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ㆍ1운동.임정 百주년](58) '백마 타고 오는 초인' 허형식

입력 2019-04-01 06:00   수정 2019-04-01 07:34

[3ㆍ1운동.임정 百주년](58) '백마 타고 오는 초인' 허형식
동북 항일연군 제3로군 총참모장…고향 구미 등지서 서훈 운동
사회주의 계열로 분류, 조명 안 돼…중국은 기념비까지 설치



(구미=연합뉴스) 이승형 기자 = "다시 천고(千古)의 뒤에 백마 타고 오는 초인이 있어 이 광야에서 목 놓아 부르게 하리라"
저항시인 이육사(1904∼1944)의 시 `광야'에 등장하는 `백마 타고 오는 초인'은 실제 만주에서 백마를 타고 무장 항일투쟁을 벌였던 허형식(許亨植) 장군(1909∼1942)이라는 주장이 학계에서 나오고 있다.
허형식 장군은 육사 어머니의 사촌 동생으로 만주벌판에서 항일투쟁을 하며 육사를 만났다고 한다.
허 장군은 육사보다 다섯살 어렸지만, 키가 크고 잘 생겨 많은 사람이 따랐다.
그는 1915년 부친을 따라 만주로 가 독립운동에 투신했으며 중국 공산당 주도로 결성한 한·중 통합 군사조직인 동북 항일연군 제3로군 총참모장으로 북만주 일대에서 항일 무장투쟁을 벌였다.
김일성과 김책 등도 동북 항일연군 출신이다.
하지만 사회주의 계열이라는 이유로 그동안 잘 알려지지 않았고 독립유공자로 인정도 받지 못했다.
그러다 최근 몇 년 전부터 항일투쟁에 몸 바친 그의 업적을 재조명하고 독립유공자로 서훈해야 한다는 주장이 대두되고 있다.



허 장군은 1909년 11월 18일 경북 구미시 임은동에서 허필(許苾 1855∼1932)의 아들로 태어났으며 의병장 왕산 허위(許蔿 1855∼1908)의 5촌 조카이기도 하다. 왕산은 일제가 명성황후를 살해한 1895년 의병운동에 뛰어들었으며, 1908년 전국 통합의병부대 작전본부장을 맡아 서울로 진격하려다 체포돼 사형을 당했다. 서울 동대문구 왕산로는 서대문형무소 1호 사형수인 선생의 호를 따서 지어진 이름이다.
허 장군의 본명은 허극(許克)으로 알려져 있으며 이희산(李熙山) 혹은 이삼룡(李三龍)이라는 별명을 쓰기도 했다.
의병장 허위의 순국 후 일제의 학대와 탄압이 더욱 가혹해지자 1915년 허형식 가족은 다른 허씨 집안과 함께 간도로 향했다.
그는 1929년부터 한인 공산주의자들과 활동을 같이했고 1930년 초 중국 공산당에 입당해 그해 5월 1일 '붉은 5월 투쟁'에서 하얼빈 일본총영사관 습격을 주도해 두각을 나타냈다.
이후 항일단체들을 조직하는 등 본격적인 무장투쟁에 나섰고 1935년 1월 동북인민혁명군 제3군 제1독립사에서 선전부장과 제2단장을 지냈으며 1939년에는 동북 항일연군 제3로군이 편성되자 제3로군 총참모장 등을 맡아 무장투쟁을 이끌며 일제 토벌대를 상대로 혁혁한 전공을 올렸다.
총참모장은 중국인을 포함한 동북 항일연군의 최고위급 책임자다.



그러나 일본이 1941년부터 병력을 대거 투입해 북만주에서 활동하던 제3로군을 집중적으로 공격하면서 큰 어려움을 겪었다.
동북 항일연군 지도자들은 일본의 무자비한 공격에 대부분 러시아로 피했으나 그는 만주에 남아 끝까지 싸웠다. 독립군이 떠나고 난 뒤 일본군에 당할 동포의 고초를 생각하니 발걸음을 옮길 수 없었다고 한다.
그가 이끈 부대 활동은 만주에서 거의 최후의 항일 무장투쟁이었다고 한다.
그는 생존한 제3로군 200여명을 지휘하며 최후까지 유격전을 벌였고 1942년 8월 북만주 경안현 청봉령 계곡에서 일본군의 습격을 받아 전사했다. 일본군은 허 장군의 몸에서 머리를 분리해 가져가고 남은 시신을 방치했다. 이튿날 전투현장에서 1km 떨어진 곳에 다리뼈와 권총만 남아 있었다고 한다.
일본군을 상대로 무수한 유격전을 벌여 하얼빈 등 27개 도시를 점령하며 일제 군인과 경찰 1천557명을 사살한 그는 중국에서 '만주 최후 파르티잔'으로 불린다.
중국 동북이나 연변 지방에서 발행된 각종 역사서나 전기류에서 거의 빠짐없이 등장할 정도로 유명한 항일투사다.
중국 정부는 1998년 10월 허형식의 기념비를 세우고 공원도 만들었다.
2014년 9월에는 국가급 항일전쟁 유적지와 함께 발표한 '항일영웅 열사' 300명 명단에도 이름을 올렸다.



그러나 국내에서는 무수한 세월이 흐른 뒤에야 그의 이름이 알려졌다.
1993년 장세윤 동북아역사재단 박사가 쓴 '허형식 연구' 논문 등으로 그의 이름이나 공적이 소개되기 시작했고 최근에는 그를 주인공으로 한 소설이 나오며 활동상을 다시 조명하는 분위기가 일고 있다.
그의 고향인 구미와 독립운동 관련 단체 등을 중심으로 서훈 운동도 벌어지고 있다.
민족문제연구소 구미지회는 허형식 장군 독립유공자 서훈 추진위원회를 구성해 관련 자료 확보에 나섰다.
장기태 추진위원장은 "독립운동을 하면서 좌익이나 공산당에 있었더라도 북한 정부 수립에 역할을 하지 않았으면 서훈이 가능하다"며 "허형식 장군은 1942년 돌아가셨기 때문에 북한 정부 수립하고도 아무런 관련이 없다"고 말했다.
지방분권운동구미본부 김종길 대표는 "동북 항일연군에 김일성도 활동했고 중국 쪽에서 항일투쟁을 벌여 그동안 서훈에 대한 거부 반응도 있었던 것 같은데 이제는 그의 활약상과 항일투쟁을 다시 제대로 살펴봐야 한다"고 강조했다.
국가보훈처는 2019년 업무보고에서 '3·1운동 및 대한민국 임시정부 100주년'을 계기로 역대 최대 규모로 독립유공자를 발굴, 포상하겠다고 밝힌 바 있다.
haru@yna.co.kr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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