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용환 "투자는 고난의 여정, 곳곳에 가시밭길…나는 실패보다 성공이 조금 더 많았을 뿐"

입력 2019-01-03 17:28  

2019 위기를 기회로 - 창업 기업인의 꿈과 도전
(3) 도용환 스틱인베스트먼트 회장

회사 밖은 생각보다 더 추웠다
창업 하자마자 IMF로 문 닫을 위기…IT거품도 붕괴
직원들 월급 주려 경영컨설팅 '투잡'…벤처캐피털에 눈떠

시련에 무릎꿇지 않는 게 성공비결
벤처펀드에 기관 끌어들여…국내 첫 오일머니 유치도
정주영·이병철의 창업자 정신처럼 '투자보국'을 社是로



[ 유창재/황정환 기자 ]
1996년 초 당시 39세의 도용환 신한생명 투자운용실장은 그야말로 잘나갔다. 투자업계 ‘갑 중의 갑’인 대형 보험회사 최고투자책임자(CIO). 내로라하는 증권사, 운용사, 자문사 직원들이 도 실장을 만나려고 줄을 섰다. ‘이대로 가면 신한금융그룹 계열사 최고경영자(CEO) 정도는 충분히 할 수 있겠다’ 싶었다. 그런데 그해 인사에서 물먹었다. 자존심이 상했다. 회사를 떠나도 뭐든지 할 수 있을 것 같은 자신감이 있었다. 그해 7월 사표를 던지고 스틱투자자문을 설립했다.

운용자산 4.7조 투자사 일군 도 회장의 '성공 SWOT'

Strength 강점 - 보험사 CIO 출신의 리스크 관리
Weakness 약점 - 벤처캐피털 경험과 네트워크 부족
Opportunity 기회 - 국내 IT기업의 성장 잠재력 발견
Threat 위협 - 無에서 有를 창조해야 했던 척박한 환경

“당시 잘나가던 신한금융그룹의 후광 덕택이었는데 그땐 내가 잘나서 그런 걸로 착각했었죠. 돌이켜보면 그렇게 창업을 하게 된 건 운명이었던 것 같아요.”

‘토종 사모펀드(PEF)의 맏형’ 스틱인베스트먼트를 일군 도 회장(62)은 “남의 돈을 굴리는 운용업은 고난의 연속”이라며 “지금의 스틱이 있는 건 실패보다 성공이 조금 더 많았기 때문”이라고 했다.

도 회장이 1999년 설립한 스틱인베스트먼트는 20년 만인 지난해 누적 운용자산이 4조7000억원에 달하는 국내 대표 투자회사로 성장했다.

회사를 떠나 바깥세상을 겪어보니 ‘관(棺)을 봐야 눈물을 흘린다’는 말이 실감났다. 회사 밖은 막연히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추웠다고 한다. 투자업계에 수수료라는 개념조차 없던 시절, 독립 투자자문사가 잘될 리 없었다. 회사를 열자마자 외환위기의 한파가 몰아닥쳤다. 6~7명 되던 직원들 월급도 못 줬다. 함께 창업했던 후배에게 “회사를 맡아달라”고 부탁한 채 도 회장은 홀로 먹거리를 찾아 나섰다. 지인들의 소개를 받아 기술 기업들의 경영·재무 컨설팅을 해줬다. 자문료 몇백만원씩을 받아 가까스로 직원들 월급을 줬다. 궁여지책으로 했던 일이지만 그는 새로운 기회를 엿봤다.

“기술 기업의 경영자들을 만나보니 정보기술(IT)산업이 성장하면서 돈은 잘 버는데 기술 말고는 아는 게 없는 거예요. 만나서 대화하고 나면 저에게 이렇게 말해요. ‘저는 그동안 깜깜한 시골길을 헤드라이트도 없이 달리기만 했다. 도 대표를 만나니 헤드라이트가 켜진 것 같다’고요. 그 말을 들으니 ‘우리나라 기술 기업들의 취약한 부분을 메워주면 기업과 국가 경제에 도움을 줄 수 있겠다’ 싶더군요.”

도 회장이 벤처캐피털 사업에 눈을 뜬 순간이었다. 그러던 중 1999년 정보통신부에서 연락이 왔다. IT 전문 투자회사를 해보지 않겠느냐는 제안이었다. 주저할 이유가 없었다. 정통부 주선으로 SK텔레콤의 투자도 받았다. 그렇게 자본금 180억원으로 스틱IT투자를 설립하고 사시를 ‘투자보국’으로 정했다. 한강의 기적을 일군 정주영 현대 창업주, 이병철 삼성 창업주처럼 사업보국의 창업자 정신을 되새기기 위해서였다.

운용사를 차렸지만 펀드 조성은 다른 얘기였다. 당시엔 벤처캐피털에 투자하는 기관투자가가 없었다. 벤처투자조합들의 규모는 커봐야 50억원 미만이었다. 궁리 끝에 도 회장은 대기업들을 끌어들이기로 했다.

“당시는 대기업들이 차세대 기술 개발을 위해 연구원을 뽑아놓으면 죄다 회사를 떠나 골머리를 썩이던 시절이었어요. 닷컴버블 때여서 다들 돈을 벌겠다고 벤처회사로 이직했죠. LG전자에 찾아가 ‘이직을 막을 수는 없으니 같이 펀드를 조성해 그들과의 연결고리를 만들자’고 제안했습니다. 당시 100억원 이상 투자는 LG그룹 최고경영진이 참여하는 7인 위원회가 결정하던 때였어요. 그런데 300억원짜리 펀드에 270억원을 선뜻 출자하더군요.”

스틱은 LG전자 외에 삼성생명, SK텔레콤, 현대중공업 등과도 펀드를 만들었다. 회사 설립 4년 만인 2001년 운용자산이 2000억원을 넘어섰다. 시장이 깜짝 놀랐다. ‘A펀드에서 난 손실을 B펀드를 조성해 메꾼다’는 등 악성 루머도 나돌았다.

닷컴버블이 꺼지자 그런 소문은 사라졌다. 거품 붕괴와 함께 벤처캐피털들도 사라져갔지만 스틱은 굳건히 살아남았기 때문이다. 도 회장 특유의 리스크 관리가 빛을 발했다.

“스틱은 출범부터 DNA가 좀 달랐어요. 제가 보수적인 보험회사 출신이다 보니 ‘대박’이나 ‘한방’이라는 개념이 없었죠. 제 역할은 직원들이 투자를 못하게 말리는 쪽이었습니다. ‘투자하려면 내 반대를 극복해보라’는 거였죠. 그러다 보니 남들처럼 소위 ‘오버슈팅(과도한 투자)’을 안했어요.”

자신감이 고개를 들려 하자 여지없이 시련이 찾아왔다. 2002년 정통부 등의 출자를 받아 미국 벤처기업에 투자하는 나스닥 펀드를 1억달러 규모로 조성했다. “대한민국 정부가 역외 펀드에 투자한 첫 사례로, 당시 한국경제신문 1면 톱으로 기사가 실렸다”고 했다. 하지만 이 펀드는 5년이 지나도록 운용자산의 절반도 투자하지 못했다. 성과도 좋지 않았다. 도 회장은 실패를 자인하고 출자자들에게 돈을 돌려줬다. 그는 “펀드를 청산하지 않았다면 운용 보수는 계속 받을 수 있었겠지만 솔직해야 한다고 생각했다”며 “그 결정이 출자자들의 신뢰를 얻는 데 오히려 큰 도움이 됐다”고 들려줬다.

스틱은 기존에 없던 새로운 시장을 개척해왔다. 벤처캐피털업계에선 처음으로 펀드 개념을 도입했고, 국민연금 우정사업본부 교직원공제회 같은 기관투자가를 끌어들였다. 무에서 유를 창조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중에서도 국내 최초로 중동 자금을 유치한 건 스틱이 한 단계 도약하는 계기가 됐다.

스틱은 2000년대 초 외부에서 임정강 상무(현 이스트브릿지파트너스 회장)를 영입해 중동을 대상으로 펀드레이징(자금 유치)에 나섰다. 국내에서조차 잘 알려지지 않았던 스틱이란 이름을 낯선 중동에서 알리는 건 그야말로 ‘맨땅에 헤딩’이었다. 도 회장은 틈만 나면 중동으로 날아가 임 상무와 함께 사막을 누볐다. 3년여간의 고생 끝에 2004년 사우디아라비아의 패밀리오피스(부호들의 돈을 굴리는 투자회사)인 세드코(SEDCO)로부터 ‘찾아오라’는 연락이 왔다.

“그 직전에 한국인 김선일 씨가 이라크에서 참수당한 사건이 있었어요. 리야드에서는 폭탄 테러도 있었고요. 세드코를 만나려고 사우디에 가겠다고 하니 주위에서 다 만류하더군요. 그래도 어떻게 해요. 투자를 받으려면 가야죠. 그랬더니 세드코가 감동했는지 원래 투자하기로 한 800만달러보다 늘린 1200만달러를 주겠다고 하더군요.”

2004년 국내 교직원공제회 등과 결성한 스틱일자리창출펀드의 출발이었다. 첫 단추를 잘 끼우니 입소문이 나면서 중동 자금 유치가 한층 수월해졌다. 2006년 사우디 국영상업은행(NCB)으로부터 1억5000만달러를 단독으로 출자받아 첫 역외 펀드를 조성했다. 도 회장은 이때 사명을 스틱IT투자에서 스틱인베스트먼트로 바꾸고 벤처 일변도에서 벗어나 중견기업에 투자하는 ‘그로스캐피털’로 투자 범위를 넓혔다. 이후로도 아랍에미리트 국부펀드, 말레이시아 국부펀드 등 해외 출자자들이 잇따라 스틱 펀드에 돈을 댔다.

스틱의 운용자산은 2007년 1조원을 돌파했다. 당시 국내에서 한 기업에 100억원 단위로 투자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회사였다. 벤처캐피털 분야 후발주자였던 스틱이 토종 PEF업계의 맏형이 된 배경이다. 그로부터 10년여간 스틱은 전성기를 누렸다. 도 회장은 “벤처캐피털을 하면서 354개 회사에 투자했고 이를 위해 5000여 개 회사를 들여다봤다”며 “이 과정에서 기술에 대한 이해가 쌓였기 때문에 PEF 투자에서도 성공할 수 있었다”고 설명했다.

스틱은 세컨더리, 바이아웃, 스페셜시추에이션 등 사모주식(PE)의 다양한 투자 전략으로 범위를 넓히며 운용자산을 늘려가고 있다. 지난해에는 회사 모태인 벤처캐피털의 ‘야성’을 되살리기 위해 스틱벤처스를 분리 독립시켰다.

도 회장은 “이제는 스틱을 영속성 있는 회사로 만드는 게 내 역할”이라고 했다.

도 회장의 목표는 스틱을 투자업계의 ‘양산박’(중국 소설 수호지에서 108명의 호걸이 모인 장소)으로 키우는 것이다. 그는 “스틱은 브랜드와 시스템, 자본금 등 여러 요건을 갖췄다”며 “천하의 무림고수들이 모두 모여 열심히 일할 수 있는 플랫폼을 만드는 데 남은 힘을 쏟겠다”고 말했다.

■약력

△1957년 경북 경산 출생
△1975년 경북고 졸업
△1982년 고려대 경제학과 졸업
△1982년 제일종합금융 펀드매니저
△1990년 고려대 경영대학원 경영학 석사
△1990년 신한생명보험 투자운용실장
△1996년 스틱투자자문 설립
△1999년 스틱IT투자 설립
△2011년 스틱인베스트먼트 회장

글=유창재/황정환 기자·사진=강은구 기자yoocool@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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