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자 칼럼] 6·25 전야처럼…

입력 2019-06-19 17:43  

고두현 논설위원


[ 고두현 기자 ] 1949년 6월 주한미군이 완전히 철수했다. 넉 달 뒤 중국 대륙이 공산화됐다. 1950년 1월에는 딘 애치슨 미국 국무장관이 “극동방위선에서 한국과 대만을 제외한다”는 ‘애치슨 라인’을 발표했다. 이에 고무된 북한 김일성은 전쟁 준비에 박차를 가했다. 한편으로는 평화 공세를 펼쳤다. 침략 계획을 은폐하고 남한의 경계태세를 허물기 위해서였다.

1950년 6월 7일 김일성은 ‘평화적 조국통일 호소문’을 발표했다. 해방 5주년을 맞아 8월 5~8일 남북한 총선거를 실시하고, 이를 논의하기 위해 6월 15~17일 남북 대표자 회의를 해주 또는 개성에서 열자는 것이었다. 6월 10일에는 북이 억류 중인 조만식과 남에 수감된 남로당 지도자 김삼룡·이주하를 교환하자고 제의했다.

6월 19일에는 ‘남북 국회에 의한 통일정부 수립’을 제안하며 21일 남북 국회 대표 회합을 하자고 했다. 이처럼 줄기찬 평화 공세에 남한은 빗장을 열었다. 23일 밤 전군의 비상경계령을 해제했고, 24일 토요일에는 장병 외출·외박과 농번기 휴가를 시행했다. 다음날 새벽 4시 북한은 전면 남침을 개시했다.

1953년 정전협정이 체결될 때까지 3년 동안 국토를 피로 물들인 6·25전쟁은 지금까지 ‘일시 정지’ 상태로 계속되고 있다. 그동안에도 북의 평화공세 때문에 군의 경계가 느슨해지는 일이 많았다. 2002년 ‘햇볕정책’ 와중에 제2 연평해전 사태를 맞았다. 2012년 북한군 병사가 우리 군 막사 문을 두드린 ‘노크 귀순’ 사건도 있었다. 2015년에는 북한군 병사가 최전방 감시초소(GP) 인근에서 하룻밤을 기다린 뒤 다음날 아침 철책을 흔들어 자신의 존재를 알리는 ‘1박 귀순’ 사태까지 발생했다.

이번에는 해상 경계선이 뚫렸다. 북한 주민 4명이 어선을 타고 동해상으로 넘어와 새벽까지 기다렸다가 삼척항에 접안해서는 “북에서 왔으니 휴대폰을 빌려달라”고 했다. 주민 신고를 접할 때까지 우리 군은 이를 몰랐다. 삼척은 1968년 무장공비 120명이 야음을 틈타 상륙했던 곳이다.

우리 군의 경계가 맥없이 무너지는 동안 북의 핵과 미사일 수는 늘어가고 있다. 진정한 군인이라면 정치인들이 평화를 외칠 때일수록 전쟁에 더욱 철저히 대비해야 한다. 히틀러의 평화 공세에 속았던 영국 총리 체임벌린은 2년 뒤 런던 대공습을 당했다.

kdh@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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