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만의 '미스터 민주주의'로 불린 리덩후이

입력 2020-07-30 21:34   수정 2020-07-31 05:23

대만의 '미스터 민주주의'로 불린 리덩후이
톈안먼 유혈 진압 땐 "공산당 역사의 재판 받아야" 맹비난
첫 직선·본성인 총통, 말년엔 대만 독립 추구해 본토와 대립각
양안교류 초석 '92합의' 마련…야스쿠니 참배 논란도


(상하이=연합뉴스) 차대운 특파원 = 30일 별세한 리덩후이(李登輝) 전 총통은 장제스(蔣介石·1887∼1975), 장징궈(蔣經國·1906∼1988) 부자의 2대에 걸친 세습 통치 이후 대만이 민주주의 체제로 전환하는 과정에서 핵심 역할을 수행한 인물로 평가받는다.
대만 총통이자 집권 국민당 당수이던 그는 내부 기득권 세력의 반발을 뚫고 총통 직선제를 밀어붙여 '대만의 미스터 민주주의'(Mr Democracy)라는 별명을 얻기도 했다.

◇ 대만 '본성인' 출신의 첫 대만 총통
리 전 총통은 일본강점기인 1923년 현재의 대만 신베이(新北)시의 경찰관 집안에서 태어났다.
1943년 일본 교토제국대학 농업경제과에 들어갔다. 한때 중국공산당에 들어가는 등 사회주의에 심취하기도 했다.
2차 세계대전 와중에 약식 교육을 받고 일본 육군 소위로 임관했다가 나고야에서 종전을 맞이해 대만에 돌아왔다. 훗날 그는 일본군에 '자원입대'한 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한다고 말하기도 했다.
1949년 국립대만대 농업경제학과를 졸업하고 강사 생활을 하다가 유학 길에 올라 미국 아이오와주립대와 코넬대학교에서 석·박사 학위를 각각 받았다.
1968년 박사 학위를 받은 그는 대만에 돌아와 학계와 정부에서 농업경제 전문가로 일했다.
그를 정계로 이끈 것은 장징궈 전 총통이었다.
부친 장제스에 이어 대만을 이끈 장징궈는 1972년 행정원장(총리)을 맡았다. 그러면서 주변의 천거를 받아 리덩후이를 장관급인 국무위원으로 전격 발탁했다. 당시 리덩후이는 49세. 최연소 내각 구성원이었다.
장제스 사후 총통 자리를 물려받은 장징궈는 리덩후이를 타이베이 시장, 타이완성 주석, 부통령 자리에 잇따라 앉히면서 국민당의 차기 핵심 인물로 키웠다.

1988년 1월 장징궈가 병으로 사망하자 부통령이던 리덩후이는 직무 승계를 통해 제7대 대만 총통에 올랐다.
리덩후이는 대만을 뿌리로 둔 본성인(本省人) 출신인 첫 중화민국(中華民國) 총통이다.
대만에서는 국공내전 패배로 장제스가 대만으로 간 1949년을 기준으로 그 전부터 대만에 뿌리를 내리고 살던 이들을 본성인, 장제스와 함께 대만으로 넘어온 국민당 인사 등을 외성인(外省人)으로 구분한다.
소수의 외성인이 중심의 국민당은 1949년 이후 일당독재를 하면서 다수의 본성인을 차별해 대만에서는 외성인과 본성인 간의 갈등의 뿌리가 깊다.
본성인인 리덩후이가 총통 자리에 오른 것은 대만 정치사에 있어 중요한 '정권 교체'의 의미를 띠었다.

◇ 국민당 독재 마감…양안 관계 개선 초석 마련
리덩후이는 시대적 과제인 대만의 민주주의 이행을 밀어붙였다. 그의 재임 시절 대만에서는 국민당 외의 정당 설립이 허용됐고, '반란 세력 토벌을 위한 국가동원 시기'가 공식적으로 종료됐다.
그는 외성인을 중심으로 한 국민당 내 기득권 파벌과 대결을 불사하면서 국회의원 선거 제도 개혁, 시장 직선제, 대통령 직선제를 차례로 이뤄냈다.
1990년 기존의 간선제로 8대 대만 총통에 오른 리덩후이는 헌법 개정으로 직선제가 도입되고 나서 처음 치러진 1996년 9대 총통 선거에서 당선됐다. 대만인들이 직접 선출한 첫 총통이 된 것이다.
1989년 중국에서 톈안먼(天安門) 민주화 시위 유혈 진압 사태가 벌어졌을 때는 긴급 성명을 내고 "중국공산당이 택한 비인간적인 행동은 장차 반드시 역사의 재판을 받아야 한다"고 목소리를 냈다.
대만 국립중산대학의 장진혁 정치학연구소 교수는 "리 전 총통은 대만의 권위주의 체제에서 민주화로 이행하는 과정에서 원활하게 국정 관리를 수행한 인물로 평가받을 수 있다"며 "대만은 '위로부터의 민주주의' 성격을 강하게 띤다"고 지적했다.
민주화 이행과 더불어 양안(중국과 대만) 관계 발전의 초석을 놓은 것도 그의 대표적인 재임 기간의 업적으로 손꼽힌다.
특사를 통한 비밀 협상 끝에 중국 본토와 대만은 1992년 '하나의 중국 원칙'을 바탕으로 양안 관계의 발전을 추구해나간다는 '92합의'를 공식화한다.
1970년대 후반까지만 해도 샤먼과 진먼다오에서 서로 포탄을 주고받던 양안은 점진적인 '3통'(통상·통항·통우) 확대를 통해 1990년대 이후 상호 교류의 수준을 비약적으로 끌어올렸다.
한편, 그의 재임 시절인 1992년 한국은 한중수교를 해 '중화민국' 대신 '중화인민공화국'을 선택했다.
한중수교 직전 그가 총통부 비서장을 비밀리에 청와대에 특사로 보내 한중 수교를 부득이 하더라도 대만과 수교를 1년 연장해달라고 요청했다는 일화가 전해지는 등 그는 마지막까지 대만에 닥칠 외교적 파장을 최소화하기에 안간힘을 썼다.

◇ 말년 탈중국 성향 적극 표출…'친일' 꼬리표도

리덩후이는 재임 말기에는 '대만인'으로서의 자신의 속내를 드러냈다.
국민당이 배출한 총통이면서도 그는 중국 본토와 대만이 각각 별개의 나라라는 '양국론'(兩國論)을 들고나와 양안 관계에 일대 파문을 불러일으켰다.
후임 총통을 뽑는 2000년 대선 때는 국민당 후보인 롄잔(連戰) 대신 은근히 야당인 민진당의 천수이볜(陳水扁) 후보를 사실상 지지했다. 퇴임 후에는 탈중국 성향을 더욱 강하게 드러냈고 결국 국민당에서 축출되기에 이르렀다.
이후 리덩후이는 대만 독립을 지향하는 이들에게는 '대만의 아버지'로 불렸다. 독립 성향의 대학교수이던 현 차이잉원(蔡英文) 총통을 정계로 이끈 것도 리 전 총통이다.
'친일'에 가깝다는 지적을 받을 정도로 일본에는 호의적인 성향을 보였다. 말년에는 일본 군국주의의 상징인 야스쿠니(靖國) 신사를 참배해 대만 내에서조차 광범위한 비난을 받았다. 야스쿠니에 신사에는 일본군 장교로 2차 세계대전에 참전했다 전사한 그의 친형의 위패가 있다.

cha@yna.co.kr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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