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르포] 은행 문 닫고 대중교통 한산…멕시코의 '여성 없는 하루'

입력 2020-03-10 03:45  

[르포] 은행 문 닫고 대중교통 한산…멕시코의 '여성 없는 하루'
만연한 여성폭력에 대한 항의로 9일 하루 여성 파업
정부기관·대기업 등 동참…멕시코 전역 3천640만 명 참여 추정



(멕시코시티=연합뉴스) 고미혜 특파원 = 바쁜 월요일 오전이지만 멕시코 멕시코시티 폴랑코의 한 은행 지점 문은 굳게 닫혀 있었다.
입구에는 "'여성 없는 하루'를 지지하기 위해 3월 9일(현지시간) 하루 문을 닫는다"라는 공지가 붙어 있었다.
대신 은행 바깥 현금자동입출금기(ATM) 앞에 10여 명이 늘어섰다.
바로 옆 또 다른 은행은 문을 열었다.
그러나 창구 세 곳 중 한 곳에만 직원이 앉아 있었고, 이 직원을 포함해 근무하는 직원은 모두 남자였다.
은행 문엔 "우리 직원의 70%가 여성"이라며, 업무가 원활하지 못한 데 대한 고객의 이해를 당부하는 공지가 적혀 있었다.

'세계 여성의 날' 이튿날인 9일 멕시코의 일부는 멈췄다.
여성단체가 기획한 '우리 없는 하루' 파업이 전국적으로 펼쳐졌기 때문이다.
지난 1975년 아일랜드 여성들의 총파업 이후 세계 곳곳에서 비슷한 파업이 진행됐는데 멕시코에선 이번이 처음이다.
멕시코 여성들이 파업이라는 극단적인 투쟁 방식을 택한 것은 만연한 여성 대상 폭력에 대한 분노 때문이다.
멕시코는 마약밀매조직 등의 강력 범죄도 많지만 여성들에게 특히 불안한 곳이다.
지난해 멕시코에선 3천825명의 여성이 살해됐다. 하루 평균 10명이 넘는다.
잔혹한 페미사이드 사건이 잇따르는데 검거와 처벌률은 극히 낮고 정부가 뚜렷한 대책을 내놓지 못하고 있는 점도 여성들의 분노를 키웠다.

페미사이드(femicide)는 '여성 살해'라는 뜻으로, 성폭행이나 가정폭력 살해, 증오 범죄 등 성별을 이유로 발생한 살해 사건을 가리킨다. 넓게는 여성이 희생자가 된 살인사건을 모두 지칭하기도 한다.
멕시코시티에선 지난달 25세 여성이 동거남에게 살해된 뒤 잔인하게 훼손된 시신 사진이 경찰과 언론에 의해 유출되는 일이 발생했다. 7세 소녀가 엄마 친구 부부에게 납치된 후 성적 학대를 당하고 살해되는 일도 일어났다.
끊임없이 반복되는 페미사이드 사건에 절망한 멕시코시티 여성 8만 명이 거리로 쏟아져 나온 전날 여성의 날에도 멕시코에서 3명의 여성이 살해됐다고 일간 엘우니베르살은 전했다.
축적된 분노와 불안은 유례없는 대규모 파업으로 이어졌다.

멕시코 일간 밀레니오는 이날 멕시코 전역에서 3천640만 명의 여성이 파업에 참여한 것으로 추산했다. 멕시코 인구가 1억2천900만 명이고 그 중 절반이 여성이라고 봤을 때 여성의 절반 이상이 참여하는 셈이다. 정부기관과 정치권, 대기업 등도 파업에 동참했다.
참가한 여성들은 일터나 학교에 가지 않을 뿐만 아니라 쇼핑이나 외식도 삼간 채 모습을 감췄다.
여성의 빈자리는 쉽게 확인할 수 있었다.
이날 은행 시티바나멕스는 전국 1천419개 지점 중 406개만 문을 열었다. BBVA 멕시코도 지점 40%만 정상 영업을 했다.
멀티플렉스 시네멕스는 영업시간을 오후 3∼8시로 단축했다.
오전에 찾은 멕시코시티 시내 대형마트엔 계산대 중 3분의 1가량에만 계산원이 있었다. 10여 명의 직원 중 여성은 2명만 보였다.
매일 오전 7시 생중계되는 안드레스 마누엘 로페스 오브라도르 멕시코 대통령의 기자회견 자리에도 여기자의 수가 평소보다 적었다. 몇 안 되는 여기자 중 한 명은 대통령에게 페미사이드 대책에 대해 날 선 질문을 던졌다.

일부 식당과 상점은 아예 문을 닫았다. 여직원 비율이 높아 정상 영업이 힘들거나, 업주가 파업을 지지하기 위해 모든 직원을 쉬게 한 경우다.
버스와 지하철의 여성 전용칸은 한산했고, 직원이 없어 일부 지하철역에선 승차권을 판매하지 못했다고 현지 언론은 전했다.
트위터에는 남학생만 앉아있는 대학 강의실이나 문 닫은 식당 사진 등이 속속 올라왔다.
파업에 참여한 호텔 직원인 라우라 페레스는 "여성들은 불안 속에 살고 있는데 정부는 뭐가 문제인지 잘 모르는 것 같다"며 "파업 참여 결정이 쉽진 않았지만 여성이 어떻게 느끼는지를 보여주고 싶었다"고 말했다.
빌딩 안내 데스크에서 근무하는 남성 이냐키 우리엘 테요는 이날 파업에 참여한 여성 동료의 몫까지 일하게 됐다.
그는 "뭐 하루 정도는 괜찮다"며 "파업에 참여한 여성들이 그냥 하루 쉬는 날이라고 생각하면 파업의 취지가 무색해지지만 왜 파업을 하게 됐는지 다 같이 논의하는 기회가 된다면 좋은 일"이라고 말했다.

여성 모두가 파업에 참여한 것은 아니다.
파업이라는 수단에 동의하지 못하는 여성도 있고, 상대적으로 고용이 안정적이지 않은 노동자나 소규모 자영업자들은 참여하고 싶어도 참여하지 못하는 경우도 있다.
대형마트의 약국에 근무하는 마리아는 "회사에선 파업에 참여해도 좋다고 했지만 취지에 동감하지 않아 일하러 나왔다"며 "파업이 아닌 다른 식으로도 의견을 표출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파견업체 소속으로 건물 청소를 하는 한 여성은 "회사에선 별다른 지침이 없어 그냥 출근했다"고 전했다. 거리에서 타코를 파는 여성 노점상들도 평소와 마찬가지로 장사를 준비했다.
파업에 참여했으나 회의적인 의견을 가진 이들도 있다.
자동차 판매점에 근무하는 에스테파니아 곤살레스는 "개인적으로는 참여하고 싶지 않았지만 회사 차원에서 파업을 지지하기로 해 출근하지 않았다"며 "파업만으로 상황이 바뀔 것 같지 않다. 뿌리 깊은 마초주의(남성우월주의)의 문제"라고 꼬집기도 했다.

mihye@yna.co.kr
(끝)


<저작권자(c) 연합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

관련뉴스

    top
    • 마이핀
    • 와우캐시
    • 고객센터
    • 페이스 북
    • 유튜브
    • 카카오페이지

    마이핀

    와우캐시

    와우넷에서 실제 현금과
    동일하게 사용되는 사이버머니
    캐시충전
    서비스 상품
    월정액 서비스
    GOLD 한국경제 TV 실시간 방송
    GOLD PLUS 골드서비스 + VOD 주식강좌
    파트너 방송 파트너방송 + 녹화방송 + 회원전용게시판
    +SMS증권정보 + 골드플러스 서비스

    고객센터

    강연회·행사 더보기

    7일간 등록된 일정이 없습니다.

    이벤트

    7일간 등록된 일정이 없습니다.

    공지사항 더보기

    open
    핀(구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