칠색 깃발과 전통의상…볼리비아 거리 뒤흔드는 원주민들의 분노

입력 2019-11-15 22:30  

칠색 깃발과 전통의상…볼리비아 거리 뒤흔드는 원주민들의 분노
원주민 출신 모랄레스 퇴진에 농촌 저소득층 원주민들 박탈감 증폭
"원주민 정체성 존중해야"…야권, 원주민 분노 달래기



(라파스=연합뉴스) 고미혜 특파원 = "'위팔라'를 존중해 달라. '포예라'를 존중해 달라"
볼리비아 수도 라파스에서 14일(현지시간) 오후 열린 모랄레스 지지자들의 시위에는 '모랄레스'라는 단어보다 낯선 현지어가 섞인 구호가 더 많이 들렸다.
'위팔라'(wiphala)는 빨강, 주황, 노랑, 초록, 파랑, 보라, 하양 일곱 가지 색깔의 격자 무늬깃발로, 볼리비아 원주민들을 상징하는 깃발이다.
'포예라'는 원주민 여성들이 입는 풍성한 전통 치마를 가리킨다.
자신들의 깃발과 의상을 존중해 달라는 요구는 곧 자신들의 정체성과 존엄성을 인정해 달라는 외침이었다.
성난 원주민들을 거리로 불러낸 것은 2006년 볼리비아 첫 원주민 대통령인 에보 모랄레스의 불명예스러운 퇴진이었다.
중남미 대표적인 좌파 지도자였던 모랄레스는 지난달 20일 대선에서 조작을 시도했다는 의혹 속에 지난 10일 물러나 곧장 멕시코로 망명했다.
현재 우파 야당의 자니네 아녜스가 임시 대통령으로 취임한 후 새 대선을 준비 중이다.
시위에 나선 원주민들은 모랄레스의 복귀와 아녜스의 퇴진을 요구했지만, 그들의 분노는 정치적인 차원을 넘어선 듯했다.

다민족 국가인 볼리비아에선 케추아, 아이마라, 치키타노 등 원주민들이 인구의 60%를 차지한다.
인구의 다수이긴 하지만 다른 중남미 국가들과 비슷하게 여전히 농촌 지역 빈민의 대부분이 원주민이고, 2006년에야 원주민 대통령이 등장했을 정도로 사회 지도부의 비율은 낮다.
오래 소외감과 박탈감을 느껴온 원주민들에게 아이마라족 가난한 농가 출신 모랄레스의 등장은 획기적인 사건이었다.
그가 60%가 넘는 높은 득표율로 3선 연임에까지 성공한 데엔 탄탄한 원주민 지지층이 큰 힘이 됐다.
모랄레스는 전임 지도자들이 신경 쓰지 못한 원주민들의 권익을 위한 정책을 폈고, 실제로 모랄레스 취임 이후 원주민들의 삶은 어느 정도 나아졌다. 2006년 38%에 달했던 볼리비아 극빈층 비율은 지난해 17%로 절반 이상 줄었다.
볼리비아 국기, 국가, 문장 등과 더불어 위팔라도 국가의 상징이라고 헌법에 명시한 것도 모랄레스 정권에서였다.
오래 억눌렸던 원주민들의 박탈감을 달래기엔 모랄레스 집권 14년도 부족한 듯했다. 그들은 모랄레스가 쫓겨나듯 물러난 후 다시 빈민들과는 거리가 먼 우파 인사들이 정부를 장악할 것을 우려했다.
시위대에서 만난 아나라는 여성은 "볼리비아 국민 모두가 (야권 후보) 카를로스 메사를 뽑은 건 아니다. 모랄레스를 뽑은 이들도 많은데 그 표가 모두 무시됐다"며 "원주민도 도시 시민도 모두 볼리비아인이다. 차별해선 안된다"고 호소했다.

모랄레스 퇴진 직전 대선 불복 시위가 격화하는 과정에서 불복 시위에 합류한 경찰들이 제복에 붙은 위팔라를 떼서 태운 것도 원주민들을 자극했다.
불태워진 위팔라를 본 원주민들은 모랄레스와 함께 원주민의 정체성까지도 부정당한 느낌을 받은 듯했다.
"제발 위팔라를 존중해달라"고 말하는 원주민들은 금세 감정이 격해져 목소리를 높이고 눈물을 글썽였다.
카메라를 들고 전 세계 시위 현장을 자주 찾는다는 한 미국인은 "이렇게 화가 난 시위대는 처음 봤다"고 했다.
시위에 자주 등장하는 또다른 구호는 "경찰은 어디 있느냐. 언론은 어디 있느냐"는 것이었다.
경찰은 시위대 탄압에만 앞장서고 볼리비아 국내 언론은 모두 우파에 넘어가 원주민들의 소리를 들으려 하지 않는다고 시위대는 외신 기자들을 둘러싸고 호소했다.
박탈감과 분노가 커질수록 원주민과 비원주민, 농촌과 도시, 좌와 우의 갈등도 심화했다.
임시 대통령 아녜스가 구성한 과도 내각엔 초반에 원주민 출신이 한 명도 없었다. 원주민들은 아녜스가 '인종차별주의자'라고 비난했다.

논란이 거세지자 아녜스는 14일 오후 5명의 새 임시 장관을 추가 임명하면서 아이마라 원주민 출신의 여성 마르타 유흐라를 문화관광부 장관에 앉혔다. 그는 포예라를 입고 전통 모자를 쓴 채 취임 선서를 했다.
새 경찰 수장은 일부 경찰이 위팔라를 태운 데 대해서도 사과했다.
14일 밤늦게 아녜스의 과도 정부와 모랄레스가 이끌던 여당 사회주의운동(MAS)이 새 선거를 치르는 데 어느 정도 합의점을 찾으면서 혼란스러운 정국 해소에도 실마리가 마련됐다.
15일 라파스에서 대규모 원정 시위를 예고한 원주민들도 언젠가는 다시 일상으로 돌아갈 수도 있다.
그러나 쉽게 해소되지 않을 듯한 원주민의 분노와 박탈감, 더욱 깊어진 볼리비아 국민 간의 분열은 언제라도 다시 볼리비아를 혼돈으로 몰아넣을지 모를 잠재적 요인으로 남아 있다.
mihye@yna.co.kr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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