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태완의 데스크 시각] 법원 '셀프 개혁'의 한계

입력 2018-11-04 17:42  

김태완 지식사회부장


[ 김태완 기자 ] 사업하는 지인이 재판을 받게 됐다. 혐의는 누가 봐도 중하지 않았다. 변호사도 처음엔 기껏해야 벌금형이라고 장담했다. 그러나 지인은 억울했다. 재판에서 혐의를 부인했다. 하지 않은 일을 했다고 할 수는 없었다. 그러자 사태가 꼬이기 시작했다. 검사와 재판장이 “반성하지 않는다”고 강하게 압박했다. 변호사는 혐의를 인정해도 벌금형인데, 재판장 심기를 건드렸다가는 실형을 살 수도 있다고 했다. 혐의를 인정하고 용서 비는 게 나은 전략이라고 조언했다. 실형을 받으면 사업에도 큰 차질이 빚어질 판이었다. 결국 지인은 변호사 조언을 받아들여 혐의를 인정했다.

그런데 재판장은 “혐의를 부인하더니 뒤늦게 인정해 죄질이 불량하다”며 징역형인 집행유예와 사회봉사 명령을 선고했다. 지인은 너무 억울해 항소하겠다고 했다. 변호사는 “1심 진술을 번복하면 더 큰 형량을 받을 수 있다”고 만류했다. 지인은 “봉사활동을 할 때마다 내가 파렴치범이 된 것 같아 자괴감을 느낀다”고 했다.

변호사들도 "재판 불공정하다"

최근 사회적 통념에서 벗어난 법원 판결이 적지 않은 이슈가 됐다. 가벼운 성추행 초범이 법정구속되고, 성폭행한 현행범은 집행유예로 풀려나 사회적 공분을 샀다. 원고 또는 피고 진술만으로 유무죄를 판단해 억울함을 호소하는 청원이 인터넷 게시판을 달궜다. 그때마다 지인이 떠올랐다. 그 역시 죄형법정주의나 무죄추정원칙을 무시한 재판관에 대해 분을 삭이지 못했다.

재판관의 상식을 벗어난 ‘고무줄 재판’은 어제오늘 일이 아니다. 법을 알고 재판을 가까이서 지켜보는 변호사 중 72%가 “형사재판이 공정하지 않다”(지난해 6월 대한변협 조사)고 답한 충격적인 결과도 있다. 지난달 ‘국민과 함께하는 사법발전위원회’ 조사 결과 판·검사(판사 13.3%, 검사 15.9%)도 “전관예우 변호사를 선택하면 기소 여부와 재판 결과가 달라질 수 있다”고 답했다. 재판 결과에 따라 운명이 갈리는 일반 국민 입장에선 황당한 일이다.

‘사법 불신’이 만연하지만, 사법부가 이를 개선할 수 있을지는 회의적이다. 김명수 대법원장은 올해 초 신년사에서 “투명하고 공정한 재판, 정의의 원칙에 부합하는 올바른 판결을 바라는 국민의 바람과 요청을 가슴 깊이 근본으로 새기겠다”며 “누구나 쉽게 접근해 정의의 선언을 받을 수 있고, 소송에 진 사람도 깨끗이 승복하는 충실한 재판이 되도록 노력하겠다”고 했다.

판결문도 공개 안 하는 법원

그러나 지난 1년 동안 그가 말하는 ‘충실한 재판’은 행정 권력의 개입을 줄이고 법관 인사를 개편하는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적폐를 청산하고 법관의 독립성을 강화하는 게 중요한 요소지만, 법률서비스적 관점에서 법원 문턱을 낮추고, 더 공정한 재판을 위한 제도적 개선을 하려는 노력은 별로 보이지 않는다. 예를 들어 법원은 재판의 신뢰성을 평가할 기초 자료인 판결문조차 공개하지 않는다. 개인정보 보호가 이유라지만 실제 그렇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별로 없다. 법관은 판결에 대해 민사책임을 지지 않으므로 인사평가제도라도 개선해야 한다는 요구가 오래전부터 나왔지만 법원은 “독립성을 침해할 수 있다”며 요지부동이다.

얼마 전 오진으로 환자의 목숨을 잃게 한 의사가 구속됐다. 의사협회는 이를 ‘사법 만행’으로 규정하고 총파업하겠다고 선언했지만 여론은 싸늘하다. 법원은 “의사가 주의 의무를 다하지 않았고, 경각심을 위해서라도 구속이 불가피하다”고 설명했다. 법관이 주의 의무를 다하지 않으면 어떻게 해야 할까. 책임을 물을 수 있을까. 언제까지 사법부의 ‘셀프 개혁’에만 목을 매고 있어야 하는지 갑갑할 따름이다.

twkim@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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