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독의 기억] ⑦ 정상회담장앞 좌우충돌로 아수라장…"극단주의 저급성"

입력 2019-03-29 07:01   수정 2019-03-29 08:40

[서독의 기억] ⑦ 정상회담장앞 좌우충돌로 아수라장…"극단주의 저급성"
극우·극좌, 수천명씩 각각 반대·환영 집회…회담장 동독국기도 찢겨
슈피겔 "자기반성이 없는 덜 자란 정치적 어리석음이 뻔뻔히 뒤엉켜"
성과없는 회담두고 동서독 '열린 끝'…실무회담 통해 교류·협력 이뤄
멕켈 전 동독외무 "적대적이라도 최소한 대화상대로 존중해야 대화 지속"

[※ 편집자 주 = '비핵화'와 '평화'를 둘러싼 한반도 주변의 외교적 흐름이 활발하게 전개되면서 '통일'은 이제 현실적 주제로 다가서고 있습니다. 국내적으로도 많은 연구와 논의가 진행되고 있지만, 지구촌으로 눈을 돌려 한반도 통일의 '유일한 참고사례'에 관심을 기울여볼 때입니다. 한반도에서 8천500여 ㎞ 떨어진 동서독 통일과 이후 통합 과정은 더 이상 '먼나라 이야기'가 아닌 바로 '우리의 이야기'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독일 통일에 다리를 놓은 동서독 교류ㆍ협력이 이뤄지게 된 과정을 들여다보면 당시 서독 현실과 한국 간에 유사점을 상당히 발견할 수 있습니다. '남남갈등' 못지않게 '서서갈등'이 치열하게 전개됐습니다. 서독에서도 경제적 지원과 인권 문제가 갈등의 단골 소재였습니다. 베를린 장벽이 무너진 지 30주년인 올해, 연합뉴스는 지금까지 국내에 소개되지 않았던 '서서갈등'의 전개와 극복, 이 과정에서 민심의 흐름, 동서독 교류·협력의 일상화 과정을 살펴보고 있습니다. 내부의 분열과 대립을 극복하고 동독과의 공존에 성공했던 '서독의 기억'을 꺼내봅니다. 이제 겨우 서로에게 겨눈 총부리를 거두려는 한반도 상황에 도움이 될 수 있도록 하려 합니다. 연합뉴스는 올해 독일 통일의 상징인 베를린에서 새로운 자료 조사와 관점으로 취재, 7∼8개의 관련 주제로 독자 여러분께 찾아가고 있습니다. 지난 1월 첫 시리즈인 '서서갈등의 전개 및 극복과정'에 이어 '동서독 정상회담과 서서갈등'을 주제로 한 두번째 시리즈입니다. 3개의 기사를 3일간 연재합니다. 기획에는 한국국제교류재단(KF)과 이진 훔볼트대 정치문화학 박사가 협력했습니다.]
⑦ 정상회담장앞 좌우충돌로 아수라장…"극단주의 저급성"
⑧ '성과없어도 정상회담 좋다' 분단 벽앞 총리도 시민도 냉철
⑨ 前동독 외무 "남북정상, 한국전쟁 전몰자 묘지서 함께 추모해야"




(베를린=연합뉴스) 이광빈 특파원 = 1970년 5월 21일 서독 헤센주의 소도시 카셀.
1만 명에 가까운 극우와 극좌 그룹은 카셀의 도심에서 확성기로 핏대를 세워 서로에게 욕설을 퍼부었다.
극우 그룹은 '장벽 철폐', '장벽의 살인마' 등의 푯말을, 극좌 그룹은 환영 인사를 담은 푯말을 각각 내걸었다.
이들의 아우성을 뒤로하고 동서독 정상이 탄 차량은 경찰들의 삼엄한 경계 속에서 회담장으로 향하고 있었다.
그러나 녹갈색 가죽 바지를 입은 한 청년이 경계선을 뚫고 정상들이 탄 차량을 막아섰다. 극우단체 바이킹 청년단 소속이었다.
경계병력이 이 청년을 끌어낸 뒤 차량은 속도를 높여 혼란의 현장을 힘겹게 빠져나갔다.
차량이 뿜은 배기가스가 흩어지기 무섭게 양측은 뒤엉키며 물리적으로 충돌했다.
좌파 측에선 독일 공산당(DKP)이 주도해 4천명 이상이 빌리 슈토프 동독 총리를 환영하기 위해 모였다. 우파 측에선 극우 정당인 국가민주당(NPD)과 기독민주·기독사회당 연합의 청년단체(Die Junge Union), 실향민 단체에서 각각 1천여 명이 집결했다.
동서독 정상은 아수라장에서 벗어나 회담장인 호텔로 들어갔다.
그제야 한숨을 돌리던 서독 보안당국 측은 다시 아연실색했다.
우파 청년 세 명이 어느새 호텔 앞으로 접근해 걸려있던 동독 국기를 내려 찢고 있었다.
청년들은 위조한 언론인 비표를 앞세워 회담장 인근에 접근했다. 경찰이 호텔 앞에 친 600m의 안전띠는 무용지물이었다. 호텔에는 2천 명의 취재진이 진을 치고 있었다.
가뜩이나 서늘한 기운이 감돌던 정상회담장에 이런 소식이 전해지자 공기는 더욱 냉랭해졌다.
동독 측은 회담장에서 서독 우파들로부터 살해 위협에 노출되고 있다며 안전보장을 요구했다.
회담장 밖에서는 좌우 시위대 간 충돌이 더욱 격해졌다. 빌리 슈토프 동독 총리가 이날 저녁 찾기로 예정된 나치 희생자 추모공간 앞에서도 양측은 부딪쳤다.
찢어진 현수막을 지탱하던 나무판자는 각목으로 바뀌었다.
경찰은 고작 2천 명 정도에 불과해 상황을 통제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결국 슈토프 총리 측은 안전문제로 이날 밤 예정된 나치 희생자 추모공간 방문을 다음 날로 연기했다.
49년 전 5월 21일 카셀에서 열린 동서독 간 2차 정상회담을 둘러싼 풍경이다. 당시 주간지 슈피겔과 차이트 등의 언론 보도를 토대로 상황을 재구성했다.
2차 정상회담은 빌리 브란트 서독 총리가 앞서 같은 해 3월 동독의 에어푸르트를 방문해 동서독 간 첫 정상회담을 가진 데 대한 슈토프 총리의 답방 형식이었다.



◇ "서독 국민은 조용한 공감, 소수 극단그룹이 분위기 좌우" 비판
언론은 정상회담을 놓고 집회가 열리고 찬반 의견이 개진되는 것 자체에 대해선 긍정적으로 바라봤다.
슈피겔은 1970년 5월 25일 자 기사에서 "이곳은 자유의 나라다. 모두가 자신들의 의견을 마음껏 시위할 수 있다. 우리가 이런 나라에 살고 있다는 것을 우리는 늘 다른 쪽에 사는 동포들에게 보여주고 싶어했는데, 그것을 이번에 우리가 제대로 했다"고 평가했다.
슈피겔은 또 "경찰을 가능한 한 적게 투입하고 시위하고 싶은 모든 사람의 자유를 보장하는 것은 옳았다"고 썼다.
그러나 언론은 무력충돌에 대해선 매섭게 비판했다.
전체 국민의 의사가 아닌 소수 극단주의자에 의한 볼썽사나운 행동이었다는 비판이 가해졌다.
슈피겔은 "시위의 내용과 방식이 문제다. 우리는 너무 창피하다. 동독 에어푸르트(1차 정상회담)의 기억 때문이다. 그곳 사람들이 방문한 빌리 브란트 서독 총리에게 보여준 자발적인 환영의 외침은 브란트 총리마저 당혹스럽게 하지 않았던가. 그에 비해 카셀의 시위를 봐라. 이게 우리 시위의 자유의 현실을 그대로 보여주는 것이라면 우리는 벌써 그 자유를 금지했어야 하지 않았을까. 극단주의의 저급성, 자기반성이 없는 덜 자란 정치적 어리석음이 뻔뻔히 뒤엉켰다"고 날을 세웠다.
차이트는 같은 달 29일자 기사에서 "서독 국민의 조용한 공감의 분위기를 기대했으나, 대부분의 시민은 침묵한 상태로 근무할 뿐이고, 소수의 극단 그룹들이 분위기를 좌우했다"고 비판했다.
서독 정치권에서도 정상회담을 둘러싸고 갈등이 전개됐다.
당시 언론보도와 안드레아스 그라우의 저서 '시류를 역행하여' 등에 따르면 야당인 기독민주당의 라이너 바르첼 대표와 기독사회당의 프란츠 요제프 슈트라우스 대표는 2차 정상회담이 끝난 뒤 통일에 이르는 정치가 아니고, 브란트 총리의 나라 안팎에서 하는 말이 다르다고 지적했다.
특히 슈트라우스 대표는 1차 정상회담 이후 '모험과 파멸로의 행진'을 계속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동독을 국가로 인정하지 않고 통일을 최우선 원칙으로 삼아야 한다는 선명한 입장을 되풀이했다. 유엔 동시 가입도 해서는 안 되고, 동독의 인권상황이 진전돼야 한다는 주장도 펼쳤다. 그러나 야당의 비판은 일정한 선을 넘어가지 않았다.
야당은 2년 뒤 브란트 총리를 상대로 불신임 투표를 진행한 데 이어 동서독 기본조약에 대해 위헌소송까지 진행하는 등 여당과 극한 대립을 펼쳤으나, 정치적 대립의 과정에서도 동서독 간 대화의 필요성과 노력 자체에 대해선 인정한 셈이었다.
서독의 일반적 정서상 동독은 이념적 차이를 떠나 민주주의적 정당성이 결여된 체제인 데다 예측하기 어려운 상대방이라는 인식이 많았다.
동독은 소문이 돌던 베를린 장벽 건설 계획을 누차 부정해오다가 1961년 11월 기습적으로 장벽을 세워 서독인들을 경악하게 만들었다.
이 때문에 동독과의 대화에 대한 저항감과 회의감이 형성되기도 했다. 이런 정서는 카셀 정상회담에서의 우파 시위에 반영이 돼 있다.
그렇지만, 우파의 대(對)동독 정책의 실효성이 의문시되고, '68 학생운동'을 위시한 서독 내 사고의 전환과 세대교체가 동반되면서 동독과의 관계 정상화에 대한 욕구가 커졌다.
자연스럽게 서독에서는 정상회담의 필요성을 인정하는 여론이 지배적이었다. 브란트 총리도 신동방정책 속에서 자신있게 정상회담을 추진할 수 있었던 배경이었다.


◇ 회담 냉랭했지만 대화 계속하기로…실무회담으로 조약 체결
이런 가운데 열린 1, 2차 정상회담은 어떤 공동성명이나 합의를 내놓지 못했다. 2차 정상회담에선 다시 만나자는 기약조차 없었다.
그러나 양측은 실패하지 않았다는 공통적인 평가를 내놓았다.
동서독은 '열린 끝(Offenes Ende)'이라는 입장을 발표했다.
슈토프 총리는 카셀을 떠나는 기차에 탑승한 뒤 창문 밖으로 손을 내밀며 브란트 총리에게 "다시 만나자(Auf Wiedersehen)"라고 이야기했다.
동독 국기가 찢어지고, 양측의 논의가 극심한 평행선을 달리는 과정에서 슈토프 총리가 회담장을 박차고 나가지 않을까 하는 우려도 제기됐던 전날 밤과는 분위기가 사뭇 달랐다.
차이트는 인사를 나누고 돌아선 브란트 총리의 표정에 대해 "승리자의 표정은 아니었으나 만족스러워 보였다"고 표현했다.
일간지 라이니쉐 포스트는 "양자가 '열린 끝'이라는 합의 아래 계속 대화의 가능성을 열어두기로 한 것의 의미에 주목해야 한다"고 평가했다.
두 차례의 정상회담은 서명한 문서를 남기지 못했지만, 불신의 벽이 높던 양측 간에 신뢰의 토대를 마련한 셈이다.
특히 동서독 정상이 동등한 자격으로 마주 앉아 대화의 시대를 열었다는데 큰 의미가 있었다.
이후 양측 정상이 다시 만나기까지 11년이 걸렸지만, 실무접촉은 부산히 이뤄졌다.
양측 실무대표인 서독의 에곤 바와 동독의 미하엘 콜은 카셀회담 후 6개월이 지난 11월 첫 접촉을 가진 뒤 무려 70여 차례나 얼굴을 맞댔다.
2차 동서독 정상회담이 열린 지 3개월만인 같은 해 8월 서독과 소련은 모스크바조약을 체결해 관계를 정상화했다.
동서독 협상도 탄력을 받아 1972년 5월 교통조약이 체결됐다. 양측 시민의 상호방문 문턱을 낮춘 내용이다. 동서독 간에 최초의 조약이었다.
양측은 이런 접근 과정을 거친 뒤 1972년 12월 21일 기본조약을 체결했다.
이를 토대로 여러 분야에서의 동서독 교류·협력에 대한 협정들이 체결됐고, 일반인들의 인적 교류 등 민간 분야의 실핏줄이 여러 갈래로 이어졌다.


◇ 동서독, 남북한 다른 조건이지만 '대화상대로서의 존중'은 필요조건
서독의 신동방정책이 본격화되던 당시 동서독 간 2차례의 정상회담을 남북 정상회담의 직접적인 참고사례로 삼기는 쉽지 않다.
배경과 조건이 상당히 상이한 탓이다. 현재 한반도 문제에선 남북 정상회담보다는 북미 정상회담이 결정적인 열쇠로 작용하고 있다.
북한 김정은 국무위원장의 입지와 비교해보면 동독 총리는 기반이 상당히 약하다. 소련에 밉보이면 위성국인 동독 총리의 자리보전은 어려웠다.
특히 북미 정상 간 '하노이 담판 결렬'로 북미 관계는 냉각기에 들어섰고, 남북 관계도 그 영향으로 타격을 받고 있다.
애초 2차 북미 정상회담 이후 남북 정상이 다시 마주할 것이라는 관측이 많았다.
김 위원장의 서울 답방을 예상하는 분석도 많았지만, 다시 북미 관계부터 풀어가야 하는 상황이다.
북미 간의 기싸움이 치열한 가운데서도, 다행히 대화 상대방에 대한 최소한의 존중은 이뤄지고 있다.
북한의 최선희 외무부 부상은 최근 김 위원장과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궁합(chemistry)이 훌륭하다고 말했고, 세라 샌더스 백악관 대변인은 트럼프 대통령이 김 위원장을 좋아한다고 언급했다.
이 때문에 악화된 상황 속에서도 북미 간 대화의 문은 열려있다는 기대감이 남아있다.
이진 훔볼트대 박사는 연합뉴스와의 인터뷰에서 "독일 사례가 한반도 상황에 시사하는 것은, 한편으로는 문제가 있는 상대방일수록 그와 대화가 필요하다는 지혜이며, 다른 한편으로는 적어도 대화의 상대방으로서 존중하며 대화의 지속 및 결실을 도모했던 인내심"이라고 말했다.
동독의 반체제 인사 출신으로 동독의 마지막 외무장관을 지낸 마르쿠스 멕켈은 연합뉴스와의 인터뷰에서 "반대하는 입장에서도 어떠한 폭력을 사용해서는 안 된다"며 "적대적인 상대라도 최소한 대화상대로서, 국가수반으로 존중해야 하고, 이런 존중이 있어야 대화가 막히지 않는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멕켈은 "대화 상대로의 존중과 상대 체제에 대한 적극적인 인정 및 정당화는 다른 차원의 일"이라고 말했다.

#서독의기억 #서서갈등 #남남갈등 #동서독교류협력 #독일통일 #남북통일 #정상회담
lkbin@yna.co.kr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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