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학영 칼럼] 우리도 난민이었다

입력 2018-08-15 18:09  

세계 10위권 경제대국이 난민 수용은 139위
나라 잃고 떠돌던 세대 '난민 설움' 잊어서야
사실 왜곡해 혐오 조장…사회지도자들은 어디에

이학영 논설실장



한국에 들어온 해외 난민들을 돌려보내라는 국민청원에 대한 청와대 답변 원고의 한 구절에 눈길이 꽂혔다. “상해임시정부도 정치적 난민이 수립한 망명 정부였다.”

제주도에 들어와 난민 신청을 한 549명의 예멘인 문제로 나라가 시끄럽다. 유럽 국가들 얘기로만 알았던 문제가 이 나라에까지 밀어닥쳤다. 그런데 난민을 보는 상당수 한국인들의 눈길이 곱지 않다. 난민을 아예 받지 말아야 한다는 청와대 청원에 역대 국민청원 가운데 가장 많은 71만여 명이 동의를 표시했다.

‘난민 반대’ 이유는 여러 가지다. 허위 난민 등 제도를 악용하는 사례 빈발, 문화 마찰로 인한 사회 문제에서부터 ‘대한민국이 난민 문제에 대해 온정적인 손길을 내줄 수 있는 위치에 있는지에 대한 의구심’까지. 청와대 국민청원 외에도 예멘 난민 추방을 촉구하는 시위가 잇따르고, SNS에서는 특정 종교와 국가 출신 난민들에 대한 혐오를 노골적으로 드러낸 글들이 난무한다.

경제 규모로 세계 10위권 국가가 난민 문제로 이렇게 시끄러우니 국제사회의 눈길을 끌지 않을 수 없다. “난민 반대 현상이 히스테리 증세에 가깝다” “예멘 난민에 대해 가짜뉴스까지 퍼뜨려가며 외국인혐오(xenophobia)를 조장하고 있다” 등의 해외 언론 지적이 눈에 띈다. 뉴욕타임스는 ‘한국인들의 끝없는 인종차별’을 제목으로 한 사설에서 “만약 한반도에서 전쟁이 나 한국인 난민이 생겼는데, 지금 예멘 난민과 같은 대우를 받는다면 어떻게 할 건가”를 묻는 ‘돌직구’를 던졌다.

뉴욕타임스는 ‘미래 가정(假定)형’ 질문을 했지만, 불과 70여 년 전까지 우리가 겪었던 ‘실제상황’을 일깨워줬다. 일제 강점기에 나라를 잃은 우리들의 할아버지 세대는 박해와 착취와 기아(飢餓)를 피해 중국 러시아 미국 등 각지를 떠돌았다. 두만강을 건너 러시아 연해주에 둥지를 틀었던 한인 난민들은 옛 소련 시절 독재자 스탈린의 강제 이주명령을 받고 하룻밤 새 맨손으로 중앙아시아의 허허벌판에 내팽개쳐졌다. 천신만고 끝에 터전을 닦는 데 성공했지만, 이번에는 현지 토박이들의 텃세와 시샘을 견뎌내야 했다.

이런 아픔을 가진 나라의 해외 난민 수용이 세계 꼴찌 수준이다. 인구 1000명당 난민 수용이 전 세계 139위이고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35개국 중 34위다. 올해 6월까지 4만2009명의 외국인이 한국에 난민 신청을 했지만, 받아들여진 사람은 849명뿐이다. 인도적 체류자를 합쳐도 난민보호율이 11.4%에 불과하다. 세계 평균인 38%에 한참 못 미친다.

스스로의 과거에 눈감은 ‘망각’보다 더 심각한 건 난민 혐오를 부추기는 사실왜곡과 선동이다. 예멘 난민 반대 과정에서 불거진 이슬람교에 대한 폄훼가 특히 그렇다. 대표적인 것이 이슬람 경전인 코란에 “이슬람 교인이 아닌 사람을 죽이면 천국에서 처녀 72명을 상으로 받는다”는 구절이 있다는 주장이다. ‘코란 9장 111절’이라는 구체적인 출전(出典)까지 거론되지만, 코란은커녕 다른 경전 어디에도 그런 대목은 없다는 게 전문가들의 설명이다.

한국인들이 일본 식민지 시절, 도쿄 일대에서 폭도로 돌변한 일본인들에게 수천 명의 목숨을 빼앗겼던 ‘관동 대학살’이 말도 안 되는 가짜뉴스와 황당한 왜곡, 선동의 결과였음을 새길 필요가 있다. 1923년 도쿄 일대에서 대지진이 일어나 혼란이 극에 달하자 일부 일본인들이 재일 조선인의 폭동설과 방화설 등을 지어낸 것이 대학살의 시발점이었다.

열린 국제사회에서 다른 문화를 이해하려는 노력 없이 편견을 갖고 배척부터 하는 것은 스스로의 입지를 좁힐 뿐이다. 무엇보다도 근거 없는 혐오를 부추겨서는 곤란하다. 혹시라도 요즘 우리 사회에서 확산 조짐을 보이고 있는 세대·계층·집단 간 편 가르기가 맹목적인 ‘혐오증후군’을 키우고 있는 건 아닌지 돌아볼 때다. 이럴 때 역할을 해야 할 사람이 정치·사회·종교 지도자들인데, 너나없이 집안싸움에 정신이 없다. 우리 사회가 갈수록 여유를 잃어가고 있는 것 같아 걱정스럽다.

haky@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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