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무 낡았네…" 방마다 에어컨 새로 바꿔준 '을밀대 5번방 손님'

입력 2018-05-21 18:08   수정 2018-05-22 09:32

구본무 LG그룹 회장 타계

내가 기억하는 구본무 회장

을밀대 김영길 사장
수십년간 수행비서 없이 찾아
그저 평범한 노신사인줄 알았죠

진미식당 정복순 사장
간장게장에 한산 소곡주 즐겨
늘 제게 "회장님, 잘 먹었습니다"
비서실 통해 생필품 등 챙겨 보내

이낙연 "마시는 술만 봐도 소탈"
반기문 "남 배려심이 깊으신 분"



[ 고재연 기자 ]
“구본무 회장님은 (너무 비싸거나 싸지 않은) 중간 값의 술을 즐겨 드셨습니다. 너무 싼 술을 마시면 위선 같고, 지나치게 비싼 술을 마시는 것은 도리가 아니라는 이유에서였습니다.”

이낙연 국무총리가 자신이 기억하는 구본무 LG그룹 회장의 모습이라며 21일 페이스북에 남긴 글이다. 이 총리는 구 회장을 ‘도덕경영을 실천하고 누구에게나 겸손·소탈하셨던 큰 어른’ ‘LG를 국민의 사랑, 세계의 신뢰를 받는 기업으로 키운 주인공’으로 표현하면서 “너무 일찍 떠나셨다”며 애도의 뜻을 전했다.

구 회장은 소탈하면서도 절제된 모습으로 ‘재벌 회장’에 대한 세간의 인식을 바꿔놓았다는 평을 듣는다. 정·재계 인사뿐만 아니라 골목 식당 주인들까지 구 회장을 기억하며 애도하는 이유다.

구 회장은 서민적인 음식을 즐긴 것으로 알려져 있다. 임원 승진 축하 파티에서 ‘어묵 부스’를 차린 일화도 있다. 포장마차에서 파는 어묵을 좋아하는데, 재벌 회장이 길거리 어묵을 사 먹으면 자칫 ‘쇼’처럼 비춰질 수 있다는 이유로 자제하다가 회사 내부 행사에서 ‘기회’를 잡은 것이다.

그는 골목길 구석구석에 숨어 있는 오래된 식당도 자주 찾았다. 대표적인 곳이 서울 공덕동에 있는 간장게장집 ‘진미식당’이다. 허영만 화백의 소개로 처음 이곳을 찾았던 구 회장은 사장단이나 임원들을 데리고 한 달에 한 번은 방문할 정도로 단골이 됐다.

이 식당의 정복순 사장(67)에게 구 회장은 평생 잊을 수 없는 손님이다. “그분에게는 제가 회장님이었어요. 보통 오시는 분들은 ‘아줌마, 음식 잘 먹었어요’라고 하시는데, 구 회장님은 꼭 ‘회장님, 잘 먹었습니다’라고 하셨어요. 제가 무슨 회장님인가요, 그냥 식당 아줌마지. 정말 다정하고 순수한 분이셨어요.”

보통 간장게장과 간재미회가 주 메뉴였다. 정 사장이 한산 소곡주를 대접하면 사장단과 나눠 마신 뒤 소주 1~2병을 추가로 시키곤 했다. 주로 2층에서 식사를 했는데, 아래층까지 웃음 소리가 들려올 정도로 분위기가 좋았다고 한다. 정 사장은 꽃게 철이 되면 비서실을 통해 살아있는 꽃게를 선물로 보내곤 했다. 구 회장은 그냥 받는 법이 없었다. 화장품이나 생활필수품 세트 등을 꼭 답례로 보냈다. 정 사장은 연신 눈시울을 붉혔다. “지난해 6월 마지막으로 가게를 찾으셨는데, 그때가 마침 제 생일이어서 가게에 꽃다발이 있었어요. 구 회장님이 나가시면서 ‘회장님 생일입니까? 축하합니다’라며 웃으시던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합니다.”

구 회장은 서울 염리동 좁은 골목길에 있는 평양냉면집 ‘을밀대’도 좋아했다. 주차장이 식당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탓에 운전기사가 운전하는 승용차를 타는 손님들은 식당 앞까지 차를 타고 들어오곤 했다. 구 회장은 달랐다. 큰 길에서 내려 차를 주차장으로 보낸 뒤 좁은 골목길을 혼자 걸어 들어왔다. 김영길 을밀대 사장(55)은 “줄을 서서 기다리는 사람들에게 방해가 될까 수행비서도 대동하지 않고, 늘 고개를 숙이고 빠른 걸음으로 들어오시곤 했다”고 기억했다. 점퍼를 걸친 노(老)신사가 가게로 들어가는 모습을 보고 사람들은 그가 재벌 회장이라고는 전혀 상상하지 못했다고 한다.

구 회장은 늘 5번방에서 식사를 했다. 어느날 식사를 하던 구 회장의 눈에 금성사의 오래된 창문형 에어컨이 들어왔다. “왜 이렇게 에어컨이 낡았느냐”며 비서에게 새 제품으로 교체해주라고 했다. 을밀대 직원들은 극구 사양했다. “굳이 바꿔주시겠다면 5번 방 에어컨만 바꿔 주시면 된다”고 했지만 구 회장은 식당에 있는 20대의 에어컨을 모두 새것으로 교체해줬다.

반기문 전 유엔 사무총장도 이날 빈소를 찾아 구 회장과의 일화를 들려줬다. 반 전 총장은 “비행기를 같이 탄 적이 있는데, 내쪽 조명이 꺼져 불편해 하자 자리를 바꿔 주셨다”며 “유엔 사무총장 시절에는 공관에 있는 전자제품을 모두 새것으로 교체해주셨다”고 했다.

안철수 바른미래당 서울시장 예비후보는 “기업인 시절부터 알던 분인데, 너무 큰 상실을 느낀다”며 “고인의 뜻을 받들어 후배 기업인들은 물론 저도 정치권에서 제 역할을 열심히 하겠다”고 말했다.

고재연 기자 yeon@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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