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익경기자가 만난 세계의 건강한 한국인-11] '뉴욕에서 활동하는 지휘자.음악가 유종씨'

입력 2015-10-06 09:19   수정 2015-10-06 15:32


[한국경제TV 장익경 기자] 뉴욕에서 작곡가로 활동하는 세계적인 지휘자.음악가 유종씨를 만나본다.국내보다는 해외에서 더욱 명성이 알려진 그는 런던 필하모니를 지휘했으며 러시아 출신의 박탕 조르다니아의 제자로 샹트 페테르부르크 지휘학파를 계승한 장본인이기도 하다.
문: 세계 문화의 수도인 뉴욕에서 활동하시는데 어떤 활동하시고 뉴욕만의 매력은 무엇인가요?
답: 어려서 지휘자가 되고 싶었는데, 지휘란 막연히 지휘봉을 휘두른다고 되는 것이 아니라서 작곡을 배웠습니다. 그러니까 작곡자가 되고 싶어서 작곡 공부를 한 건아니었습니다. 펜실베니아대학 (University of Pennsylvania)을 갔던 이유는 음악을 학구적으로만 전공을 할 수 있고 (즉, 연주전공이 없고) 소위 말하는 전위음악을 안 가르쳤어요. 젊은 학생의 주춧돌을 역사와 이론 등을 통해 탄탄하게 만들어 주는 것이 교육의 목표라고 생각하는 곳 이였습니다. 그러한 공부를 하고 지휘를 배울 준비가 되었다고 생각 했을 때, 실제로 지휘공부를 어떻게 해야 되는지 막연했습니다. 그때 지휘자 안드레 프레빈을 찾았는데, 그분의 조언과 소개장을 들고 뉴욕에 와서 니이렌버그 에게 사사를 하게 되었습니다.
뉴욕은 이전에 자주 방문하고 살기도 했었고, 첼로레슨도 받고 있었기 때문에 이미 고향같이 잘 알던 도시였습니다. 그러나 제일 중요한 것은, 20세기 후반의 뉴욕은 음악가로서 황홀한 곳 이였습니다. 유명하고 실력 있는 음악가의 연주회가 매일 여러 곳에 있었고, 쟁쟁한 유망주가 넘치고, 다양한 예술가가 실제로 거주하는 환상적인 도시 였습니다. 그리고 미국인 뿐만 아니라 전세계에서 유명, 무명한 음악가가 뉴욕을 찾아와 연주를 했습니다.
70년대 초반에 카라얀과 베를린 필하모닉을 처음 본 것도 카네기홀 이였고, 앤디 워홀은 길에서 두 번 이나 마주한적 도 있어요. 그때나 지금이나 관심 없는 인물이지만 싸인 이라도 받아 둘걸 하고 기억합니다.
그 당시 뉴욕은 자유민주주의가 허락하는 최고의 표현이 살아 있었어요. 물론 타지에서 보면 뉴욕은 더럽고, 위험하고, 위협적인 곳 이였지만, 예술이 살아 있는, 그리고 일상생활에 녹아있는, 그런 도시 였습니다. 이제는 많이 깨끗해 지고, 훨씬 더 안전한 도시로 탈바꿈을 했지만 (예를 들어 타임즈 스퀘어는 뉴욕토박이도 사진을 찍어대는 변형을 했습니다), 그것이 꼭 좋은 것만은 아닌 것 같습니다. 60년대와 70년대 뉴욕엔 지금은 찾아 볼 수 없는 여유가 있었습니다. 물론 그때도 바쁘게 정신 없이 돌아갔어요. 1969년에 뉴욕을 처음 방문했는데, 그 해는 미국역사상 정치적으로, 그리고 문화적으로, 상당히 중요한 전환점 이였습니다.
미국은 이민자들이 만든 나라이고, 뉴욕은 그런 사람들이 가지고 온 다양한 문화가 녹아 만들어진 미국의 서울이지요. (행정수도를 따로 워싱턴에 만든 것은 혁신적인 개념입니다.) 제가 10년동안 지휘를 배웠던 조르다니아도 소련서 망명해 뉴욕에 왔었어요. 제가 제일 존경하는 작곡가-피아니스트-지휘자 라흐마니노프도 소련서 망명해 뉴욕서 살았고, 근교에 그의 무덤이 있습니다. 그래서 거기도 자주 방문합니다. 문화의 다양성 뿐만 아니라 다양성을 포용하는 여유가 뉴욕엔 있습니다.
그리고 어려서 의도 하지 않았던 작곡, 그리고 부수로 생긴 편곡,을 합니다. 올해엔 필하모니 베를린 홀 에서 저의 곡이 초연 되었습니다. 작곡가로선 정말로 야심이 조금도 없었는데, 어찌하다 보니 그런 기회도 생기더군요.
그리고 전에 녹음한 CD는 계속 현재까지 음악계에서 관심을 가져주니 다행이라고 생각합니다. 지난 한달 사이에 새로운 평이 세가지나 팬페어 (Fanfare)지에 실렸는데 저의 해석과 흐름이 "완전히 자연적" ("entirely natural")이라고 써서, 적어도 저에게는 극찬으로 들렸습니다.

문:음악을 하시된 동기는 무엇인지?
답: 어려서 부터 음악에 특별히 관심이 있었어요. 세 살 때 이미 좋아하는 곡이 확실했고 네 살 때 좋아하던 작곡가 (그리고 싫어하던 작곡가)에 대한 의견은 아직까지 변함이 없습니다. 옆집에서 매일 하던 국악에도 익숙해 있었습니다. 그런데 제일 마음에 와 닿았던 것은 서양 음악 중 교향악단이 만들어 내는 음 이였습니다. 그리고 네 살 때 그런 음악을 지휘자가 이끌어 낸다는 것을 TV를 보고 알게 되었습니다. 토스카니니가 지휘하는 뉴욕의 NBC 교향악단 이었는데, 어찌나 힘들게 지휘하는지 "불쌍한 할아버지"라고 별명을 지었습니다. 커서 지휘자가 되고 싶다고 다섯 살 때 인터뷰를 한 것이 녹음으로 남아 있습니다. 그때나 지금이나 사실 지휘자체는 관심이 없어요. 어마어마하게 큰 음악가의 모임이 만들어 내는 음색, 표현의 규모와 다양성, 그리고 때때로 농축되어 생성되는 기 (흔히 그것을 감동이라고 말 하지요) .이런 것에 매료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지휘로 그러한 현상을 어떻게 만들어 내는지 연구하며 작곡과 지휘공부를 하게 된 겁니다.
문: 미국이나 유럽에서 오히려 더 유명하신데 동양인으로 그들의 세계에서 인정 받게 되고 아니 그들을 넘어선 수준을 보이셨습니다. 그 원동력이 무엇인지요?
답: 솔직해야 합니다. 동양인이 서양음악을 하기엔 육체적으로 불리합니다. 그러다 보니 정신적으로 오는 좌절과 경직이 몸과 마음을 다 지배하게 됩니다. 자신의 모자람을 보강하지 않고, 그것을 숨기려고만 하고, 막연히 강해지려고만 하면 좋은 결과가 나 올 수 없어요. 그리고 음악이 단순한 음의 나열이라고 생각하면 서양음악을 연주 할 수 없습니다. 서양의 발전은 체계적인 생각이 문화, 경제, 정치에 적용되며 만들어 지지 않았습니까? 작곡가의 경우, 르네상스 시대부터 곡에 작곡가의 이름이 붙 혀 지기 시작했어요. 그래서 그런 배경이 없는 동양음악인은 악기연주와 서양음악사 뿐만 아니라 서양 역사를 공부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한번은 런던서 연주 끝내고 뉴욕으로 가는 비행기 안에서 어떤 키 큰 승객이 지나가다가 저를 알아보고 말을 걸어 온 적 있어요. 아마도 영국 상류층 뿐만 아니라 귀족 이였던 같습니다. 이말 저말 하다가 홀스트의 합창교향곡 제1번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던 기억이 납니다. (참고로 합창교향곡 제2번은 없습니다.) "인정"이란 단어를 쓰기엔 부끄럽지만, 어째든 남들에게 인정을 받으려면, 그 세계의 기준이상이 되어야 하겠지요. 발돋음을 하면 기준이하밖에 안 됩니다.
문: 아버님께서 우리나라 헌법을 만드신 고.유진오 박사님이신데 정치가.소설가 등으로 유명하신데 아버님을 추억하신다면? 부모님께서 음악활동에 미친 영향은?
답: 어려서 저에게 아버님은 아버님이셨습니다. 대한민국 헌법을 기초하셨는지, 헌법학자가 아니라 소설가로 한때 더 유명하셨는지, 한번도 저에게 아버님께서 업적을 자랑스럽게 설명 하신 적이 없어요. 제가 궁금해서 질문을 하면 그 질문에 한하여 답을 주셨습니다. 바쁘셨지만 사랑을 듬뿍 주셨어요. 부모님 두분 다 기가 강하셨어요. 무력의 힘이 아닌, 부드럽고 강한 기(氣) 입니다. 엄하지만 합리적인 가르침으로 저를 키우셨습니다. 그리고 부모님의 가장 가까운 친구와 대화하듯 제가 6살 정도부터 됐을 때부터 말씀하셨습니다. 정치, 외교, 역사,문화 등 당연히 제가 알아 들을 것이라는 전제하에 대화를 하셨습니다. 저의 음악엔 그런 가정교육과 배경이 엄청난 영향을 끼쳤습니다. 앞서 말했듯, 저는 무대 중앙에 서서, 그리고 그것도 단 위에 우뚝 서서, 지휘하는 그 위치에는 관심이 없어요. 저의 지휘로 만들어지는 음악은 그저 표현의 도구일 뿐입니다. 저의 음악을 통해 청중이 동감을 한다면 그것은 기가 같이 공명을 했다는 말 이겠지요. 저의 부모님께서는 저의 마음가짐의 초석을 심어 주셨습니다.
문: 뉴욕에는 많은 세계적인 음악학교가 있고 수많은 한인 유학생들이 있는데 그들이 예술가로 성공하기 위한 조언을 해주신다면?
답: 유학생을 많이 봤고, 그 중 유명해진 사람도 여러 명 있습니다. 그러나 유명한 음악가와 훌륭한 음악가 사이엔 큰 차이가 있습니다. 예전엔 젊은 유학생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1류 음악가가 되려고 욕심부리지 말고, 1류 인간이 되도록 해라." 요새는 그런 말을 안 합니다. 음악계 수준은 근래에 수준 이하로 떨어졌지만 경쟁은 더 치열해 졌기 때문에 이제는 이렇게 말 합니다: "유명해 지고 싶은가, 아니면 순수한 예술가가 되고 싶은가? 유명해지고 싶으면, 세력 있는 선생님께 투자를 잘 해라. 실력하고 성공은 관계가 없다."
문: 한국 음악계도 표면적으로는 많은 발전을 한 것 같아 보입니다. 한국에는 왜 세계적인 오케스트라가 없을까요?
답: "표면적으로는 많은 발전"이란 표현이 한국의 문제점과 문제의 위험성을 잘 말해 주는 것 같습니다. 오케스트라를 보면 그 악단이 대표하는 도시, 혹은 국가의 문화뿐 아니라 정치와 경제 상황을 상징적으로 잘 보여줍니다. 오케스트라는 서양문화의 발명 중 어쩌면 최고 일지도 모릅니다. 100명이 넘을 수 있는 집단이 (합창단도 있다면 수 백 명) 어떻게 한 호흡으로 움직이며, 또한 필요 할 때만 개개인의 독창성도 한 마음 안에서 표현을 할 수 있을까? 제가 지휘하면서도 그 규모와 정교성에 감탄을 합니다. 물론 이 말은 좋은 연주를 할 때에 대한 표현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세계 최고"를 만들까? 우선 "세계 최고"라는 표현이 우습고, 그런 콤플렉스에서 벗어나길 간절히 원하지만 현실적으로 극복하기 힘든 일 입니다. 개개인이 "세계 최고"인 음악가를 모아놔도, 한 집단으로서 세계 최고가 되지 않습니다. 오케스트라의 묘미는 합주에 있는데, 그런 집단은 100명의 독주이지 100명이 한 사람같이 연주하는 합주가 안 돼기 때문에 오케스트라를 발전시키는 것은 힘든 일인 것 입니다.
지휘자는 바로 그런 목표를 향해 악단을 훈련 시켜줘야 하는데, 트레이닝 뿐만 아니라 지휘자는 좋은 지도자 역할을 해야 되겠죠. 독재자가 나라를 잘 이끌어 간다고, 자기 없이는 나라가 망한다고, 착각을 하듯, 지휘자 거의 대부분은 지휘봉으로 군림을 할 수 있다고 착각을 합니다. 곡이 끝나면 단 위에서 돌아서서 지휘자는 박수를 받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하거든요. 사실 음악은 거대한 교향악단이 만들었는데, 왜 연주 끝 날 때 까지 땀을 안 흘리냐는 질문을 저는 잘 받습니다. 저의 대답은 "저는 지휘한 것 밖에 없다"라고 말 합니다. 연주는 악단이 다 하지요. 그러면 연주 할 때 지휘자가 없어도 가능한가라고 질문합니다. 그렇지는 않습니다. 도로상에 운전을 잘하는 사람만 차를 몰게 했다 하더라도, 신호등이 꺼지는 순간 엄청난 사고가 날 겁니다. 운전실력이 좀 떨어져도 안전하고 신속하게 교통흐름이 생기는 것이 이상적이겠지요. "하면 된다"라는 개념으론 훌륭한 오케스트라가 만들어 지지 않습니다.
문: 한국 음악계가 발전을 위해 한마디 조언을 해주신다면? 쓴 소리도 좋습니다.
답: 예술이 얼마나 어려운지 그러한 의식이 없는 것이 안타깝습니다.일종의 장인정신의 결여라고 할까요? 예를 들어, 피아노는 손가락으로 치는 악기가 아닙니다. 한국식으로는 손가락만 돌리면 될 것이라는 사고방식이 있어요. 피아노는 서양음악이 만든 음악적 괴물입니다. 그러한 악기가 의미 있는 소리를 내려면, 그 괴물이 공명을 해야 됩니다. 피아니스트가 그 괴물과 공감을 가져야 비로서 공명 을 할 것이고, 그 소리가 청중을 감동 줄 수 있을 겁니다. 그러나 한국인 이미 그런 마음가짐을 안 가진자가 중요위치여 군림을 하며 많은 오염을 가져왔습니다. 어차피 서양엔 문화가 저녁노을에 다달은 위치에 가 있기 때문에, 이제는 서양이던, 동양이던, 한국이던, 순수한 예술을 추궁하기가 어렵다고 생각합니다. 해가 저무는데 아까운 시간에 이권싸움, 아귀다툼을 하고 있으면 내일 신선한 해가 다시 뜰 것이라는 당연한 희망도 사라지게 됩니다.
문: 대학시절 클럽에서 디제이도 하시는 등 다양한 장르를 넘나드는 음악을 하신 걸로 아는데 유독 클래식을 하시는 이유는? 하이레벨의 사람들을 위한 전유물처럼 사치스럽게 느껴지기도 하는데요. 클래식 음악을 즐기기 위한 팁을 주신다면?
답: 저는 좋은 음악을 좋아합니다. 대부분의 클래식 음악은 따분하고 재미 없어요. 아니, 대부분의 음악은 재미 없습니다. 장르와 상관없이 감동이 가는 음악이면 좋은 음악입니다. 서양 클래식 음악의 매력은 과학적--즉, 합리적--예술이기 때문입니다. 어떻게 보면 예술을 과학과 연결시킨다는 것이야 말로 설득력이 없는 생각으로 들릴 수 도 있겠으나, 예술이 설득력을 가지려면 합리적 이여야 합니다. 그래서 20세기 들어 서양에서 "전위예술"을 만들며 자멸의 길을 가게 된 것 같습니다. 추를 미로 만드는 것이 예술가의 일 입니다. 추를 추로 표현 하는 것은 누구 가 할 수 있습니다. 몸과 마음이 경직될수록 추와 미의 차이를 잘 모릅니다. 마음의 창이 열리면 미가 보이게 됩니다.
문: 음악계에 스승이나 라이벌이 있으신가요?
답: 저의 성격의 결함 중에 하나는 질투가 없는 것 입니다. 그래서 라이벌의식이 없어요. 저의 지휘선생님 조르다니아에게 이런 말을 한 적이 있어요. "아마도 당신은 제가 지휘를 제대로 배울 수 있게 라흐마니노프가 천당에서 움직여 줘서 소련서 망명할 수 있었고 저를 만나게 만든 것 같다"라고 했더니 "그 말도 설득력이 있다"라고 대답 하시더군요. 라프마니노프 음악을 이해하거나 의미 있게 연주하기가 어려운데, 그 이유는 이 작곡가의 선율과 화음이 너무나 아름답기 때문입니다. 표면적 미(美) 밑에 깊은 인생철학이 깔려있다는 점을 파악하기가 어렵거든요. 제가 태어나기 좀 전에 돌아가셨지만, 음악을 통해 라흐마니노프는 저에게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조르다니아는 그러한 표현을 할 수 있게 지휘의 모든 기술을 가르쳐 줬어요. 마지막으로 카라얀은 저에게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지휘자의 비밀은 리허설에서 다 보이기 때문에 카라얀은 누구도 허락 없이 그의 리허설을 못 보게 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용감`하게 리허설 참관을 허락해 달라고 요청했고, 선뜻 카라얀은 승락을 줬습니다. 그래서 3년간 필하모니 베를린 홀에서 카라얀의 리허설을 볼 수 있었습니다. 황홀했어요. 어떤 때 정말로 저 한 명 만 위해 카라얀이 베를린 필하모닉을 지휘하는 모습같이 보였습니다.
문: 음악회에 시간은 어떤 일을 주로 하시나요?
무술 두 가지를 합니다. 무술을 보통 폭력적이라고 착각하는데, 반대로 평화는 공짜로 형성되지 않습니다. 그리고 주먹질 하는 것은 무술이 아닙니다. 진짜 무술의 기술은 진짜 음악의 기술과 똑같습니다. 근육 쓰는 것도 똑같고, 마음가짐 또한 똑같습니다. 어려서 부 터 무술을 배우고 싶었는데, 기회가 안 되어 50살에서야 무술을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아마도 무술로 고수는 안 될 겁니다. 그러나 고수의 소위 말하는 "비밀기술"은 많이 알고 있습니다. 음악을 50년 이상 하며서 터득한 것이 있으니까요!
문: 앞으로 뉴욕을 중심으로 많은 활동이 기대됩니다. 한국인으로 전세계 예술계에 큰 족적을 남겨 주실 것을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끝으로 앞으로의 계획을 좀 말씀해주시겠습니까?
답: 지휘자로서 활동하기가 어려운 이유는 지휘자의 `악기`가 거대한 교향악단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지휘자가 초보일 때가 제일 힘들어요. 연주자는 혼자서 연습하며 실수를 거듭하며 주법을 배웁니다. 지휘자는 처음부터 완성품을 보여야 하거든요. 악단을 지휘자의 연습용 악기로 쓸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제 저는 이제까지의 경험을 토대로 어느 정도 완성되어 가고 있는 모습을 보이고 싶습니다. 전 세계적으로 오케스트라는 재정적으로 어려운 시기라, 예술 보다는 음악이란 규격제품을 찍어내기 바쁜 시대이거든요. 제가 추궁하는 예술을 함께 하기를 원하는 예술가의 모임을 찾는 게 꿈입니다. (현장인터뷰 강효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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