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독의 기억](22)"청년 극우서도 참여 에너지 찾아야"…옛동독 저항세력 시선

입력 2019-11-07 07:05  

[서독의 기억](22)"청년 극우서도 참여 에너지 찾아야"…옛동독 저항세력 시선
獨슈타지문서기록소장 인터뷰…"장벽붕괴, 많은 희생으로 민주화 성취"
반체제인사로 동독에서 추방돼…"민주사회로의 전환에 시간 필요"
"민주주의 일순간 몰락 가능…시민사회 가꿔나가 열린사회 만들어야"
"옛동독 극우부상, 과거서 답 구해야…대북문제, 보편아닌 사례별 깊게 접근해야"



[※ 편집자 주 = '비핵화'와 '평화'를 둘러싼 한반도 주변의 외교적 흐름 속에서 '통일'은 이제 현실적 주제로 다가서고 있습니다. 국내적으로도 많은 연구와 논의가 진행되고 있지만, 지구촌으로 눈을 돌려 한반도 통일의 '유일한 참고사례'에 관심을 기울여볼 때입니다. 한반도에서 8천500여 ㎞ 떨어진 동서독의 교류·협력과 통일, 이후 통합 과정은 더 이상 '먼나라 이야기'가 아닌 바로 '우리의 이야기'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독일 통일에 다리를 놓은 동서독 교류·협력이 이뤄지게 된 과정을 들여다보면 당시 서독 현실과 한국 간에 유사점을 상당히 발견할 수 있습니다. '남남갈등' 못지않게 '서서갈등'이 치열하게 전개됐습니다. 서독에서도 경제적 지원과 인권 문제가 갈등의 단골 소재였습니다. 베를린 장벽이 무너진 지 30주년인 올해, 연합뉴스는 지금까지 국내에 소개되지 않았던 '서서갈등'의 전개와 극복, 이 과정에서 민심의 흐름, 동서독 교류·협력의 일상화 과정을 살펴보고 있습니다. 내부의 분열과 대립을 극복하고 동독과의 공존에 성공했던 '서독의 기억'을 꺼내봅니다. 이제 겨우 서로에게 겨눈 총부리를 거두려는 한반도 상황에 도움이 될 수 있도록 하려 합니다. 연합뉴스는 올해 독일 통일의 상징인 베를린에서 새로운 자료 조사와 관점으로 취재, 8개의 관련 주제로 독자 여러분께 찾아가고 있습니다. 이번이 8번째 마지막 시리즈로 베를린 장벽 붕괴까지의 과정과 극우 부상 등 통일 후유증에 대해 4일간 5개의 기사를 연재하고 있습니다. 기획에는 한국국제교류재단(KF)과 '정치+문화연구소'의 이진 훔볼트대 정치문화학 박사가 협력했습니다.]
(20) '웬 교류·통일?'…허물어지지 않는 마음의 장벽에 묻는다
(21) 20대서 극우당 1위에 당황한 獨...장벽시대로 돌아가 해법찾기
(22) "청년 극우서도 참여 에너지 찾아야"…옛동독 저항세력 시선 ←←
(23) 한스 모드로 전 동독 총리 인터뷰
(24) 게르하르트 슈뢰더 전 독일 총리 인터뷰

(베를린=연합뉴스) 이광빈 특파원 = "서독에 도착했을 때 다른 행성에 온 것 같았습니다. 동독 체제에 저항한 사람 입장에서도 이런데, 통일 후 보통의 시민들은 더 충격이 컸겠죠."
독일 연방정부 특임관(장·차관급)인 롤란트 얀 슈타지문서기록소 소장이 베를린 장벽 붕괴 30주년 기념일을 앞두고 연합뉴스와의 인터뷰에서 한 이야기다.
1983년 동독 국적을 박탈당한 채 화물트럭에 실려 서독의 국경에 내동댕이쳐진 후 받은 느낌이었단다.
슈타지는 동독의 비밀경찰로, 통일 이후 독일 정부는 동독 시민들을 사찰했던 슈타지의 문서를 보관하고 있다.
얀 소장은 옛 동독 시절 언론인으로 체제 저항운동에 참여했다가 동독 당국에 체포돼 고초를 겪었다.
일반적으로 동독에서 수감된 정치범들은 서독이 대가를 지급하고 데려가는 '프라이카우프'(Freikauf)의 대상자가 됐다.
그러나 동독 정부는 얀 소장을 프라이카우프로 서독에 보내는 절차에 걸리는 시간도 참지 못한 채 추방해버렸다. 그만큼 눈엣가시였다.
얀 소장은 현재 앙겔라 메르켈 총리가 소속된 집권 기독민주당 당원이다. 서독에서도 언론인 생활을 한 뒤 주류에 편입된 셈이다.
최근 옛 동독지역에서 극우 세력이 급부상하면서 통일 후유증이 주목을 받자, 그의 역할도 커지고 있다.
메르켈 총리가 옛 동독지역 출신이지만, 해당 지역구 의원들을 제외하고는 집권세력에 동독지역 출신이 희소하기 때문이다.
특히 민주화 운동을 했던 그의 이력은 '동독의 기억'에서부터 현실 문제의 해법을 찾으려는 독일 사회에 귀중한 자산이다.
극우 부상의 문제에 대한 얀 청장의 분석은 역시 민주주의와 연관됐다.
권위주의 체제를 오래 경험한 옛 동독지역에서 "역동적인 시민사회의 경험과 인식이 부족했기 때문"이라는 진단이다.
얀 소장의 진단은 기자가 만나본 옛 동독지역의 일부 청년세대와 다르기도 하다.
옛 동독지역 청년세대는 옛 서독지역 청년들과 비교해 출발 선상에서의 불평등을 이야기하기도 한다. 통일 직후 대량 실업을 경험한 가정에서 자랐기 때문이다. 특히 사회적 관계망이 중시되는 독일 사회에서 이러한 자산에서도 뒤처진다는 불만을 토로하는 청년들도 있다.
그러나, 얀 소장은 이에 대해 개별적인 사례라면서 통일된 독일에서 성공적으로 새로운 기회를 찾은 젊은 세대들을 강조한다.
그는 베를린 장벽 30주년과 관련해 "과거의 경험을 관례로 기념하는 데 그쳐서는 안 되고, 이와 연관된 현재의 문제가 무엇이고 미래에 어떤 문제를 낳을지 성찰하는 기회로 삼아야 한다"고 말했다.
한반도 상황에 대해선 조심스러워하면서도 "진영 논리라는 것은 어쩔 수 없긴 하지만, 중요한 것은 대북 문제를 뭉뚱그려 생각하지 말고 각 사례를 깊게 생각해 판단할 필요가 있다"고 조언했다.
베를린의 슈타지문서기록소 집무실에서 만난 얀 소장의 인상은 상당히 딱딱하고 빈틈이 없어 보였다. 웃을 때는 어색한 느낌도 들었다.
동독의 반체제 인사로 보냈던 시절, 좀처럼 웃을 수 없었던 현실 속에서 그의 표정은 굳어진 듯했다.
야외에서 햇빛을 받은 이 사진은 슈타지문서기록소로부터 받은 사진으로, 인터뷰를 할 때의 느낌과는 다소 다르다.
그는 마침 인터뷰 전 자전거를 타던 중 넘어져 얼굴에 크게 상처가 나고 손목이 잔뜩 부어올라 있어, 사진 촬영이 어렵다며 양해를 구했다.

다음은 일문일답.
-- 프라이카우프로는 아니지만, 정치범 성격으로 서독으로 추방된 것으로 알고 있다. 결과적으론 서독이 프라이카우프로 동독에 경제적 지원을 한 셈인데, 이를 통해 서독이 이익을 얻고 동독 사회가 변화한 것이 있는가.
▲ 서독 입장에서 프라이카우프는 딜레마 상황에서 출발한 정책이다. 한편으론 동독의 인권개선, 다른 한편으론 동독의 체제안정에 기여하는 딜레마를 안고 있었던 것이다. 동독 내부에서도 비판이 많았다. 슈타지 고위층 등 권력의 핵심부가 모두 이를 수긍한 것이 아니다. 동서독 모두 내부에서 비판이 있었던 셈이다.
또, 동독의 반체제 인사들이 서독으로 넘어오면 동독 내 저항 세력이 소실된다는 비판도 있었다. 폴란드의 경우 자유노조 인사들이 옥고를 치른 뒤 폴란드에 남아 다시 적극적으로 연대한 것과는 대조적이었다.
프라이카우프는 동독 내부에서도 인권향상에 기여했다. 첫째로 수감된 정치범들에게 중요한 역할을 했다. 프라이카우프의 존재 자체가 하루하루를 버틸 수 있는 큰 희망이었다. 정치범 중에서는 처벌의 강도가 큰 탈주죄가 많았는데 풀려날 수 있는 희망을 갖게 된 것이다.
두 번째로 정치범들이 프라이카우프로 서독에 넘어와 잘츠기기터인권기록소에서 동독에서 받은 인권침해 사례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다는 점이 동독 당국자들을 움츠리게 한 효과가 있었다. 인권침해 기록이 남겨지는 상황에서 동독 당국자들의 행위에 억제효과가 있었다.
-- 최근 작센주(州) 등 옛 동독지역 선거에서 극우 성향의 정당인 '독일을 위한 대안'(AfD)이 약진했다. 동독지역 시민들이 '2등 시민'이라는 자조 섞인 말을 하는 이유 등을 경제적 격차 문제 외의 요인으로도 설명할 수 있을까. 옛 동독 시절 인권탄압 등 잘못된 점은 부정되어야 하지만, 전체적인 동독 시민의 삶, 이에 대한 기억까지 무시되는 점이 부정적인 영향을 끼치지 않았는가.
▲ 과거가 현재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 동독 사회는 권위주의가 강한 국가였다. 국가가 개인에게 상당 부분을 해주기도 했다. 이런 관습 때문에 자유주의 시대를 맞이해 국가에 대한 기대가 무너지는 경험을 하는 사람들이 생겨나기도 했다. 역동적인 시민사회의 경험과 인식이 부족한 것이었다.
정말 과거가 어떤 이유로 현재에 영향을 미치는지에 대해서는 더 엄밀한 학문적인 검증이 필요한 시점이다. 동독 시절을 경험한 중장년층뿐만 아니라, 청년 세대를 상대로도 연구해야 한다. 청년 세대가 AfD에 투표하는 성향이 커지고 있기 때문이다.


-- 개인적으로 옛 동독지역에서 왜 AfD에 대한 지지율이 높다고 보는가.
▲ 동독에선 밖에서 체제에 순응하는 척하다가 비밀이 지켜지는 가정에서는 불만을 이야기하는 게 사회 전반적인 분위기였다. 비겁하거나 억압에 체념하며 살던 부모들을 보고 자란 세대가 지금의 30∼50대다. 새로운 장벽세대는 '부모처럼 할 말 못하고 살지는 않겠다. 내 주관을 이야기하고 살겠다'고 한 것이다. 사람들이 주관을 갖고 이야기하는 것이 민주주의의 기초라고 본다.
그런데 1990년대 언론인으로 계속 활동할 때 부각됐던 문제는 정치적 진공 상태에 있던 옛 동독지역의 청년들이 극우 이데올로기에 빠져 신(新)나치가 되는 현상이었다. 직접 취재를 해보니 '부모 세대는 독일인이라 자랑스럽다는 이야기를 하지 못했는데, 나는 하고 싶다'는 의식이 자리잡고 있었다. 폭력성으로 흐르는 데에는 경계해야 하지만, 표현의 에너지를 나타내는 것은 긍정적으로 봐야 한다.
AfD에 대한 투표 성향도 이런 관점에서 바라볼 수 있다. 옛 동독지역의 시민들이 자기 목소리를 내는 것을 긍정적으로 보면서 현실의 문제를 고민해야 한다.
-- 통일 직후 옛 동독지역에 살던 부모들이 실직의 고통을 당하는 것을 자녀 세대들이 보고자라지 않았는가. 이런 기억이 사회에 대한 불만으로 전이되는 것은 아닌가. 자녀 세대들은 경제적으로도 넉넉지 못한 환경에서 컸을 수 있다. 옛 서독지역 시민들과의 격차, 출발점에서의 불균형 등 문제의식을 느낄 수도 있지 않을까.
▲ 전반적인 경향은 아니다. 그러한 사례들도 있지만, 반대 사례가 많다. 부모 세대는 동독의 향수를 잊지 못해 '2등 시민'이라는 생각을 갖고 여전히 변두리로 자신을 밀어내고 있다. 그러나, 젊은 세대는 새로운 기회를 잘 활용하고, 선도적이고, 개방적이다. 통일 후 미국으로 유학을 하는 등 다양한 사례가 많다. 특히 통일 후 30년이 지난 시점에서 젊은 층들의 그런 불만은 적절하지 않은 이야기다. 그런 결핍은 젊은 세대에 없다고 본다.
동서독의 이분법으로 이 문제를 봐서는 안 된다. 보편성을 찾아서는 안 되고, 개별적이고 상충적인 상황을 고찰한 뒤 얻어지는 보편적인 이야기를 찾아야 한다.
통일 후 각 세대는 많은 변화를 겪었다. 물가도 달라지고 문화적 가치체계도 바뀌었다. 내 경우 동독에서 추방을 당해 서독에 도착했을 때 다른 행성에 온 것 같았다. 동독 체제에 저항한 사람 입장에서도 이런데, 통일 후 보통의 시민들은 더 충격이 클 수밖에 없다. 동독이 서독보다 항상 나쁜 것도 아니었다. 개별적 사례이지만 주거비 부분에서 당국이 제공한 주택에 살았던 옛 동독지역 시민들은 현재도 임대료가 소득의 3분의 1에 달하는 현실에 낯설어한다. 그런데, 당시 동독의 주택의 주거환경은 상당히 낙후돼 있었다. 보기에 따라 과거에 대한 좋고 나쁨의 판단이 다를 수 있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보편성을 찾기 위해서는 개별적인 사안에 대한 고찰이 필요하다.
독재사회에서 민주사회로의 전환은 일순간에 가능하지 않다. 수십 년이 지나야 극복될 수 있다. 인위적으로 가능하지 않은 부분들이 있기 때문이다. 특히 역동적이고 건강한 시민사회가 민주주의의 근간인데, 동독에는 이런 시민사회가 형성될 수 없었다. 통일 후에도 시민사회의 역량이 축적되고 시민들이 참여해야 건전한 비판을 할 수 있는 것이다. 정치교육을 강화해 시민들이 민주주의 체제에서 더 적극적으로 민주사회를 만들어가기 위해 더 많은 노력을 기울여야 하는 것은 당연하다. 다시 강조하지만, 시민사회의 역량은 하루 이틀 안에 생기지 않는다.
-- 분단기 언론인이었기에 질문해본다. 교류·협력의 흐름 속에서 미디어 교류도 이뤄졌다. 서독은 과감하게 개방책을 펼치면서 동독의 개방을 유도했다. 서독 체제에 대한 자신감이 뒷받침된 것으로 봐야 하는가.
▲ 서독에서 동독 방송의 시청이 가능한 지역이 있었는데, 프로그램이 재미없는 탓인지 관심이 없었다. 동독에서 서독 TV를 시청한 것은 익히 알려진 사실이다. 서독 사람들에 대해 동독 사람들이 아는 것만큼, 서독 사람들은 동독 사람들에 대해 몰랐다는 게 문제였다. 서독에서는 특별히 동독의 체제 선전이나 방송 내용물이 서독 시민에게 어떤 영향을 미칠 것이라는 우려가 없었다고 보면 된다.
-- 장벽 붕괴 30주년 기념일이 곧 다가오는데 하고 싶은 말은.
▲ 과거의 경험을 관례로 기념하는 데 그쳐서는 안 되고, 이와 연관된 현재의 문제가 무엇이고 미래에 어떤 문제를 낳을지 성찰하는 기회로 삼아야 한다. 장벽이 무너지면서 가능해진 자유와 민주주의라는 것은 그냥 주어지거나 당연한 것이 아니다. 많은 희생을 동반한 투쟁을 통해 성취된 것을 제대로 인식해야 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리고 민주주의는 언제든 쟁취할 수 있지만 한순간에 몰락할 수 있다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현재 역동적인 민주주의를 위해 많은 시민의 용기가 필요하다. 민주적 시민의식도 함양해야 한다. 1989년 라이프치히에서 성 니콜라이 교회 앞에서 자유를 위해 일어난 용기와 정신을 기억해 독일을 열린 사회로 계속 만들어가야 한다.
-- 한반도 상황에 대해 조언하고 싶은 점이 있다면.
▲ 한반도 상황은 변수가 많은 것으로 아는데, 어떤 의견을 말하는 것은 삼가야 할 것 같다. 다만, 독일의 경험에 근거해 한국의 시민이 스스로 성찰을 하는 것은 필요한 듯하다. 또, 진영 논리라는 것은 어쩔 수 없긴 하지만, 중요한 것은 대북 문제를 뭉뚱그려 생각하지 말고 각 사례를 깊게 생각해 판단할 필요가 있다.
lkbin@yna.co.kr #서독의 기억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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