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희덕 시인 "어둠과 싸우려니 언어의 이빨과 발톱 드러냈죠"

입력 2018-11-21 06:03   수정 2018-11-21 14:00

나희덕 시인 "어둠과 싸우려니 언어의 이빨과 발톱 드러냈죠"
여덟 번째 시집 '파일명 서정시' 출간


(서울=연합뉴스) 임미나 기자 = "사회 어둠이나 그림자에 주목하고 그것들과 싸우려다 보니까 내가 가진 언어의 이빨과 발톱을 드러내게 된 것 같아요."
내년에 등단 30년을 맞는 나희덕(52) 시인(조선대 문예창작과 교수)은 최근 신작 시집 '파일명 서정시'(창비)를 출간하고 연합뉴스와 가진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너에게로 가지 않으려고 미친 듯 걸었던 그 무수한 길도 실은 네게로 향한 것이었다'라는 구절로 특히 유명한 '푸른 밤' 시인으로 많이 알려졌지만, 촉촉한 감성의 서정시가 그의 시 세계 전부는 아니다. 그는 꾸준히 자신의 이야기뿐 아니라 밖으로 시선을 넓혀 왔다. '말들이 돌아오는 시간' 이후 4년 만에 내는 이번 신작에서는 우리 사회 부조리함을 꼬집는 강렬한 목소리가 압도적이다.
"그동안 제 개인의 기억과 경험은 웬만큼 (시로) 나온 것 같아요. 이젠 나에 대한 얘기보다 나를 둘러싼 모든 것들이 시에 들어올 수 있는 훌륭한 재료들이란 생각이 듭니다. '말들이 돌아오는 시간'에서는 그게 반반 정도 됐는데, 이번 시집은 훨씬 더 바깥 얘기가 많아졌어요."
그를 서정시인으로만 아는 독자들에게는 낯설게 다가올 수도 있다.
"교과서나 요즘 SNS에서 낯익은 시들은 초기 시들이죠. 그때로부터 20년은 더 지나왔기 때문에 제 삶도 많이 달라지고 세상을 보는 눈도 달라졌다고 할 수 있어요. 특히 이번 시집 시들을 쓰는 동안에는 한국사회 시스템이나 속도, 어떤 폭력적인 구조 같은 것들에 한 개인으로서 굉장히 고통받은 기간이었어요. 아주 비(非)시적인 시간을 보내다 보니 낭만적인 서정이나 이런 것들이 제 안에 깃들 수 있는 조건이 전혀 못 됐죠. 그래서 얼마간 시를 못 쓰기도 했고, 우울하고 답답한 날들도 많이 보냈는데, 오히려 '이게 삶이지, 그걸 내가 대면하고 시로 쓰는 행위를 통해 견뎌내고 이겨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렇게 시를 쓰기 시작하면서부터 문제도 더 분명하게 보이고 놓여날 수 있었던 것 같아요."
그가 겪은 고뇌는 특히 세월호 참사와 문화계 블랙리스트 등 야만적인 일들에서 비롯된 부분이 크다고 했다.
"'이명박근혜' 기간에 저뿐 아니라 한국사회 지식인, 시인들이 힘든 시간을 보냈을 거예요. 세월호를 비롯해 블랙리스트 문제 등으로 참담한 속에서 시가 할 수 있는 역할이 무언가 자주 물었던 것 같고, 뭔가 논리적인 답변이나 대안을 내놓을 순 없지만, 그런 고통받는 사람들과 함께하고 진혼 하는 식으로 시를 썼던 것 같습니다."
표제작인 '파일명 서정시'는 문화계 블랙리스트처럼 공권력의 감시·검열 문제를 독일 서정시인 라이너 쿤체 이야기에 빗대 쓴 것이다. 쿤체를 감시한 구동독 정보국이 그에 관해 수집한 자료집 파일 이름이 '서정시'(Lyrik)였다고 한다.
"그들은 <서정시>라는 파일 속에 그를 가두었다/서정시마저 불온한 것으로 믿으려 했기에//파일에는 가령 이런 것들이 들어 있었을 것이다//머리카락 한줌/손톱 몇조각/한쪽 귀퉁이가 해진 손수건/체크무늬 재킷 한벌/낡은 가죽 가방과 몇권의 책/스푼과 포크/고치다 만 원고 뭉치/은테 안경과 초록색 안경집/침묵 한병/숲에서 주워온 나뭇잎 몇개//(…)//이 사랑의 나날 중에 대체 무엇이 불온하단 말인가//그들이 두려워한 것은/그가 사람의 마음을 열 수 있는 말을 가졌다는 것/마음의 뿌리를 돌보며 살았다는 것/자물쇠 고치는 노역에도/시 쓰는 일을 멈추지 않았다는 것" ('파일명 서정시' 부분)


'미투' 운동을 보며 쓴 시들도 있다.
"들어오세요/이 붉은 텐트 속으로//여자들은 모두 여기 와서 피를 흘려요//한달에 한번씩/아니, 하루에도 몇번씩//피에 젖은 깃발처럼/상처 입은 새처럼 바람에 파닥거리는//붉은 텐트 속으로//바닥에 흩어진 딸기를 밟고 가는 사람들이여/이 절벅거리는 슬픔을 보세요//으깨진 살과 부르튼 입술로 노래하는 이여/입술을 둥글게 오므려보세요" ('붉은 텐트' 부분)
"'붉은 텐트'는 여자들의 연대에 관한 시라고 할 수 있어요. 'Rhythm(리듬) 0'에서는 여성 신체에 가해지는 남자들의 타자화된 시선과 폭력성을 썼고요. 저 같은 경우에는 등단 초기 서정시 문법에 충실한 편이었고, 모성이라든가 따뜻함, 균형과 절제 같은 말들이 제 시에 따라다니던 수사들이었는데, 그런 기질이 시를 쓰게 하는 동력이면서 동시에 어떤 가부장적 체제의 선명한 인식이나 뚜렷한 싸움을 막고 있었던 측면도 있는 것 같아요. 그런데 오래 시를 쓰고 문단에서 여성 시인으로서 살아가면서 여성이라는 정체성을 점점 강하게 갖게 됩니다. 문단 자체가 가진 가부장적 구조에 대한 비판적 의식도 옛날보단 강해졌고요. 앞으로도 페미니즘 공부를 계속하면서 그런 부분을 키워가고 싶어요."
그는 이 시집이 독자들에게 어떤 섣부른 위안을 직접 주진 못하더라도 비슷한 고통을 겪는 이들과 소통하는 매개가 됐으면 한다고 했다.
"'비통한 자들을 위한 정치학'(파커 J. 파머)이란 책을 보면 세상이 진보한다는 게 마음이 부서진 평범한 사람들의 어떤 동요에서 비롯된다고 하거든요. 그 사람들이 더는 세계가 이대로는 안 된다고 하는 생각, 거기서부터 민주주의가 시작되고 평등이나 자유란 가치도 추구할 수 있다고 해요. 촛불로 정권 교체를 이뤄냈고 우리 사회가 그사이에 많이 달라졌지만, 결국은 비통한 사람들이 고통의 연원을 공유하고 서로 대화를 나누는 지점부터가 사회 변화의 시작이라고 봅니다. 그런 대화의 운을 떼듯이 시를 썼어요."


mina@yna.co.kr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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