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독의 기억] ⑩'보수의 변신'에 인적교류 확대…"스파이?" 상호불신 줄어

입력 2019-06-23 08:05  

[서독의 기억] ⑩'보수의 변신'에 인적교류 확대…"스파이?" 상호불신 줄어
신동방정책 비판했던 보수 집권후 동독에 차관지원…교류확대 대가얻어
정치권이 동독 방문에 대한 서독인들의 높은 욕구 반영
국경 통과시 숨죽이던 학생들, 다녀와선 "외국 아냐"…"동질성·다정함 느껴"



[※ 편집자 주 = '비핵화'와 '평화'를 둘러싼 한반도 주변의 외교적 흐름이 활발하게 전개되면서 '통일'은 이제 현실적 주제로 다가서고 있습니다. 국내적으로도 많은 연구와 논의가 진행되고 있지만, 지구촌으로 눈을 돌려 한반도 통일의 '유일한 참고사례'에 관심을 기울여볼 때입니다. 한반도에서 8천500여 ㎞ 떨어진 동서독 통일과 이후 통합 과정은 더 이상 '먼나라 이야기'가 아닌 바로 '우리의 이야기'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독일 통일에 다리를 놓은 동서독 교류ㆍ협력이 이뤄지게 된 과정을 들여다보면 당시 서독 현실과 한국 간에 유사점을 상당히 발견할 수 있습니다. '남남갈등' 못지않게 '서서갈등'이 치열하게 전개됐습니다. 서독에서도 경제적 지원과 인권 문제가 갈등의 단골 소재였습니다. 베를린 장벽이 무너진 지 30주년인 올해, 연합뉴스는 지금까지 국내에 소개되지 않았던 '서서갈등'의 전개와 극복, 이 과정에서 민심의 흐름, 동서독 교류·협력의 일상화 과정을 살펴보고 있습니다. 내부의 분열과 대립을 극복하고 동독과의 공존에 성공했던 '서독의 기억'을 꺼내봅니다. 이제 겨우 서로에게 겨눈 총부리를 거두려는 한반도 상황에 도움이 될 수 있도록 하려 합니다. 연합뉴스는 올해 독일 통일의 상징인 베를린에서 새로운 자료 조사와 관점으로 취재, 7∼8개의 관련 주제로 독자 여러분께 찾아가고 있습니다. 첫 시리즈인 '서서갈등의 전개 및 극복과정', 두 번째 시리즈인 '동서독 정상회담과 서서갈등'에 이은 세 번째 시리즈입니다. 3개의 기사를 3일간 연재합니다. 기획에는 한국국제교류재단(KF)과 이진 훔볼트대 정치문화학 박사가 협력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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⑪ "'가자! 동독으로', 방문확대로 긴장완화"…7選 출신 조언
⑫ 100배 바가지 동독수학여행…"칼날위 걷는듯했지만 효과 커"


(베를린·뮌헨=연합뉴스) 이광빈 특파원 = 1980년대 서독 학생들의 동독 수학여행 등 동서독 인적교류 확대는 보수의 변신을 보여준 대표적인 사례였다.
동독과의 교류·협력을 적극 추진하던 사회민주당으로부터 1982년 말 정권을 되찾은 보수적인 기독민주당·기독사회당 연합은 사민당의 신(新)동방정책을 뒤집지 않았다.
도리어 보수정권이 들어선 뒤 인적교류는 더욱 확대됐다. 진보와 보수 간 선의의 경쟁이 불러온 효과였다.
교사였던 빌리 아이젤레(73)의 경험은 당시의 상황을 압축적으로 보여준다.
아이젤레는 1970년대 후반∼1980년대에 서독의 청소년들을 인솔해 동독 수학여행을 가장 많이 다녀온 교사였다.
아이젤레는 보수적 정서가 강한 바이에른주(州)의 뮌헨에서 교사 생활을 했다. 당시 바이에른 당국과 보수파들이 수학여행에 고개를 갸웃했다.
아이젤레도 보수주의자였지만, 김나지움 학생들의 동독 수학여행을 적극 추진했다.
그러던 그는 1983년 초 발이 묶일 뻔했다. 한 동료 교사가 학교 측에 아이젤레의 동독 수학여행 인솔을 막아달라는 진정서를 제출한 탓이었다.
보수적인 교사가 방해할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알고보니 아이러니하게도 좌파 성향이 강한 교사였단다.
당시 경제·문화적으로 서독이 동독보다 우월한 상황에서도 이 교사는 동독 체제가 낫다는 인식을 갖고 있었다. 학생들에게 외견상 동독이 낙후된 현실을 보이기 싫었던 이유에서 훼방을 놓으려 했다는 게 아이젤레의 설명이었다.
통일 전 활발했던 동서독 인적교류의 마지막 퍼즐인 동독으로의 수학여행을 놓고 서독 내에서 이념적 배경에 따른 갈등이 다층적으로 벌어진 한 단면이다.
아이젤레는 연합뉴스와의 인터뷰에서 "보수가 중요시하는 가치는 인간의 자유로, 자유를 누리기 위해서는 용기가 동반돼야 한다"면서 "우리와 체제가 다르다고 외면하는 것이 아니라, 직접 만나보고 이해하려는 용기가 자유라는 것이 보수주의자로서의 신념이었다"고 당시의 생각을 전했다.


◇ 신동방정책 추진 후 진보·보수 정권, 인적교류 확대 추진
동서독 분단 직후 인적왕래에는 큰 어려움이 없었다. 서독으로 탈출하는 동독인들의 행렬도 이어졌다.
1954년 서독 함부르크에서 태어난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는 그해 목사인 아버지를 따라 동독 브란덴부르크주(州)로 이주했다.
그러나, 동독이 1961년 8월 13일 베를린 장벽 건설을 기점으로 국경을 완전히 폐쇄한 이후 인적교류는 급격히 위축됐다.
서독인에게 분단 상황에서도 인적교류는 당연시되어온 터라, 이후 동서독 간 협상에서 주요 의제였다.
1972년 동서독 간 교통협약 및 교류·협력의 새로운 장(場)을 연 기본조약 체결 전해만 해도 동독으로 간 서독 여행객 수는 모두 126만 명이었다.
이후 동서독 간 교류가 늘어나면서 1978년에는 동독으로간 서독 여행객이 317만명에 달했다.
미국과 소련이 탄도미사일 배치 문제로 군사적 긴장이 고조된 1981년에 210만명으로 급감했다가, 서독 보수정권이 동독에 차관을 제공한 1983∼1984년 이후 급증하기 시작해 1986년에는 379만 명에 달했다.
인적왕래는 분단 직후부터 서독의 보수와 진보진영 모두 우선 순위로 올려놓은 정책적 사안이었다.
진보성향인 사회민주당 소속의 빌리 브란트 총리는 1969년 취임한 이후 신(新)동방정책을 추진하면서 인적교류 확대에 팔을 걷어붙였다.
보수성향의 야당인 기독사회당·기독민주당 연합이 1982년 말 정권을 탈환했을 때는 다소 인적교류에 대해 우려의 목소리도 나왔다.
사민당의 신(新)동방정책을 비판했던 보수진영이 대(對)동독 정책을 변경할 경우, 동독 측의 반발로 인적교류가 축소될 수 있다는 걱정에서였다.
그러나, 보수정권은 신동방정책을 받아안은데다, 동독과의 협상에서 인적교류를 최우선시해 진보정권보다 더욱 인적교류가 늘어나는 성과를 올렸다.


◇ '수학여행 위험' 반대했던 보수, 80년대 초 입장 바꿔
진보와 보수진영은 인적교류의 필요성에는 공감했지만, 현실적인 실행 문제에서 상당한 이견을 보였다.
1970년대 야당인 보수진영은 동서독 당국 간 합의한 서독 여행객의 동독 마르크 의무환전액이 지나치게 높다고 비판했다.
동독 수학여행이 위험할 수 있다는 주장과, 숙박비 등을 최고 100배 정도까지 '바가지'를 씌우는 동독의 관행도 비판의 지점이었다.
서독 청소년들의 동독 수학여행을 둘러싼 입장차는 인적교류를 둘러싼 갈등의 축소판이기도 하다.
1970년대 중후반 사회민주당 주도의 연립정부는 비용 일부를 지원하기 시작하면서 수학여행을 장려했다. 동독에서 서독 학생들이 숙박할 수 있는 유스호스텔 건립도 지원했다.
주간지인 디 차이트의 1983년 12월 30일자 기사에서 서독 정부가 수학여행 지원 경비로 매년 1천500만 마르크의 재정을 책정하고 있다고 전했다.
여러 기관에서는 동독 수학여행을 다녀온 학생들의 기행문 대회를 열기도 했다.
동독으로의 수학여행은 1970년대 중반 서독 니더작센주(州)에서 먼저 주 당국 차원으로 시작했다.
바덴-뷔르텐부르크주(州)에서는 1980년대 말에 거의 모든 재학생이 동독을 다녀올 정도로 활발히 추진됐다.
그러나 보수적인 기독사회당이 정권을 잡고 있던 바이에른 주정부는 부정적인 태도를 보였다. 앞서 언급한 아이젤레 같은 교사들을 직접적으로 제지하지는 않았지만, 1981년 한 학교의 수학여행 신청을 불허하면서 본격적인 규제에 나서려 했다.
1981년 11월 16일자 일간지 쥐트도이체차이퉁 기사에 따르면 한스 마이어 바이에른 주정부 문화부 장관은 동독으로의 수학여행이 위험하다는 이유로 규제해야 한다는 입장을 나타냈다.
그는 동독 정부가 서독 젊은이들을 스파이화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접근한다는 주장도 펼쳤다.
그러나 동독 수학여행을 다녀온 학생들이 주정부에 항의서한을 보내고 바이에른 주의회의 비판이 제기되자 바이에른 주정부는 하루 만에 입장을 바꿔 수학여행을 허용했다.
68 운동에 참여했던 좌파 성향의 일부 교사들도 동독 수학여행에 대해 부정적이었다.
동서독 분단 당시 15년 가까이 서독 정부 산하 전(全)독일연구소장을 지낸 데틀레프 퀸은 연합뉴스와의 인터뷰에서 "68 운동 출신 교사들은 동독에서 자유민주주의를 자극할 수 있다는 이유로 동독 수학여행 인솔을 거부했다"면서 "일반적으로 교사들은 동독 수학여행을 받아들였다"고 말했다.
당시 전독일연구소는 동독 수학여행 프로그램을 지원하는 역할도 담당했었다.


◇ "국경 넘을 때 문제학생도 숨죽여…이게 냉험한 현실이구나…"
동독 수학여행의 효과는 컸다.
디 차이트는 당시 기사에서 "여론조사 결과 동독으로의 첫 여행 직후 50%의 청소년들은 동독을 더 이상 외국으로 느끼지 않는다고 답했다"면서 "두번째 여행한 이후에는 71%의 청소년들이 동독을 더 이상 외국으로 느끼지 않는다고 답했다"고 전했다.
당시 유럽인들의 만남과 교육을 위해 만들어진 재단인 '유로파하우스'(Europahaus)가 발간한 동독 수학여행 책자에 실린 기행문에도 당시 청소년들의 소감이 실렸다.
1984년 4월 10일간 동독 수학여행을 다녀온 17세 학생은 기행문에서 "동독인과의 동질성과 그들의 다정함을 느끼고 그들이 열려있다는 것을 제대로 경험한 기회가 됐다"면서 "무엇보다 동독이 결코 외국이 아니라는 생각을 가지게 됐다"고 적었다.
한독주니어포럼 독일측 담당자인 토마스 콘호이저는 연합뉴스와의 인터뷰에서 "청소년이던 1980년대 후반 동독에 1박 2일로 다녀왔는데, 말썽을 피우던 학생들이 동독 검문소를 통과하면서 동독 국경수비대의 표정에 숨을 죽였다"라며 "'이것이 분단이구나'하는 냉엄한 현실을 피부로 느꼈다. 책으론 배울 수 없는 경험이었다"고 말했다.
베를린 장벽 붕괴 1년 전인 1988년에는 연방정부와 주정부 지원으로 7만4천명이 동독 수학여행을 다녀왔다.
반면 같은 해 서독을 단체 방문한 동독 청소년들은 5천500명에 불과했다.
기독사회당은 수학여행에 대한 입장 변화 이후 2년이 지난 뒤 더욱 급격한 입장 변화를 일으켰다.
기독사회당 대표이자 바이에른 주총리인 프란츠 요제프 슈트라우스가 1983∼1984년 경제난을 겪던 동독을 상대로 서독의 차관 제공을 중개했다.
헬무트 콜 총리가 이끄는 기독민주당보다 더 보수적 색채인 기독사회당으로서는 파격적인 변화였다. 몇 명 의원들은 이에 반대해 탈당까지 할 정도로 당내에서도 선뜻 받아들이기 어려운 움직임이었다.
슈트라우스는 동독 정부 측과 차관 제공 협상을 진행하면서 서독인들의 동독 여행 기간 연장 및 동독 여행시 의무적으로 환전해야 하는 금액 인하 등의 대가를 얻어냈다.
기독사회당 소속으로 7선 의원을 지낸 하르트무트 코시크는 연합뉴스와의 인터뷰에서 "보수진영은 진보진영의 신동방정책을 계승해 동서독 간 교류확대 및 긴장완화를 추진하면서도 동독을 헌법적 국가로 인정하지 않는 '하나의 독일'이라는 원칙을 이어가 정책적 목표 및 이념 간의 균형점을 찾으려 했다"면서 "동서독 긴장 완화를 위해 책임지는 자세를 취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진 훔볼트대 정치문화학 박사는 "보수와 진보 간의 첨예한 갈등 속에서도 선의의 경쟁을 통해 1960년대 집권 당시 대동독정책에 문제점을 보인 보수 진영이 현실적인 해법을 찾은 것"이라며 "변화를 추구하면서도 통일이라는 보수의 원칙을 지켜 보수 유권자들에게 변절당하지 않았다는 느낌도 준 것"이라고 강조했다.


◇ '통일보다 동독여행'…서독인들의 편익 추구
동서독 분단기에 서독인들의 동독 여행이 활발할 수 있었던 데에는 서독인들의 요구가 뒷받침돼 있다.
동독 여행에 대한 서독인들의 욕구가 높은 점이 동서독 협상 등에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여론조사 기관 알렌스바흐연구소의 1972년 2월 여론조사 결과, '동구권 국가들과의 외교에서 포기해서는 안 되는 사항'에 대한 질문(복수응답)에 응답자의 88%가 '동베를린으로의 여행 권리 확보'를 선택했다.
'통일 목표를 공고히 해야한다'(62%)는 응답보다 높았다.
동독의 마지막 외무장관을 지낸 마르쿠스 멕켈은 연합뉴스와의 인터뷰에서 "민간교류가 질적, 양적으로 확대되기 전까지 동서독 사람들이 다른 국가에서 휴가 중 만나면 상대에 대해 '스파이가 아닌가' 하는 의구심을 쉽사리 품었는데, 교류 규모가 커지면서 서로에게 가진 불신이 점차 사라지고 친밀감이 늘었다"고 말했다.
lkbin@yna.co.kr #서독의 기억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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