 성대한 뜻에서 나온 것이더라도 결코 그 어미들까지 육지로 내보낼 수는 없습니다"라 말하며 반대했다.
결국, 제주에서 얻은 자식들만 어머니 없이 제주를 떠나 한양의 아버지 곁으로 올라갈 수밖에 없었다.
왕족과 혼인한 여성들의 발까지 묶어 놓았던 출륙금지령은 일반 백성들에겐 가혹하리만치 더 엄격했다.
조선은 혼인을 통한 여성의 이주를 막기 위해 제주 여성의 경우 육지 남자와 혼인하는 것까지 법으로 막았다.

◇ 독특한 제주문화 명맥 이어
출륙금지령은 제주를 철저히 외부와 격리해놨다.
발달한 다른 지역의 문물을 받아들이는 데도 어려움이 있었고, 순조 25년(1825년) 출륙금지령이 해제된 이후에도 섬이라는 특수성으로 인해 쉽게 변화하지 못했다.
심지어 근세에 이르기까지 제주는 유배지라는 인식이 사람들에게 깔려 있어 오늘날처럼 '가보고 싶은 섬'이 아니라 '피하고 싶은 변방'에 불과했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기나긴 '고립'이 제주에 해(害)가 된 것만은 아니었다.
한국에서 가장 독특하다는 평가를 받는 제주의 문화를 보전하는 데 긍정적인 영향을 줬다는 해석이 나오기 때문이다.
언어와 해녀문화 등은 제주가 육지와 다른 대표적인 사례들이다.
훈민정음 창제 당시 아래아(ㆍ)와 쌍아래아(‥) 등 한글 고유의 형태가 남아있어 '고어(古語)의 보고'로 일컬어지는 '제주어'(제주 사투리) 명맥이 근근이 흐르고 있다. 'ㅎ+ㆍ+ㄴ저 옵서예'(어서오세요), 'ㄸ+ㆍㄸ+ㆍ+ㅅㅎ+ㆍ다'(따뜻하다) 'ㅇ+‥망지게'(야무지게) 등이 그 예다.
또 다른 지역 사투리에서도 나타나는 단순한 억양·리듬의 차이만이 아닌 전혀 다른 어휘가 존재하는 제주어의 형성 배경에는 '섬'이라는 한반도와 단절된 지리적 환경이 주요했지만, '출륙금지령'과 같은 인위적 단절이 제주어의 독자성을 더욱 키우는 데 한몫을 했다는 것이다.

고려시대 당시 제주에 '탐라총관부'가 설치돼 100년 이상 언어와 목축업 등에서 몽골의 영향을 받기도 했으나, 이후 지리적·인위적 단절로 인해 다른 지역의 영향을 최소화하면서 제주 나름의 정체성을 강화할 수 있었다는 설명이다.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에 등재된 해녀 문화에도 역시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다.
출륙금지령이 200년 가까이 지속하는 동안 제주 인구는 서서히 증가했고 자연스레 해녀의 수도 증가했다.
조선 숙종 때인 1694년 제주목사를 지낸 이익태가 쓴 지영록을 보면 '(제주에) 미역 캐는 잠녀가 많게는 800명에 이르렀다'는 기록이 나온다.
이어 해녀의 수는 1700년대 초 900여명으로, 20세기 초인 1913년 8천391명에 이를 정도로 급격히 늘어났다.
쉴 새 없이 불어오는 바람과 싸우며 밭에서 일하다가도 물때가 되면 손에 든 호미를 내던지고 바다로 뛰어들었던 강인한 제주 여성, 해녀들의 생명력은 이러한 역사적 배경 속에 이해할 수 있다.
[※ 이 기사는 새로 쓰는 제주사, 이야기 제주사, 제주도, 제주 유배인과 여인들,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등을 참고해서 제주의 출륙금지령과 문화에 대해 소개한 기사입니다.]
bjc@yna.co.kr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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