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헌식 칼럼] 엄마를 부탁해, 냉장고를 부탁해, 아빠를 부탁해… 부탁해 봇물!

입력 2015-08-29 08:40   수정 2015-09-04 00:09

▲ 주말드라마 ‘부탁해요, 엄마’의 유진(사진 = KBS)


요즘 대중문화를 보면 ‘부탁해’라는 단어가 눈에 곧잘 들어온다. 엄마를 부탁해, 냉장고를 부탁해, 그리고 아빠를 부탁해는 소설이나 방송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제목이다. 이런 제목은 다른 방송 프로그램에도 영향을 주고 있는 듯하다.

‘마이리틀텔레비전’에는 ‘옷장을 부탁해’라는 말이 나왔다. 또한 케이블방송 패션앤에서는 ‘화장대를 부탁해’라는 제목도 있었다. 청년취업프로젝트인 ‘내일을 부탁해’도 있다. ‘엄마를 부탁해’라는 소설과는 달리 ‘부탁해요, 엄마’라는 주말 드라마도 방영되고 있다. 비슷한 말로 영수증을 부탁해, 건강을 부탁해, 살림을 부탁해 등등이 있다.

‘부탁해’는 다른 누군가에게 부탁을 할 때 쓰는 말이다. 부탁한다, 부탁합니다보다는 부드럽다. 요구를 완곡하게 부탁한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이런 말을 듣는 사람들은 상대방의 부탁을 들어주어야할 듯싶다. 친한 사이에 오가는 말에 더 가깝기 때문에 그렇다.

그런데 이 말을 흔하게 들을 수 있는 것 같지만, 실제로는 이렇게 부탁할 사람이 많지 않은 현실을 반영하기도 한다. 또한 스스로 자신이 책임지겠다는 능동적인 태도와는 거리가 멀기 때문에 이런 제목이 유행하는 것이 다른 이유가 무엇인지 생각해보게 한다. 내가 해줄게가 아니라 다른 누군가에게 부탁을 하고 있는 사회적 현상이 있을 수밖에 없다.

부탁해는 어떻게 보면 다른 이에게 위임하는 심리를 나타내고 있다. 위임의 필요성은 다분하다. 복합성과 다양성의 사회가 됐기 때문이다. 과거사회보다 현대는 그 분야는 다양해졌다. 이 때문에 한사람이 일상을 처리할 수 없는 복잡한 사회가 됐다.

무엇보다 사람들의 욕망은 더욱 커졌다. 그러나 쉽게 그 욕망을 채울 수는 없다. 기대수준은 높아지고, 스스로 그것을 충족시키기는 어렵다. 이 때문에 다른 누군가 그것을 채워줄 사람이 필요해 보인다. 더구나 싱글족의 증가는 누군가 부탁할 사람을 생각하게 만든다. 혼자 모든 것을 처리해야 하는 상황이 싱글들에게 주어졌다. 택배를 받을 사람이 없어 곤란한 지경이니 편의점에서 받아주면 고마울 따름이다.

▲ ‘냉장고를 부탁해’(사진 = JTBC)


가족 간에도 마찬가지다. 서로 떨어져 있으니 서로 보듬어 살 수 있는 여지가 많지 않다. 익숙하고 친한 듯하지만 서로를 잘 모르기도 할 뿐더러 전통사회의 관점에서 보면 가족인지 조차 의심스럽다. 하지만 그래도 가족의 책임을 일정정도 하려다보니 자신은 못하지만 누군가에게 엄마를, 아빠를 부탁한다. 거꾸로 엄마, 아빠에게 아직도 뭔가를 부탁하고 싶은 마음도 여전하다.

부탁한다는 것은 거래의 개념과는 거리가 있다. 반대의 지점에 위치하고 있는 듯싶다. 뭔가 대가를 주고 일을 시키는 점과는 다른 분위기인 것이다. 친분이 내포돼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현실에선 대가를 줘야 한다.

사실 그 대가를 주는 현상을 벗어나고, 싶은 점을 대중문화가 윤색해 가공하고 있는지 모른다. 방송프로그램에서는 친절하게 무료로 모든 지식과 정보, 노하우를 전해주는 듯싶다. 그런 존재가 옆에 항상 존재하면 얼마나 좋을까. 하지만 스스로 그런 존재가 되기에는 바쁘고, 귀찮은 것일까.

부탁해에 들어 있는 심리는 책임전가라는 점을 간과할 수도 없다. 어떻게 보면, 겸양의 자기중심적인 사고에서 나온 말이다. 자신이 스스로 끝까지 책임지겠다는 것이 아니라 누군가에게 책임을 미루고 있기 때문이다. 엄마와 아빠를 끝까지 책임지겠다고 말하는 사람은 아마 찾기 힘들 것이다. 단지 화목한 삶을 위한 조치를 책임지겠다는 것만이 아니라 삶을 부양하겠다는 생각은 소멸했다. 사물 즉, 요리나 옷장을 영원히 끝까지 곁에 두겠다는 사고도 마찬가지다.

또한 부탁해는 전망이 불투명한 사회에서 무기력을 스스로 증명하고 있는 말이다. 예컨대, 내일을 부탁하는 것은 우리 스스로의 주체적인 힘으로 열어갈 수 없는 불가항력의 상황을 내포하고 있다. 누군가 이 상황을 헤어나오 게 할 수 있는 존재를 원한다. 하지만 황당한 영웅이나 백마 탄 기사를 원하기에 사람들은 현실적이 됐다.

그렇다면, 해법은 결국 서로에게 부탁하며 잘할 수 있는 것을 서로에게 도움이 되도록 상생하는 방법을 찾는 것이 아닐까. 개인의 힘으로 돌파할 수 없는 상황이라면 말이다.

김헌식 대중문화평론가(동아방송예술대학 교수)

※ 외부 필진의 의견은 본지의 편집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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