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독의 기억] ⑫100배 바가지 동독수학여행…"칼날위 걷는듯했지만 효과 커"

입력 2019-06-25 09:09  

[서독의 기억] ⑫100배 바가지 동독수학여행…"칼날위 걷는듯했지만 효과 커"
동독 수학여행 가장 많이 인솔했던 아이젤레 인터뷰…"민족 동질성 느낄 기회"
주(州)당국·동료 교사가 방해하기도…동독 비밀경찰에 감시당해



[※ 편집자 주 = '비핵화'와 '평화'를 둘러싼 한반도 주변의 외교적 흐름이 활발하게 전개되면서 '통일'은 이제 현실적 주제로 다가서고 있습니다. 국내적으로도 많은 연구와 논의가 진행되고 있지만, 지구촌으로 눈을 돌려 한반도 통일의 '유일한 참고사례'에 관심을 기울여볼 때입니다. 한반도에서 8천500여 ㎞ 떨어진 동서독 통일과 이후 통합 과정은 더 이상 '먼나라 이야기'가 아닌 바로 '우리의 이야기'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독일 통일에 다리를 놓은 동서독 교류ㆍ협력이 이뤄지게 된 과정을 들여다보면 당시 서독 현실과 한국 간에 유사점을 상당히 발견할 수 있습니다. '남남갈등' 못지않게 '서서갈등'이 치열하게 전개됐습니다. 서독에서도 경제적 지원과 인권 문제가 갈등의 단골 소재였습니다. 베를린 장벽이 무너진 지 30주년인 올해, 연합뉴스는 지금까지 국내에 소개되지 않았던 '서서갈등'의 전개와 극복, 이 과정에서 민심의 흐름, 동서독 교류·협력의 일상화 과정을 살펴보고 있습니다. 내부의 분열과 대립을 극복하고 동독과의 공존에 성공했던 '서독의 기억'을 꺼내봅니다. 이제 겨우 서로에게 겨눈 총부리를 거두려는 한반도 상황에 도움이 될 수 있도록 하려 합니다. 연합뉴스는 올해 독일 통일의 상징인 베를린에서 새로운 자료 조사와 관점으로 취재, 7∼8개의 관련 주제로 독자 여러분께 찾아가고 있습니다. 첫 시리즈인 '서서갈등의 전개 및 극복과정', 두 번째 시리즈인 '동서독 정상회담과 서서갈등'에 이은 세 번째 시리즈입니다. 3개의 기사를 3일간 연재 중입니다. 기획에는 한국국제교류재단(KF)과 이진 훔볼트대 정치문화학 박사가 협력했습니다.]

⑩ '보수의 변신'에 인적교류 확대…"스파이?" 상호불신 줄어
⑪ "'가자! 동독으로', 방문확대로 긴장완화"…7選 출신 조언
⑫ 100배 바가지 동독수학여행…"칼날위 걷는듯했지만 효과 커" ←←←

(베를린·뮌헨=연합뉴스) 이광빈 특파원 = "서독 청소년들을 동독으로 수학여행 보내는 것은 준비 과정부터 칼날 위를 걷는 것 같았죠. 그래도 열번 듣는 것보다 한 번이라도 직접 경험하는 게 필요하다고 생각해서 멈출 수가 없었습니다."
옛 서독 시절 바이에른주(州) 뮌헨에서 교사 생활을 했던 빌리 아이젤레(73)는 1970년대 말부터 학생들을 인솔해 동독 수학여행을 다녀왔다.
서독 연방정부는 동독 수학여행을 장려했지만, 보수적인 기독사회당이 장기집권해온 바이에른에서는 아직 학생들의 수학여행을 지원하지 않았던 시점이었다.
이런 탓에 교육 당국은 아이젤레의 인솔을 탐탁지 않게 여겼고, 일부 동료 교사들도 마뜩잖은 눈길을 보냈다고 아이젤레는 연합뉴스와의 인터뷰에서 설명했다.
"바이에른은 프랑스와 이탈리아, 스위스 등이 인접해 있기 때문에 학생들이 수학여행지에 대한 선택의 폭이 넓었어요. 학생들에게 동독 수학여행에 대한 정보를 제공하되 선택은 자발적으로 하도록 했어요. 저의 제안에 대부분의 학생은 자발적으로 동독 수학여행을 선택했어요. 당국의 견제를 극복할 수 있었던 요인이었습니다."


좌파 성향이 강한 한 동료 교사는 아이젤레의 동독 수학여행 인솔을 반대하는 진정서를 학교 측에 제출해 아이젤레가 곤경에 처하기도 했다.
동독의 낙후된 현실을 학생들에게 보이기 싫은 속내로 방해를 하려 했다는 게 아이젤레의 설명이었다.
특히 당시 동독 당국은 서독과의 협상 과정에서 수학여행을 받아들였지만, 속내는 불편했다. 허가 연령을 16세 이상으로 제한하고, 서류절차도 까다롭게 해 수학여행에 대한 의지를 꺾으려 들었다.
"동독은 16세 이상의 학생들만 들어올 수 있도록 했는데, 12명의 학생이 이 제한에 걸렸죠. 그때 제가 학생들의 부모인 것처럼 서류를 꾸며서 데려간 적이 있었습니다. 수학여행 신청서도 3개월 전에 동독으로 보낸 뒤 허가를 받아야 하는 긴 과정이었습니다."
더구나 제집 드나들 듯 동독 국경을 넘나드는 아이젤레는 동독 당국의 감시 대상이었다.
"통일 후 동독 비밀경찰인 슈타지 문서 열람을 신청해보니, 제가 묵었던 동독의 숙소를 슈타지가 감청했더군요. 저의 일거수일투족이 슈타지 문서에 다 적혀있었어요. 수학여행지에서 만난 동독 시민에게 식사를 같이하자고 제안한 것까지 다 슈타지 문서에 기록돼 있더군요."


동독 수학여행 시 아이러니한 상황도 많이 겪었단다.
"1983년 아이젠나흐라는 도시를 방문했을 때 동독 국경수비대 신병들의 선서식을 보게 됐죠. '우리는 계급투쟁의 적들을 무찌를 것'이라며 서독에 대한 적대감이 가득한 선서를 하는 것을 서독 학생들이 목격하게 됐죠. 아이들이 분단의 현실을 여실히 느꼈을 겁니다."
아이젤레의 동독 수학여행 인솔이 다소 편하게 된 것은 1981년 말부터다.
아이젤레는 스크랩해 보관 중이던 당시 기사들을 보여줬다.
바이에른 당국이 동독 수학여행을 규제하겠다는 입장을 나타냈으나, 학생들이 항의서한을 보내는 등 들고일어나 입장을 번복했다는 내용이다.
"당시 연방정부는 각 주 정부에 수학여행 비용을 지원했는데, 슈트라우스 바이에른 총리는 동독 수학여행 시 터무니없이 높은 비용을 지불하게 되는 것을 문제 삼았죠. 동서독 간 화폐가치까지 고려한다면 유스호스텔 비용이 실제보다 100배까지 올라가긴 했었죠."
아이젤레는 동독 수학여행 인솔을 두려워하는 동료 교사들도 설득했다. 교사가 가지 못하겠다며 주저앉는 바람에 수학여행이 취소될 뻔하자 학부모가 대신 인솔자 역할을 한 경우도 있었단다.
"제가 가진 노하우를 담아 동독 수학여행 매뉴얼을 만들어 동료 교사들에게 배포했어요. 슈타지는 이런 사실까지 파악했더군요. 국경을 통과할 때 동독 당국자가 '왜 선생은 다른 국가로 수학여행을 인솔하지 않고 동독으로만 오느냐'고 묻기도 하더군요. '동독이 여권에 찍어주는 도장이 멋있어서 그렇다'고 농담으로 답변했죠. 슈타지 문서를 보니 이런 이야기까지 동독에 대해 '모욕 행위를 했다'며 적혀있었습니다.
동독 당국은 수학여행단을 철저히 감시했단다.
"보호자, 통역 자격으로 동독 사람들이 따라붙었죠. 이들이 슈타지에 보고서를 낸 것이죠."
동독 청소년들이 유스호스텔로 와서 서독 청소년들과 대화의 시간을 가졌는데, 이들은 신분을 위장했다고 한다.
"청소년들이 아니라, 동독 학교의 젊은 교사들이었습니다. 서독 학생 한 명이 '학생 아닌 것 같은데'라며 야유를 보내기도 했죠. 동독의 '위장 학생'들은 서독의 문제점에 관해 이야기했어요. 이에 한 제자는 '동독 지역을 보고 경험하기 위해 500㎞를 달려왔는데, 당신에게 서독 이야기를 들어야겠냐'고 무안을 준 적도 있었죠."


아이젤레는 동독 수학여행을 다녀온 학생들에게는 견학문을 받았다. 동독 수학여행이 학생들에게 민족 동질성에 대한 의식을 높이는 데 상당한 효과를 낳았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단다.
"학생들에게 동독인들이 같은 민족이라는 점을 피부로 느끼도록 하는 기회였습니다. 학생들은 수학여행에서 친분을 쌓은 동독 젊은이들과 편지 교환을 했죠. 물론 오래가지는 못했습니다. 동독 당국이 방해한 것 같아요."
하지만 그러한 감시와 통제 속에도 진정한 교감이 이루어질 수 있는 순간은 항상 있었단다.
"동독에서 우연히 만나게 된 시민들은 동독 상황에 대해 솔직히 이야기하는 경향이 있었어요. 같은 동독인들에게는 이야기 못하는데, 오히려 서독인에게 이야기하는 것이었죠. '꼭 다시와라. 당신들이 와야 우리가 속을 터놓고 이야기할 수 있다'는 동독인의 말이 기억납니다."
아이젤레는 교사 임용 전 동독 지역의 드레스덴을 방문한 뒤 학생들이 동독을 직접 경험할 수 있는 수학여행의 필요성을 느꼈다.
"분단이 장기화하면 상대편에 대한 이해도가 떨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개개인들이 상대편에 가진 기본적인 지식도 점점 줄어들게 되죠. 수학여행은 상대편에 대한 최소한의 정보를 체험적으로 얻을 기회였습니다. 서로가 접하면서 이해를 하게 된 것이 독일 통일의 물꼬를 튼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바이에른의 보수적 당국의 견제를 받았던 아이젤레는 아이러니하게도 보수적 노선인 기사당의 정식 당원으로 정통 보수주의자였다.
"보수가 중요시하는 가치는 인간의 자유로, 자유를 누리기 위해서는 용기가 동반돼야 합니다. 또, 보수는 개인이 자유롭다면 현명한 결정을 내릴 수 있을 것이라고 봅니다. 우리와 체제가 다르다고 외면하는 것이 아니라, 직접 만나보고 이해하려는 용기가 자유라는 것이 보수주의자로서의 신념이었습니다."
아이젤레는 지금도 교장으로 재직했던 학교에서 멀지 않은 뮌헨 인근의 소도시에 살고 있다.
기자가 찾아간 아이젤레의 자택 2층에는 당시 수학여행 등 동독 여행 관련 책자들과 팸플릿, 서독 당국 문서, 당시 기사 등 동서독 인적교류를 살펴볼 수 있는 자료가 가득 차 있었다.
슈타지문서보관청에서 복사한 아이젤레에 대한 감시 기록문서도 볼 수 있었다. 역사학자이기도 한 아이젤레는 서독 역사교과서에서 동독 관련 부분을 기술하기도 했다.
'서독의 기억' 첫 시리즈에서 인터뷰한 데틀레프 퀸 전(前) 전(全)독일연구소장의 소개로 아이젤레와의 인터뷰를 하게 됐다.
동서독 분단기에 서독의 내독관계부 산하 연구소였던 전독일연구소는 동독 수학여행의 지원활동도 했다. 퀸 전 소장은 당시 아이젤레가 동독 수학여행을 가장 많이 인솔한 교사로 공인받았다고 설명했다.
아이젤레가 한국인과 대화를 나눈 것은 처음이란다. 아이젤레는 언제든지 다시 찾아와도 된다고 했다.
남북한 간의 '접근을 통한 변화'에 도움이 될 수 있다면, 자신의 경험과 수십년 간 소장해온 자료를 언제든 공개할 수 있다고 했다.


lkbin@yna.co.kr #서독의 기억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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