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혼자의 해외 유학은 자신 뿐 아니라 배우자와 자녀들도 외국에서의 색다른 생활을 경험하게 한다.
물론 나의 경우는 1년 반 가까이 가족과 떨어져 지내다 마지막 학기를 남겨두고서야 처자식을 상봉하는 남다른 경우였지만 말이다.
어느 날 밤 늦게 어느 정도 건강을 회복한 아내가 "애들 데리고 곧 갈게."라고 걸어온 전화에 얼마나 기쁘고 흥분했던지 모른다.
''Out of sight, out of mind''라지만, 당시 나에게는 전혀 해당되지 않았다.
초등학교에 갓 들어간 아들과 유치원에 들어간 딸을 몸이 아픈 아내에게 맡기고 혼자 외국에 나와 있어 더욱 미안하고 또 그리웠던 내 가족이 드디어 내 곁으로 온다니!
가족들을 맞이할 준비를 본격적으로 시작했다.
많은 사람들이 드나들어 말할 수도 없이 지저분해진 집안을 말끔이 대청소했다.
방안 구석구석에 쌓인 먼지는 청소기로 빨아들이고, 이불은 집밖으로 들고나와 탁탁 털어 햇볕에 말리는 등 부산을 떨었다.
또 아내와 애들이 좋아할 만한 생선이나 과일, 케익과 과자를 사왔다.
한국에서 함께 살 때엔 미처 잘 몰랐는데 때로는 멀리 떨어져있어야 뭐든 소중함을 아는 모양이다.
아내와 아이들을 공항에서 만나자마자 반가움에 그들을 두 팔 벌려 안고 볼을 부비는 등 TV 드라마에서나 나올법한 장면을 연출하기도 했다.
곧 애들이 다닐만한 학교를 수소문하고 이런저런 정보 수집, 탐문에 열을 올리는 내 모습을 보던 동기들은 "가족이 느지막이 오니까 정말 좋은 남편, 아빠 되셨네."라며 놀림 반, 축하 반으로 격려했다.
와튼 유학은 새로운 다양한 것들을 경험해보고 스스로를 돌아봄과 동시에 가족, 특히 아이들에 대해 깊이 생각하게 하는 계기도 됐다.
우리나라에서는 자식을 두고 피붙이니, 쏙 빼 닮았느니 하며, 부모-자녀를 일심동체 혹은 자녀를 부모 의사대로 행동하는 분신으로 여기는 사고가 잠재되어 있는 것 같다.
자녀란 품에 있는 동안에는 최선을 다해 잘 기르고 그 후에는 독립된 인격체로서 사회로 내보내야 함에도 불구하고, 자녀가 혹 내가 원하는대로 하지 않으면 답답해하고 심지어 화를 내기도 한다.
나 역시 아들과 딸을 나의 분신이자 몸의 일부로 생각했다.
입학절차를 마치고 얼떨떨해하는 아들을 격려한답시고 "세훈아, 겁낼 것 없어. 어릴 땐 머리가 말랑말랑해서 스펀지처럼 뭐든 잘 흡수하니까 금새 영어에 익숙해질거야. 한국 남아의 기개를 보여줘라." 호기스럽게 얘기했다.
아내 역시 "엄마랑 매일 비디오테이프 틀고 공부할 거니까 걱정할 것 없어."라고 거들었다.
두 달쯤 지났을까. 아이가 다니는 학교에서 학부모 수업 참관이 있다기에 참석했다.
선생님은 한명씩 이름을 불러가며 질문을 하고 아이들이 대답을 하는 방식으로 수업을 진행하셨다.
아들 세훈이도 자기 차례에서 질문을 듣고 대답을 잘 해서 어찌나 기특했는지......
게다가 수업이 끝나고 선생님을 뵙고 상담을 할 때에도 아이가 적응을 잘하고 있다기에 그런 줄로만 알았다. 그러나 꼭 그런 것만도 아니었다.
그날 밤이었다. 거실에서 다음날 강의를 준비하며 과제하느라 정신없는데, 갑자기 방에 있던 아내가 큰 소리로 나를 찾는 것이었다.
방으로 뛰어가보니 아들 녀석이 끙끙거리며 알아들을 수 없는 소리로 신음하고 있었다.
''얘가 아픈건가, 아니면 악몽을 꾸는건가?'' 다시 잠에 들도록 아이를 안고 한참을 다독였다.
이튿날 아침에 "세훈이 어디 아프니, 아니면 뭐 힘든 게 있니?"라고 물었다.
그랬더니 아이가 그간 학교에서 의사소통이 안돼 엄청난 스트레스를 받았다는 것이다.
순간 아차 싶었다. 그제서야 십 수년 동안 영어를 배우고도 나 역시 강의와 과제때문에 지독히 스트레스를 받았던 일들이 머릿 속에 스쳐 지나갔다.
심지어 영어 교육은 한 번 제대로 받아보지 못한 어린애였는데, 어릴수록 새로운 언어를 빨리 습득할 수 있다고만 생각하고 특별히 관심조차 두지 않았던 게 미안했다.
물론 일찍이 영어를 구사하는 환경에 접했던 점이 도움이 되기도 하겠지만, 어쩌면 이 때 경험이 트라우마가 되어 갑작스런 환경 변화를 두려워하는 사람이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이 일로 인해 나와 아내는 아무리 바빠도 애들과 대화를 자주하고, 아이들이 우리 부모와는 엄연히 다른 인격체임을 깨닫게 됐다.
누가 자식 키우는 것을 자식농사라 했나? 정말 적절한 표현이다.
농사는 농군만 열심히 한다고, 또 농군이 원하는대로 짓는다고 잘 되는 것은 아니다.
때에 따라 비도 오고 햇볕도 적절히 받아야 한다.
자신이 할 수 있는 만큼은 매 순간 최선을 다하고, 그 후에는 하늘을 보고 기원하고 또 그 다음을 기다릴 줄도 알아야 한다.
자식에 대한 부모의 마음과 역할도 그래야 한다.
<글. 정유신 한국스탠다드차타드증권 대표이사>
물론 나의 경우는 1년 반 가까이 가족과 떨어져 지내다 마지막 학기를 남겨두고서야 처자식을 상봉하는 남다른 경우였지만 말이다.
어느 날 밤 늦게 어느 정도 건강을 회복한 아내가 "애들 데리고 곧 갈게."라고 걸어온 전화에 얼마나 기쁘고 흥분했던지 모른다.
''Out of sight, out of mind''라지만, 당시 나에게는 전혀 해당되지 않았다.
초등학교에 갓 들어간 아들과 유치원에 들어간 딸을 몸이 아픈 아내에게 맡기고 혼자 외국에 나와 있어 더욱 미안하고 또 그리웠던 내 가족이 드디어 내 곁으로 온다니!
가족들을 맞이할 준비를 본격적으로 시작했다.
많은 사람들이 드나들어 말할 수도 없이 지저분해진 집안을 말끔이 대청소했다.
방안 구석구석에 쌓인 먼지는 청소기로 빨아들이고, 이불은 집밖으로 들고나와 탁탁 털어 햇볕에 말리는 등 부산을 떨었다.
또 아내와 애들이 좋아할 만한 생선이나 과일, 케익과 과자를 사왔다.
한국에서 함께 살 때엔 미처 잘 몰랐는데 때로는 멀리 떨어져있어야 뭐든 소중함을 아는 모양이다.
아내와 아이들을 공항에서 만나자마자 반가움에 그들을 두 팔 벌려 안고 볼을 부비는 등 TV 드라마에서나 나올법한 장면을 연출하기도 했다.
곧 애들이 다닐만한 학교를 수소문하고 이런저런 정보 수집, 탐문에 열을 올리는 내 모습을 보던 동기들은 "가족이 느지막이 오니까 정말 좋은 남편, 아빠 되셨네."라며 놀림 반, 축하 반으로 격려했다.
와튼 유학은 새로운 다양한 것들을 경험해보고 스스로를 돌아봄과 동시에 가족, 특히 아이들에 대해 깊이 생각하게 하는 계기도 됐다.
우리나라에서는 자식을 두고 피붙이니, 쏙 빼 닮았느니 하며, 부모-자녀를 일심동체 혹은 자녀를 부모 의사대로 행동하는 분신으로 여기는 사고가 잠재되어 있는 것 같다.
자녀란 품에 있는 동안에는 최선을 다해 잘 기르고 그 후에는 독립된 인격체로서 사회로 내보내야 함에도 불구하고, 자녀가 혹 내가 원하는대로 하지 않으면 답답해하고 심지어 화를 내기도 한다.
나 역시 아들과 딸을 나의 분신이자 몸의 일부로 생각했다.
입학절차를 마치고 얼떨떨해하는 아들을 격려한답시고 "세훈아, 겁낼 것 없어. 어릴 땐 머리가 말랑말랑해서 스펀지처럼 뭐든 잘 흡수하니까 금새 영어에 익숙해질거야. 한국 남아의 기개를 보여줘라." 호기스럽게 얘기했다.
아내 역시 "엄마랑 매일 비디오테이프 틀고 공부할 거니까 걱정할 것 없어."라고 거들었다.
두 달쯤 지났을까. 아이가 다니는 학교에서 학부모 수업 참관이 있다기에 참석했다.
선생님은 한명씩 이름을 불러가며 질문을 하고 아이들이 대답을 하는 방식으로 수업을 진행하셨다.
아들 세훈이도 자기 차례에서 질문을 듣고 대답을 잘 해서 어찌나 기특했는지......
게다가 수업이 끝나고 선생님을 뵙고 상담을 할 때에도 아이가 적응을 잘하고 있다기에 그런 줄로만 알았다. 그러나 꼭 그런 것만도 아니었다.
그날 밤이었다. 거실에서 다음날 강의를 준비하며 과제하느라 정신없는데, 갑자기 방에 있던 아내가 큰 소리로 나를 찾는 것이었다.
방으로 뛰어가보니 아들 녀석이 끙끙거리며 알아들을 수 없는 소리로 신음하고 있었다.
''얘가 아픈건가, 아니면 악몽을 꾸는건가?'' 다시 잠에 들도록 아이를 안고 한참을 다독였다.
이튿날 아침에 "세훈이 어디 아프니, 아니면 뭐 힘든 게 있니?"라고 물었다.
그랬더니 아이가 그간 학교에서 의사소통이 안돼 엄청난 스트레스를 받았다는 것이다.
순간 아차 싶었다. 그제서야 십 수년 동안 영어를 배우고도 나 역시 강의와 과제때문에 지독히 스트레스를 받았던 일들이 머릿 속에 스쳐 지나갔다.
심지어 영어 교육은 한 번 제대로 받아보지 못한 어린애였는데, 어릴수록 새로운 언어를 빨리 습득할 수 있다고만 생각하고 특별히 관심조차 두지 않았던 게 미안했다.
물론 일찍이 영어를 구사하는 환경에 접했던 점이 도움이 되기도 하겠지만, 어쩌면 이 때 경험이 트라우마가 되어 갑작스런 환경 변화를 두려워하는 사람이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이 일로 인해 나와 아내는 아무리 바빠도 애들과 대화를 자주하고, 아이들이 우리 부모와는 엄연히 다른 인격체임을 깨닫게 됐다.
누가 자식 키우는 것을 자식농사라 했나? 정말 적절한 표현이다.
농사는 농군만 열심히 한다고, 또 농군이 원하는대로 짓는다고 잘 되는 것은 아니다.
때에 따라 비도 오고 햇볕도 적절히 받아야 한다.
자신이 할 수 있는 만큼은 매 순간 최선을 다하고, 그 후에는 하늘을 보고 기원하고 또 그 다음을 기다릴 줄도 알아야 한다.
자식에 대한 부모의 마음과 역할도 그래야 한다.
<글. 정유신 한국스탠다드차타드증권 대표이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