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마을] '백인 쓰레기'에게 아메리칸 드림은 이루지 못할 꿈이었다

입력 2019-04-11 17:38  

알려지지 않은 미국 400년 계급사

낸시 아이젠버그 지음 / 강혜정 옮김
살림 / 752쪽 / 3만8000원



[ 서화동 기자 ] “우리는 다음과 같은 것을 자명한 진리라고 생각한다. 모든 사람은 평등하게 태어났고, 조물주는 몇 개의 양도할 수 없는 권리를 부여하였으며….” 1776년 작성된 미국 독립선언문은 이렇게 시작한다. 이를 근거로 미국은 계급이 없고 누구에게나 기회가 공평하게 부여된 평등사회라고 주장해왔다. 각자의 노력에 의해 부와 행복을 성취할 수 있다는 ‘아메리칸 드림’이 이를 대변한다.

정말 미국은 평등한 사회인가. 낸시 아이젠버그 미국 루이지애나주립대 역사학과 교수는 《알려지지 않은 미국 400년 계급사》에서 그렇지 않다고 단언한다. 노예로 팔려온 흑인뿐만 아니라 백인 중에서도 가난한 사람들은 일찍부터 다른 백인과는 다른 ‘별종’이나 ‘낙오자’로 취급받았고, 잘살아보겠다는 의지조차 없는 무능한 인간으로 치부됐다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이 책은 흑인과 소수 인종에 주목했던 다른 책들과 달리 미국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면서도 세력가나 주류 사회에 밀려 철저히 무시돼온 가난한 백인의 역사에 주목한다. 이들에게 붙여진 수많은 낙인은 경제적 하층계급에 대한 차별이 얼마나 심하고 다양했는지 보여준다. 느림보, 폐기물, 클레이이터(clay-eater), 크래커, 레드넥, 트레일러 쓰레기, 무단토지점유자, 힐빌리, 백인 깜둥이, 타락자, 습지 인간 등 수많은 오명이 빈민들에게 붙여졌다.

저자는 ‘백인 쓰레기(white trash)’의 역사가 미국이 한창 발전한 20세기가 아니라 1500년대에 이미 시작됐다고 강조한다. 영국의 초기 식민지 건설 기획자들이 영국 내에서 골칫거리로 여겨지던 빈민들을 흘려보낼 하수구 내지 쓰레기더미로 신대륙을 상정했다는 것이다. 그 결과 부랑자와 거지, 눈엣가시 같은 가난뱅이들, 골치 아픈 죄수들을 신대륙으로 보내 노동자로 활용했다. 하지만 정작 이들에겐 기회의 땅이 아니었다. 신대륙으로 건너가는 뱃삯을 갚기 위해 이들은 고된 노동에 시달려야 했고, 이를 갚지 못하면 부인과 자식에게 빚이 대물림됐다. 토지가 부의 주된 원천이었기 때문에 땅이 없는 사람들은 노예 상태를 벗어나기가 불가능했다.

영국식 계급제도는 신대륙에 그대로 답습됐고, 빈곤에 대한 뿌리 깊은 통념과 노동 착취는 근절되지 않은 채 극빈자들은 소모품처럼 취급됐다. 더 놀라운 것은 이들이 폄하와 기피의 대상이었을 뿐만 아니라 열등한 ‘동물 종’으로 묘사됐다는 점이다. 우생학의 전성기이던 19세기에는 유전적인 부적격자들을 강제 처형하자는 ‘단종(斷種)’ 주장이 횡행했고, 1931년까지 27개 주에서 단종법이 제정됐다고 한다. 한때 한국에서도 우유회사들이 열었던 우량아선발대회가 1908년 미국에서 시작된 것도 우생학 열기에서 비롯됐다니 놀랍다. 상층계급이 계급과 혈통을 강조하는 만큼 빈민계급을 단종과 추방의 대상으로 여기는 풍조는 더 강화됐다.

계급은 신대륙 이주 초기부터 미국 구석구석에서 개인의 삶의 방식을 규정하고 미국인의 정체성을 형성해왔다고 저자는 주장한다. 나이, 명성, 재산 등에 따라 교회 내 좌석을 배치하는 일부터 빈곤층의 투표권을 박탈하고 공직 출마를 제한하는 것까지 불공평의 사례는 무궁무진하다.

빈민계급과 그렇지 않은 계급의 주거공간은 이를 극명하게 보여주는 사례다. 1950년대에 똑같은 모양의 주택과 깔끔한 잔디밭으로 이뤄진 목가적 풍경의 주택단지들이 도시 외곽에 세워지기 시작했다. 신흥 중산층의 상징이던 교외 주택단지는 점차 계급 동질성을 강화하는 방향으로 흘러갔다. 이에 비해 이동주택인 트레일러는 삶의 터전을 마련하지 못한 떠돌이 빈민의 상징이었다. 백인 쓰레기를 ‘트레일러 쓰레기’라고 부르게 된 이유다.

존경받는 정치인과 엘리트 지식인들이 이런 계급의식을 조장하고 찬양했다는 점도 놀랍다. 헨리 데이비드 소로는 가난한 백인을 인간 폐기물과 동일시했고, 벤저민 프랭클린은 펜실베이니아 오지에 거주하는 사람들을 ‘찌꺼기’라고 부르며 잡초를 뽑아내듯 게으름뱅이들을 제거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미국 제3대 대통령 토머스 제퍼슨은 투표권을 토지보유자로 제한해 차별을 합법화했다.

차별을 극복한 성공 사례가 없지는 않았다. 1956년 첫 앨범을 낸 엘비스 프레슬리는 시골 출신이었고, 1963년 투표 없이 대통령이 된 린든 존슨은 동부 출신의 전임자 존 F 케네디와 달리 남부 오지 출신이었다. 빌 클린턴은 자신의 남부 촌뜨기 이미지를 장점으로 바꾸기 위해 거리낌 없이 엘비스 프레슬리의 이미지를 차용했다.

이런 성공 사례에도 불구하고 빈민계급의 문제는 여전히 진행형이다. 계층이동은 갈수록 어려워지고 이들을 돕기 위한 지원책은 반발에 직면한다. 능력과 관계없이 상속만으로 유사귀족의 지위를 누리는 일은 지금도 합법적으로 이뤄진다. 이 책이 해결책을 제시하지는 않는다. 다만 이렇게 당부한다. “그들은 우리가 아니야”라고 외면하지 말라고. “싫든 좋든 그들은 우리이며 항상 우리 역사의 본질적인 일부였다”고.

서화동 문화선임기자 fireboy@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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