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ㆍ1운동.임정 百주년](13) 백년만에 빛본 유관순家 사찰 문건

입력 2019-01-18 06:00   수정 2019-01-18 06:44

[3ㆍ1운동.임정 百주년](13) 백년만에 빛본 유관순家 사찰 문건
'암살' 여주인공 모티브된 '혁명의 어머니' 남자현 행적도 최근 확인
"기초자료 분석 미흡…미발굴 해외 자료도 방대할 것"



(서울=연합뉴스) 정아란 기자 = "천안군 동면 용두리 유관순 일가는 소요죄 및 보안법 위반으로 처분돼 일가가 거의 전멸하는 비참한 지경에 빠졌다."
1919년 7월 9일 당시 충청남도장관(지금의 충남도지사) 구와바라 하치시(桑原八司)는 조선총독부에 이러한 지역민심 동향 보고를 올렸다. 보고는 전달인 6월에 숨진 유관순 조부의 장례 방식을 두고 집안에 갈등이 있었다는 '첩보성' 내용으로 이어진다.
'소요사건에 관한 도장관 보고철'은 당국이 그해 4월 1일 충남 천안 아우내장터 만세 독립운동으로 유관순 일가 동향을 집중 사찰했음을 보여주는 사료다.
김정인 춘천교대 교수는 "유관순 본인은 물론 오빠인 유우석은 구속되고 부모님은 시위 현장에서 죽음을 맞은 비극적 사연이 민심에 미칠 영향을 우려해 당국이 유관순 일가를 예의주시한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김 교수는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에서 이 사료를 찾아 한국학중앙연구원 학술지 '정신문화연구(계간)' 최신호(2018년 12월호)에 실었다. 기존의 경성복심법원, 고등법원 판결문 외 당국이 유관순을 기록한 공식 사료가 추가로 확인됐다는 데 큰 의미가 있다고 학계는 평가한다.



이처럼 3·1운동과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맞아 국내외에서 사료 발굴과 조사 연구가 탄력을 받고 있다.
여운형이 1918년 우드로 윌슨 미국 대통령에게 보내려던 서한, 김규식이 1919년 파리강화회의에 갖고 간 한국독립공화당 명의의 또 다른 독립청원서, 열강의 무관심을 성토한 김규식 연설을 소개한 프랑스 신문 등 중요 사료가 지난 2017년부터 속속 빛을 보고 있다.
3·1운동은 국내 역사학계에서 단일주제로는 가장 많은 수의 논문을 끌어낸 사건이다. 하지만 구와바라 유관순 보고에서 보듯이 미발굴 자료 또한 엄청날 것으로 학계는 보고 있다.
고려대 정병욱 민족문화연구원 교수는 "100주년이 무색할만큼 3ㆍ1운동에 관한 기초자료 분석 작업이 충실히 이뤄지지 않았다"고 지적했다.
일각에서는 미국 국립문서관리청(NARA)을 비롯한 해외 미발굴 자료 발굴에도 신경을 써야 한다고 지적한다.




3·1운동에는 다양한 계층과 배경의 인물들이 참여했다. 학계에서는 그 주체들, 특히 주목을 받지 못했던 여성들의 활동을 규명하려는 움직임도 활발하다.
강윤정 경북독립운동기념관 학예연구부장은 '한국독립운동사연구' 최신호에서 '혁명의 어머니' 남자현 항일투쟁을 만주 독립단체인 정의부와 연결해 새롭게 조명했다.
경북 지역의 평범한 주부였으나 만주로 건너가 독립운동에 투신한 남자현은 영화 '암살' 안윤옥(전지현 분)의 모티브가 된 인물이다.
'1922년 참의부 중대장 백광운의 지령으로 군자금을 모집했다'는 1933년도 기사 때문에 지금까지 남자현은 참의부에서 활동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참의부가 설립된 것이 기사에 나온 시점보다 늦은 1923년이며, 남자현 아들 김성삼이 훗날 통의부에서 재편된 정의부에서 활동한 점을 고려할 때 남자현이 몸담은 단체는 통의부나 정의부로 봄이 타당하다는 추론이다.



논문은 남자현의 사이토 마코토 총독 암살 계획도 정의부 무장활동의 일환이었으며, 국내 잠입 시기도 1927년 4월로 봐야 한다고 각종 사료를 대조해 밝혔다.
논문의 연구기반이 된 김성삼 회고록 '나의 생애'(1975)와 남편 김영주 족보 등은 지금까지는 학계에서 주목받지 못했던 자료다.
강윤정 부장은 남자현 아버지 남정한이 지은 제문(祭文)도 새롭게 발굴, 남자현의 출생지 논란에도 종지부를 찍었다.
이밖에 스웨덴으로 건너간 신여성 최영숙, 임시정부 의정원 최초의 여성 대의원으로 활동한 김마리아 등과 관련된 사료도 최근에 발굴돼 각종 학술지에 실렸다.
박경목 서대문형무소 역사관장은 '일제 주요감시대상 인물카드' 분석 결과를 '한국독립운동사연구' 최신호에 실었다. 이 신상 카드는 문화재로 최근 지정됐음에도 현황·성격 파악이 미진했던 자료가운데 하나다.
박 관장은 4천837명(국사편찬위 통계 4천857명)의 신상 카드 6천264건 중에서 극소수를 제외하고는 모두 1919년 이후 작성됐다는 점을 지적하면서 "사실상 3·1독립만세운동 시기부터 일제의 독립운동가 수형 기록 관리가 시작됐음을 보여준다"고 말했다.



학계에서는 시대 변화에 따라 기존 사료를 다시 검토해 새로운 논의 대상으로 삼으려는 시도도 눈에 띈다.
1919년 2월 스승 곽종석의 명에 따라 상경한 영남의 젊은 유림 김황이 쓴 '기미일기'는 3·1운동에 참여하지 못한 유림이 대신 벌인 파리장서운동의 연구자료 정도로 활용됐다.
최근 들어와서는 '기미일기'를 3·1운동을 전후한 시기의 경성과 지방 동정, 지방유림이 독립운동에 접근하는 초기 경로 등을 보여주는 중요한 사료로 재평가하는 분위기다.
'한국독립운동사연구' 최신호에 실린 서동일 국가보훈처 학예연구사 논문에 따르면 '기미일기'는 '거사'를 앞두고 흉흉한 경성 풍경, 민씨 척족이 직접 전한 고종 독살설 등 당대를 복원할 수 있는 생생한 목격담과 소문을 전한다.
특히 유교계 명망가 전훈이 김황에게 "손병희 등이 장차 거사할 때 내가 유가인이라고 하여 고향으로 내려가서 유문을 일으켜 달라고 요구했었다"라고 말하며 민족대표 측과의 접촉 사실을 전한 내용은 다른 사료에서는 확인되지 않은 부분이다.


airan@yna.co.kr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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