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니 부통령 "한인 이주 100주년…삼성·LG 모르는 사람 없어"

입력 2020-09-20 11:19  

인니 부통령 "한인 이주 100주년…삼성·LG 모르는 사람 없어"
1920년 9월 20일 '첫발' 장윤원 선생 가족 "우연 아니야"

(자카르타=연합뉴스) 성혜미 특파원 = 마루프 아민 인도네시아 부통령은 20일 "인도네시아 한인 이주 100주년을 축하한다"며 "삼성·LG 같은 한국 제품을 모르는 사람이 누가 있겠느냐"고 말했다.
마루프 부통령은 이날 재인도네시아 한인회가 유튜브 등을 통해 공개한 '오랑 꼬레아 100년의 서사시' 동영상에서 양국 간 협력 증진을 강조했다.



◇ 인니 부통령 "한인 이주 100주년, 중요한 순간"

인도네시아의 한인 역사가 시작된 것은 3·1운동 자금을 지원한 장윤원(張潤遠·1883∼1947) 선생이 망명 생활을 하다 1920년 9월 20일 자카르타에 도착한 사건을 기점으로 한다.
1910년대에 조선의 인삼 상인들이 인도네시아를 다녀가기도 했으나 이곳에서 결혼해 정착한 한인은 장 선생이 최초이다.
한인회는 100주년 기념식을 성대하게 치르고 싶었지만, 코로나 감염을 우려해 축사 모음 동영상과 UCC 공모전으로 대체했다.



마루프 부통령은 "알고 보니 인도네시아가 독립하기 전 이미 한인들이 인도네시아에 있었고, 그분들 중에는 인도네시아 독립투쟁에 참여해 목숨을 잃고 영웅묘지에 안장된 분도 있다"고 '조선인 독립 영웅' 양칠성에 관해 언급했다.
이어 "이는 양국이 공식적인 관계뿐만 아니라 역사적으로 오랜 기간 가까웠음을 의미한다. 이런 관계를 더 강화해야 한다"며 "한인 이주 100주년은 양국의 좋은 관계와 협력을 더 증진할 중요한 순간"이라고 강조했다.
마루프 부통령은 "삼성·LG 등 인도네시아에서 생산되는 한국 제품이 인도네시아인들의 마음을 사로잡고 있다"며 산업·투자·무역 협력을 부각하는 한편 문화·관광 교류 활성화를 촉구하고, 코로나 대응지원과 협업에 대한 감사를 표했다.
박재한 한인회장은 "100주년 행사가 인도네시아 한인이라는 일체감과 새로운 100년을 만들어가는 동력이 되길 바란다"며 "인도네시아 한인 100년사는 다음 달 말 출간을 위해 막바지 작업 중"이라고 말했다.



◇ 故 장윤원 선생 며느리 "우연 아닌 신의 뜻"

고(故) 장윤원 선생 가족 중에서는 둘째 며느리 쁘 완 조(93)씨가 대표로 축사했다.
그는 "시아버님이 인도네시아에 첫발을 디딘 지 100주년이 된 것을 축하해 주셔서 한국 대사관과 한인 동포 여러분께 감사의 말씀을 전한다"고 말했다.
이어 "저희는 시아버님께서 인도네시아로 온 것이 우연이 아니라 신의 뜻이라고 믿고 있다"며 "우리 모두 과거의 역사로부터 교훈을 얻어 더 나은 삶이 되길 바란다"고 의미를 강조했다.
또 "앞으로도 한국과 인도네시아의 좋은 친분이 역사에 기록되길 소망한다"고 덧붙였다.
쁘 완 조씨는 장윤원 선생의 차남 장순일의 아내다.




장순일은 1960년 인도네시아에 설립된 가톨릭계 대학 아뜨마 자야(ATMA JAYA)의 공동 창립자 12명 가운데 한 명으로, 초대 공대학장과 재단 부이사장을 지냈다.
이 대학 공과대 건물에는 장순일의 일본식 발음을 반영한 'J.P.CHO'(준이치 파울 조)라는 명패가 붙어있다.
한인회와 대사관은 한인 이주 100주년을 맞아 이 명패를 '장순일관'으로 바꿔 달려고 노력했으나 대학 측과 장 선생 가족 측이 상대방과 협의하라고 미뤄 성사되지 않았다.



◇ 인도네시아 이주 첫 한인 故 장윤원은 누구

한인 100년사 편찬위원회에 따르면 장윤원 선생은 중추원 의관을 지낸 장석찬의 외아들로 일본 동경제국대학 상과를 졸업한 뒤 은행에서 일하다 1919년 3·1운동 당시 은행 돈을 빼돌려 독립운동자금을 지원했다.
장 선생은 독립자금 지원 사실이 발각되자 만주를 거쳐 베이징으로 도망, 1920년 당시 인도네시아를 식민지배하던 네덜란드 총독부 고위관리의 권유로 망명했다
장 선생은 인도네시아의 네덜란드 총독부 일본어 담당 수석 고문관으로 일했다.
일본은 1942년 3월 인도네시아를 점령하자마자 장 선생과 장남을 체포해 헌병대로 끌고 가 고문한 뒤 교도소에 가뒀다.
장 선생은 1945년 8월 종전으로 출옥한 뒤 재자바 조선인민회 출범을 뒤에서 돕는 등 조선 동포들을 위해 뛰었으나 고문 후유증 등으로 1947년 11월 65세를 일기로 사망했다.
그는 고국에 두고 온 가족이 있었으나, 인도네시아에서 중국 여성과 결혼해 2남 3녀를 뒀다. 장남해(장남), 장창포, 장방기, 장순일(차남), 장평화씨 순이다.
막내딸 장평화는 한국총영사관 직원으로 채용돼 1971년 한국을 방문하고, 1974년 한국인 외교관과 결혼해 2016년 숨질 때까지 한국에서 살기도 했다. 남편은 여한종 전 파푸아뉴기니 대사다.
그동안 장윤원 선생의 후손들은 한인사회와 거의 교류가 없었으나, 한인 이주 100년을 앞두고 지난해 대사관이 가족 6명을 초청해 한인 100년사 집필진과 함께 식사 자리를 마련했다.



noanoa@yna.co.kr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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