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 지원금 'n분의 1'로 나눠 뿌려선 '한국판 퀄컴' 절대 못 키워"

입력 2019-04-24 17:44  

반도체 스타트업이 '대표주자' 되는 생태계 만들어야

대기업 수요 있고 실력 검증된 소형 팹리스에
정부 지원 선택과 집중…'성공사례' 축적해야



[ 고재연/황정수 기자 ]
국내 반도체 설계 전문업체(팹리스)들은 ‘실패의 역사’를 되풀이했다. 가전과 PC의 시대를 지나 휴대폰, 스마트폰으로 산업의 중심축이 달라질 때마다 각종 반도체를 설계하는 팹리스들이 생겨났지만 대부분 도태됐다. 비메모리 반도체도 삼성과 같은 대기업이 나서야 성공할 수 있는 게 아니냐는 목소리가 나오는 배경이다.

하지만 산업의 구조를 들여다보면 얘기는 달라진다. ‘소품종 대량생산’을 중심으로 하는 메모리 반도체와 달리 시스템 반도체는 종류만 8000개가 넘는다. 통신(퀄컴), 자동차용 반도체(NXP), 그래픽처리장치(GPU·엔비디아) 등으로 ‘전공 분야’가 나뉘어 있는 이유다. 삼성 혼자서 모든 분야를 다 잘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대신 반도체 스타트업(신생 벤처기업)들이 각 분야의 ‘대표 주자’로 성장할 수 있는 생태계를 조성하는 게 더 중요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팹리스 업계에서 ‘업력(業歷)’을 쌓아 글로벌 시장에 진출한 최고경영자(CEO)들에게 방법론을 들어봤다.


‘선택과 집중’ 없는 정부 지원

‘한국의 NXP’로 불리는 텔레칩스는 자동차 인포테인먼트(AVN) 시스템 반도체를 설계하는 회사다. 현대자동차와 벤츠, 도요타, 아우디 등에 텔레칩스의 반도체가 쓰인다. 한때 현대·기아자동차에 들어가는 AVN 반도체는 전량 네덜란드 NXP 제품이었다. 지금은 현대·기아차 물량의 80%가량을 공급한다.

‘잘나가는’ 차량용 반도체 기업이지만 고민도 많다. 투자금이 없어 중요한 기회를 날릴 때가 적지 않기 때문이다. 현대모비스, LG전자 전장(VS)사업본부 등에서는 더 많은 제품을 ‘국산화’하길 원한다. 텔레칩스 같은 국내 회사에 함께 새 제품을 개발하자고 제안한다. 하지만 이런 제안이 와도 선뜻 수락하기가 어렵다고 하소연한다. 이장규 텔레칩스 대표는 “14나노 첨단 공정 기반의 반도체를 하나 개발하는 데 200억~300억원이 들고, 양산할 때까지는 5년이 걸린다”며 “그 이전에는 이 제품을 통한 매출이 ‘1원’도 발생하지 않는다”고 이유를 설명했다.

정부 지원금을 알아봤지만 적절한 프로그램이 없었다. 이 대표는 “정부가 ‘될 만한 기업’을 선정해 지원하면 특혜 논란이 불거질까봐 얼마 안 되는 예산을 n분의 1로 나눠 뿌리기 때문”이라며 “이런 지원 방식으로는 ‘한국판 퀄컴’, ‘한국판 NXP’가 절대 나올 수 없다”고 했다. 이어 “현대모비스, LG전자 등 수요가 있는 기업과 실력이 검증된 소형 팹리스가 손잡고 대규모 프로젝트를 진행할 때 정부가 지원해 성공 사례를 쌓아가야 한다”고 덧붙였다.

“장기적 안목의 투자 필요”

대학에서 연구한 아날로그 센서 기술을 중소기업, 대기업 등으로 전파하기 위해 크레파스테크놀러지스를 창업한 김수환 서울대 전기정보공학부 교수. 그도 ‘선택과 집중’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정부 지원금에 매달려 근근이 버티는 ‘좀비 기업’들이 많다는 게 김 교수의 판단이다.

‘무늬만 비메모리 반도체’인 회사를 걸러내는 일도 중요하다고 했다. 그동안 비메모리 반도체 업계를 지원하기 위한 자금이 각종 소프트웨어, 바이오 업체들로 흘러들어가면서 정작 필요한 기업들이 혜택을 받지 못했다는 것이다.

장기적인 안목을 갖고 비메모리 스타트업에 투자하는 벤처 자본이 없다는 것도 문제점으로 지목했다. 김 교수는 “국내 벤처캐피털들은 투자를 받는 단계에서부터 양산 제품을 요구한다”며 “기술과 비전만 가지고도 대규모 투자를 받는 이스라엘, 미국, 중국과는 상황이 다르다”고 설명했다. 미국 AI 스타트업 너바나와 중국 AI 반도체 스타트업 호라이즌 로보틱스는 실물 반도체 없이 기술만으로 인텔을 비롯한 글로벌 기업들로부터 대규모 투자를 유치해 화제가 되기도 했다.

“팹리스도 생존 능력 키워야”

SK하이닉스 출신으로 시스템 반도체 업계의 ‘원로’로 꼽히는 허염 실리콘마이터스 대표(67)도 투자가 더 활발해져야 한다고 했다. 2007년 2월 직원 5명으로 실리콘마이터스를 창업한 그는 같은 해 6월 미국에 갔다가 글로벌 반도체 벤처캐피털인 월든 인터내셔널 대표를 만났다. 허 대표가 전력관리반도체(PMIC)를 만들겠다고 하자, 월든 인터내셔널 대표는 20분 만에 600만달러 투자를 결정했다. 제품 양산은 그로부터 2년 뒤에 이뤄졌다.

팹리스들이 스스로 경쟁력을 쌓지 못한 것도 문제라고 허 대표는 지적했다. 국내 팹리스들은 대부분 하나의 제품에만 강점이 있다. 그런데 반도체 기술이 발전하면서 여러 개 제품군이 하나의 칩으로 통합되는 추세다. 정보기술(IT)의 흐름을 읽고 기술력을 쌓아 카멜레온처럼 변신해야 한다는 게 허 대표의 생각이다. 액정표시장치(LCD)용 반도체 시장이 유기발광다이오드(OLED) 제품에 밀려 축소된 게 대표적이다.

실리콘마이터스는 2016년 OLED용 디스플레이구동칩(DDI) 기업 와이드칩스를 인수했다. 지난해에는 디스플레이 화면에서 소리가 나는 기술을 개발한 아이언 디바이스를 사들였다. 그는 “국내 팹리스 업계의 합종연횡이 활발하게 이뤄질 수 있도록 인수합병(M&A)에 세제 혜택을 주는 것도 한 방법”이라고 조언했다.

고재연/황정수 기자 yeon@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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