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상제한서'의 몰락…반세기 '은행 不死' 신화 무너지다

입력 2019-03-08 17:36  

한국 자본시장을 뒤흔든 사건 (17) 1998년 6월 은행의 강제퇴출

외환위기로 은행 손실 커지자
금감위, 은행 살생부 전격 발표



[ 이태호 기자 ] “퇴출 은행 명단이 나왔습니다.”

장대비가 쏟아지던 1998년 6월 25일 서울 삼청동 대통령 안가(安家). 이헌재 금융감독위원회 위원장은 김대중 대통령에게 두 쪽짜리 문서를 건넸다. 부실 은행의 운명을 담은 ‘살생부’였다. 잠시 보고서를 들춰본 김 대통령의 대답은 간명했다. “원칙대로 하세요.”

사흘 뒤인 6월 28일 일요일. 금감위는 정상 은행 다섯 곳에 전화를 돌렸다. 미리 짝지어 놓은 퇴출 은행 다섯 곳을 ‘접수’하라는 통보였다. 인수 실무팀은 곧바로 대동·동남·동화·경기·충청은행을 급습해 전산시스템 장악을 시도했다.

퇴출 명단이 전국에 생중계로 퍼져나가던 29일 월요일 오전 8시. 곳곳에서 대혼란이 벌어졌다. 일부 퇴출 은행 전산팀은 시스템 비밀번호를 바꾸고 단체로 잠적했다. 출근한 직원들은 ‘영업정지 공고문’을 붙이려는 인수팀을 온몸으로 막아섰다. “왜 우리가 퇴출 대상이냐”며 울부짖는 직원들도 있었다.

무분별한 기업 대출과 외환위기가 초래한 은행 구조조정은 2006년까지 멈추지 않았다. 이 기간 전국에 지점망을 갖춘 시중은행 16곳 가운데 13곳이 간판을 내렸다. 은행원 세 명 중 한 명이 일자리를 잃었다. 대한민국 금융 반세기 ‘은행불사(銀行不死)’ 신화의 처참한 종말이었다.


조·상·제·한·서의 탄생

해방의 기쁨과 혼란이 공존하던 1945년 8월. 한국에 남아 있던 일반은행은 조흥은행(현 신한은행)과 조선상업은행(현 우리은행) 둘뿐이었다. 조흥은행의 뿌리는 구한말 고관대작 김종한 등이 1897년에 세운 한성은행이다. 당나귀를 담보로 첫 대출영업을 시작한 한국 최초의 민족자본 은행이었다. 조선상업은행은 2년 뒤인 1899년 문을 연 대한천일은행에서 출발했다. 고종의 아들 영친왕이 은행장을 맡기도 했다.

미 군정기엔 두 곳이 늘어 ‘4개 시중은행’이 성업했다. 조선총독부가 1929년 세운 조선저축은행(현 SC제일은행)과 1932년 설립한 조선신탁(현 우리은행)이 일반은행으로 합류했다. 그전까진 조선식산은행(현 산업은행) 밑에서 각각 저축예금과 농지위탁경영을 전담하던 특수은행들이었다.

일제가 남긴 대표적인 ‘적산(敵産)’이었던 은행의 소유권은 1950년대 중반 모두 기업인에게 넘어갔다. 이승만 정부가 ‘금융의 민주화’ 명목으로 공매에 부친 결과였다. ‘재벌 특혜’라는 논란을 남긴 채 △조흥은행은 민덕기(당시 조선맥주 사장) △상업은행은 이한원(대한제분 사장) △한국저축은행(옛 조선저축은행)은 정재호(삼호방직 사장) △한국흥업은행(옛 조선신탁)은 이병철(삼성물산 사장)에게 돌아갔다.

이후 한국저축은행은 제일은행(1958년)으로 간판을 바꿔 달았다. 이병철 삼성 창업자도 흥업은행 상호를 한일은행(1960년)으로 바꿨다. 반세기 은행업의 대명사로 자리잡는 ‘조·상·제·한·서’의 마지막 글자는 이정림 대한양회 창업자가 채워넣었다. 그는 1959년 서울은행을 창립했다.

기업인들은 미국의 JP모간 같은 금융제국 건설을 꿈꿨지만, 수년 만에 일장춘몽으로 끝나고 만다.

16개 시중은행 시대

“부정하게 매각한 은행 주식 등은 국고로 환수한다.”(1961년 6월 14일 국가재건최고회의)

1961년 등장한 5·16 군사정부는 가장 먼저 시중은행을 장악했다. ‘민간의 금융 독점을 배제하고 공익성을 보장하는 체제를 갖춘다’는 명분이었다. 같은 해 7월에는 ‘은행의 대주주 의결권을 10% 한도로 제한’(금융기관에 대한 임시조치법)해 금융과 산업에 분리장벽을 세웠다. 경제개발을 뒷받침할 특수은행도 대거 설립했다. 국민(1963년), 외환(1967년), 한국주택은행(1969년) 등이 모두 이때 세워졌다. ‘1도 1행 원칙’에 따라 10개 지방은행도 한꺼번에 문을 열었다.

드높았던 시중은행의 진입장벽을 허물어뜨린 것은 1980년대 민주화 바람이었다. 가장 먼저 신한은행이 1982년 금융통화운영위원회의 설립 인가를 얻었다. 라응찬 상무(훗날 신한금융지주 회장) 등이 재일동포 기업인 자금 250억원을 모아 조·상·제·한·서에 도전장을 던졌다.

이듬해엔 뱅크오브아메리카(BOA)와 합작한 한미은행(현 한국씨티은행)이 탄생했다. 1989년엔 중소기업 전문인 대동·동남은행과 실향민들의 동화은행이 문을 열었다. 같은 해 외환은행도 시중은행으로 전환하면서 시중은행 두 자릿수(10개) 시대에 진입했다.

1990년대엔 금융의 업태전환 촉진 정책에 힘입어 하나은행이 탄생했다. 단기금융회사(한국투자금융) 출신 1호로 1991년 은행 간판을 올리는 영예를 안았다. 뒤이어 한양투자금융과 금성투자금융이 합쳐져 보람은행으로 재탄생했다. 서민금융의 ‘두 거인’이었던 국민과 주택은행도 각각 1995년과 1997년 일반은행으로 변신했다. 시중은행의 급격한 증가는 1997년 16개를 끝으로 막을 내렸다. 폭발적으로 늘어난 부실 대출에 은행산업 전체가 무너져 내리면서다.

10곳에 회생불가 판정

“제일·서울은행을 팔고 다른 12개 부실은행은 재무개선 계획을 제출한다.”(1997년 12월 한국 정부와 IMF의 합의서 중)

1997년 국내 은행업은 사상 최악의 위기를 맞았다. 1월 한보그룹을 시작으로 기아 진로 해태 등 대기업그룹이 줄줄이 쓰러지면서 부실대출이 눈덩이처럼 불어났다. 금융시스템은 얼어붙었고 해외 금융회사들은 달러를 회수해갔다. 버티던 정부는 결국 1997년 11월 21일 밤 국제통화기금(IMF)에 구제금융을 공식 요청했다.

IMF는 국제결제은행(BIS) 자기자본 비율이 8% 미만인 14개(지방은행 4곳 포함) 부실은행의 조속한 정리를 요구했다. 부실채권(1개월 이상 연체) 규모는 충격적이었다. 가장 심각한 제일·서울은행을 뺀 나머지 12곳만 평균 3조6000억원(1998년 6월 말 기준)에 달했다. 한보철강과 기아자동차 주거래 은행이었던 제일은행의 재무상태는 2003년까지 공적자금 17조원을 공급해야 할 정도로 엉망이었다.

구조조정 사령탑을 맡은 금감위는 1998년 6월 29일 5개 은행의 강제 퇴출(강제 피인수)을 밀어붙였다. 나머지 7개 은행엔 ‘살 방법을 찾으라’(조건부승인)고 통보했다. 시중은행 전체 16곳 중 10곳(지방은행 포함 시 26곳 중 14곳)에 사실상 ‘독자회생 불가’ 판정이 내려진 셈이었다. 전국금융노동조합연맹(금융노련)은 사상 초유의 은행 총파업 예고로 맞섰다. 하지만 금융대란을 우려한 여론을 이기지 못했다. 총파업 개시 예정일이었던 9월 29일 인력 32% 감축에 합의했다. 정부도 합병·피합병 은행 각각 40%라는 감원 원칙(1+1=1.2)에서 한걸음 물러섰다.

정상 판정을 받은 시중은행은 신한·한미·하나·보람·국민·주택은행 6곳이 전부였다. 정상-퇴출 은행의 짝짓기도 반강제로 이뤄질 수밖에 없었다. 마지막까지 난색을 보였던 김승유 하나은행장(훗날 하나금융지주 회장)도 이헌재 위원장의 채근에 하나은행보다 큰 충청은행을 떠안아야 했다.

이합집산의 시대

“양사 합병을 결정했습니다.”(1998년 7월 31일 배찬병 상업은행장과 이관우 한일은행장)

자발적 은행 이합집산의 신호탄은 퇴출명단 발표 한 달 뒤에 나왔다. 조건부승인을 받았던 상업·한일은행이 전격적인 합병(이후 한빛은행)을 발표했다. 총자산 105조원, 한국 첫 세계 100대(99위) 은행의 탄생이었다. 이팔성 한일은행 부산경남본부장(훗날 우리금융지주 회장)을 뺀 모든 고위 임원은 부실경영의 책임을 지고 양사에서 물러났다.

1998년 12월 31일엔 지지부진했던 제일은행 매각 소식이 전해졌다. 인수자는 미국계 사모펀드 뉴브리지캐피털. 국내 은행의 첫 해외 매각이었다. 9개월 뒤 확정한 지분 51% 매각 금액은 불과 5000억원이었다. 맏형 조흥은행도 1999년까지 강원·충북은행과 3자 합병을 선택했다. 함께 부실 판정을 받은 은행과 합쳐서라도 ‘일단 살고 보자’는 판단이었다.

은행산업은 대우그룹의 부실화로 2000년 하반기 2단계 구조조정에 들어가야 했다. 한빛·평화·광주·경남은행 등 독자회생 불가 판정을 받은 은행들이 다시 속출했기 때문이다. 정부는 2001년 4월 최초의 금융지주회사인 우리금융지주를 출범시켜 4개 은행을 흡수했다. 효과적인 구조조정을 위한 선택이었다.

선도 은행으로 자리잡으려는 대형화 경쟁도 불붙기 시작했다. 포문을 연 곳은 국민·주택은행이었다. 2001년 KB국민은행으로 합병하며 ‘메가뱅크’ 시대를 예고했다. 공적자금 회수를 위한 정부 소유 은행 매각도 급물살을 탔다. 서울은행이 2002년 하나은행에 넘어갔고, 조흥은행은 2003년 신한금융지주에 팔렸다.

109년 최고(最古) 역사의 ‘조흥’ 간판은 2006년 신한은행과 합병하면서 영원히 사라졌다.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금융산업을 이끌었던 ‘조·상·제·한·서’의 바통이 ‘국민·신한·우리·하나’ 4대 금융그룹 체제로 완전히 넘어가는 상징적인 사건이었다. 1997년부터 2004년까지 정부가 부실 금융회사에 투입한 공적자금은 모두 165조원이었다.

이태호 기자 thlee@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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