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만개 천조각 같은 제주들녘서 곰방대 든 남성이 말 걸어와"

입력 2019-07-11 08:00   수정 2019-07-11 09:12

"수만개 천조각 같은 제주들녘서 곰방대 든 남성이 말 걸어와"
미국인 선교사 '새뮤엘 켄드릭 닷슨'이 본 1922년 봄날 제주 서남부
"여성, 다른 곳보다 더 독립적·언어와 의복 달라"…생생히 기록



(제주=연합뉴스) 고성식 기자 = 아주 옛날이야기지, 100년은 다 되었을 거야. 그때 내가 30대 한창나이였으니.
나(미국인 선교사 새뮤얼 켄드릭 닷슨·한국명 도대선)는 1922년 3월 모슬포교회에서 열리는 성경 강독회 지원차 제주에 갔었지.
1922년 그때 제주에는 모든 사람이 반할만한 순수한 자연과 이색적인 문화들이 펼쳐져 있었지.
화산섬인 제주에는 벼가 자라기엔 충분히 평평하지 않았지만, 보리와 콩, 밭벼, 수수 등이 풍부하게 났어.
들녘에는 조그만 밭 돌담들이 아름답게 조성돼 있었고.
여성들은 다른 곳보다 더 독립적이고 자유로웠어.
그때 나는 이 섬의 미래에 다가올 희망을 보았다.
제주에 머무르던 중 어느 화창한 날 모슬포 근교의 산(오름)을 올라봤어.
섬 남쪽 절반 전체의 환상적인 풍경이 눈앞에 펼쳐졌어.
들녘의 풍경이 1만개의 천 조각으로 된 기묘한 모양의 거대한 퀼트(누비이불)가 덮여 있는 것처럼 보였어.
내가 천 조각이라고 한 것은 심사숙고한 끝에 떠올린 표현이야. 대부분의 밭이 마치 천처럼 놓여 있었고, 그 경계에 있는 작은 돌담들이 여러 개의 조각처럼 보이게 했어.
이렇게 여러 개의 천 조각과 같은 밭과 경계에 있는 돌담이 연속적으로 펼쳐지며 농경 지대의 풍경을 이뤘지.
그리고 마치 고원 같은 땅(초지대)은 말과 소를 풀어 놓아 대부분 방목지로 쓰였어.
섬 중앙에는 아름다운 한라산이 흰 눈이 정상에 쌓인 채 6천피트(1천829m·실제 한라산 높이 1천950m) 높이로 솟아 있어.
'도처에 널려 있는 오래된 바다의 깊고, 슬픈 불모지들은 그저 인간의 거대한 무덤의 장식일 뿐'.
나는 제주 풍광을 보면서 윌리엄 브라이언트의 시 '죽음에 관하여'(Thanatopsis)의 한 구절을 떠올렸어.

제주 바다는 진정 태양 빛이 반사되었고 마치 '유리바다'와 같았어. 두려움과 공포마저 잠시 잊게 했지. 여기서 유리바다는 '하늘나라 성전의 빛나는 전경'을 뜻하는 교회의 말이란다.
제주의 풍습 중 일부는 육지의 풍습과 사뭇 달랐어. 여성들은 더 독립적이고 자유가 많았어.
제주의 여성들은 종종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는 주도권을 갖고 있었어.
제주의 여성들은 육지 여성들처럼 머리에 물동이를 지는 대신 지게를 이용해 물허벅을 날랐어.
제주의 언어와 의복도 육지의 그것과 달랐어.

나는 신기하고 새로운 일이 많은 제주에 더 머물고 싶었지만 내가 모슬포교회에서 주어진 일을 끝냈기 때문에 성경강독회 지원을 마친후 이틀 뒤에 전남으로 떠나야 했어.
모슬포에 올 때 목포에서 출발해 증기선으로 제주시에 와서 그 이후 다시 모슬포에 도착할 때까지 무려 45시간이나 걸렸어.
증기선을 타고 거센 파도를 이겨내야 했고, 제주시에 와서도 또 작은 배를 타고 모슬포까지 오는 험난한 여정이었어.
그래서 돌아갈 때는 좀 서두르기로 했어. 모슬포교회에서 주어진 일을 마치고 목포로 떠나는 배를 타기 전날 오전부터 서둘러 모슬포를 떠나 제주시까지 가야 했어.
그런데 내 짐들을 들어 줄 지게꾼을 구할 수 없었어. 그때 이 섬에선 지게꾼들을 거의 볼 수 없었지. 이곳에 머무르는 동안 딱 세 명의 지게꾼을 봤어.
그리고 탈 말 한 마리를 불러 달라고 했지만, 출발 시간이 다되어도 말이 오지 않아 무작정 걸어가기로 결정했지.
험한 자갈밭 길을 40마일(64㎞가량) 이상을 고되게 걸었지만 내내 즐거웠어
왜냐면 걷는 동안 제주의 속살을 세밀하게 관찰하고 즐길 수 있는 시간이 됐기 때문이야.
걸어서 제주시로 가던 중 정오 무렵 난 생소하고 특이한 것을 여럿 목격했어, 잠시 쉬는 동안 산간에서 말과 소 떼가 내 주위에서 풀을 뜯고 있는 거야.
그리고 주변 풍경을 봤을 때 초가지붕을 제외하고는 내 고향 텍사스의 목장에 있는 것 같은 생각마저 들었어.
그때 한 남자가 내게 와서 말을 걸었고 잠시 후 그 남자는 한 조각의 쇠(곰방대)와 부싯돌을 꺼내 담뱃불을 붙였지.
정말이지 이런 모습은 내가 전에 한 번도 보지 못한 것이야.

도보 길에 오른 당일 저녁 고생 끝에 제주시에 도착해 목회자의 집에서 하룻밤을 묵고 그 다음 날 오전 나는 제주에서의 신기하고 즐거운 추억을 간직한 채 목포행 배편에 올랐어.
나는 일터로 돌아온 이후에도 놀랍도록 아름다운 제주에 대한 관심은 항상 간직하고 있어.

※ 이 기사는 '코리아 미션 필드'(The Korea Mission Field·1922년 9월호)에 미국인 선교사 새뮤얼 켄드릭 닷슨(1884~1977년)이 올린 1922년 3월 제주를 방문한 여행기 겸 선교기록을 발췌해 1인칭 시점으로 가공해 작성한 기사입니다. 당시 사진 자료와 여행기 전문은 전기 작가인 임연철 미국 드루대(뉴저지주 메디슨시) 연구원이 드루대 감리교 문서보관소에서 찾아내 연합뉴스에 제보했습니다.

koss@yna.co.kr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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