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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성호 기자의 열려라! 우리말] '아라사'와 '소련'으로 엿보는 우리말 뒤안길 2023-02-13 10:00:16
없고 ‘나선정벌’이란 역사용어로 올라 있다. 나선정벌은 효종 5년(1654)과 9년(1658) 두 차례에 걸쳐 중국 청나라 요청으로 러시아를 친 싸움을 말한다. 음역어는 나선이나 로서아처럼 대개 발음이 비슷해 금세 관련성을 알아볼 수 있다. 그런데 아라사는 발음만 갖고는 러시아를 연상하기 힘들다. 중국에선 러시아를 왜...
동맹들에 "지켜줄테니 세금 내라"…페르시아 꺾고 '괴물'이 된 아테네 2022-06-08 17:53:12
나고 괘씸하기도 해서 다리우스는 아테네 정벌을 결심한다. 물론 전쟁 안 하고 협박으로 굴복시킬 수 있다면 최고다. 기원전 491년 페르시아는 그리스 본토의 도시국가에 사절단을 보낸다. 항복의 의미로 흙과 물을 보내라고 요구했는데 아테네는 재판 후 사형, 스파르타는 재판도 생략하고 우물에 전령을 던져버렸다. 미운...
[윤명철의 한국, 한국인 이야기] 해적질하던 왜구들 국제환경에 빠르게 적응, 다국적 무역상 변신…동남아까지 활동 범위 넓혀 2022-05-16 10:00:26
대마도 정벌로 인해 전기 왜구는 역사에서 사라졌다고 본다. 이후 조선은 대마도 주민들과 왜구에게 많은 혜택을 주면서 강온양면 정책을 폈다. 하지만 왜구는 1510년 삼포왜란, 1544년 사량진(부산) 왜변, 1555년에는 을묘왜변(강진·진도·영암)을 도발했다. 조선왕조실록에는 왜구가 침략한 내용이 312건이나 나온다. 이...
[윤명철의 한국, 한국인 이야기] 대마도주 항복 받긴 했지만 전투다운 전투 없이 철군, 미온적 대응으로 해양포기…훗날 임진왜란 참사 겪어 2022-05-09 10:01:01
항복 의사를 전달했다. 이종무는 정벌을 성공적인 것으로 규정하고 7월 3일 대마도에서 철군했다. 불과 15일 동안의 작전이었다. 제대로 된 전투가 이뤄지지 않았고 전리품도 빈약한 대규모 해외 원정이었다. 만약 현장 사령관인 이종무가 조선을 겨누는 비수인 대마도를 점령한 뒤 일본 본토의 혼란을 이용해 영토로...
[윤명철의 한국, 한국인 이야기] 160여년간 조선 괴롭힌 왜구 토벌하기 위해 '상왕' 태종 명령으로 대마도 정벌에 나서지만… 2022-05-02 10:00:50
‘대마도 정벌론’이 제기됐다. 그러나 일부 세력의 반대가 있었고, 조선 내부적으로도 권력투쟁을 끝낸 태종이 세종에게 양위한 지 몇 달 안 된 불안정한 시기였다. 또한 자칫하면 본토의 일본군과 충돌할 수 있고, 명나라에 불필요한 오해를 살 수 있었다. 하지만 상왕인 태종은 결국 대마도 공격을 선택했다. 대마도...
이근이 쏘아올린 공, 현역 군인도 '우크라行'…의용군 여론 양분 [송영찬의 디플로마티크] 2022-04-03 13:05:06
‘정벌’이란 거창한 명칭이 붙었지만 당시 조선은 러시아의 존재도 잘 알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이건 원군을 요청한 청나라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청나라 사신은 1654년 조총병 100여명을 요청에 ‘나선이 무엇이냐’는 효종의 질문에 “영고탑 인근의 별종”이라 대답합니다. 조선은 결국 싸우는 상대가 정확히 누군지도...
용산 풍수설, 아니면 말고식 괴담인가 [여기는 논설실] 2022-03-28 09:01:29
역사도 갖고 있다. 13세기 말 몽골군이 일본 정벌을 위한 병참기지로 이곳을 활용하면서 외국군 주둔 역사가 시작됐다. 임진왜란 땐 왜군이, 임오군란 땐 청나라가 지휘소로 이용했다. 청·일 전쟁 이후 1945년 해방때까지 일본군이 전초기지로 삼았다. 해방 뒤엔 미군 시대가 열렸다. 용산을 청와대 이전 후보지로 꼽은...
[윤명철의 한국, 한국인 이야기] 집현전 설치해 젊고 뛰어난 학자들 등용, 건국세력 대체…정치의 세대교체 추진했죠 2022-03-21 10:00:05
즉위 해인 1419년엔 이종무를 파병해 대마도를 정벌했다. 이어 1426년 삼포(부산, 창원, 울산)를 개항했고, 1443년에는 왜인의 출입을 통제하는 정책으로 선회하는 등 강온양면 정책을 구사했다. 기억해주세요1432년(즉위 14년) 12월 여진족이 기마병으로 압록강을 넘어 약탈하자 분노한 세종은 이를 절호의 기회로...
[다산 칼럼] '너그럽고 넉넉한 문명국' 이끌어 주기를 2022-03-13 16:59:02
정치’도 한몫했다. 세종은 여진족 정벌에 앞서 의견을 수렴하느라 석 달을 끌었다. 조선왕조 세제의 골격이던 공법(貢法)은 반년 동안 17만 명 이상 여론조사와 14년 동안 연구·시험을 거쳐 확정했다. 당시 왕정보다 진화한 지금의 공화정은 그 요체가 합의의 탐색이다. 설익은 외곬 정책을 거르고, 공감대가 넓고...
[윤명철의 한국, 한국인 이야기] 조선의 설계자 '핵심 브레인' 정도전…성리학 중시하며 산업 억제정책 펼쳤죠 2022-02-28 10:00:27
정벌의 필요성을 주장해 명의 황제인 주원장의 위협을 받았다. 결국엔 이방원에게 죽임당하는 명분을 제공하기도 했다. 진나라의 한비자처럼 법률의 중요성을 인식한 그는 법치주의 사회의 정착을 도모했고 백성의 이익을 소중하게 여겼다. ‘백성(民)의 마음을 얻으면 민(民)은 복종하지만 민(民)의 마음을 얻지 못하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