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바윗길을 가다(9) 설악산 천화대 / 하늘에 핀 꽃 설악을 물들이다

입력 2014-09-25 15:50  


[김성률 기자] 설악산의 대표적인 리지길을 꼽으라면 '한편의 시를 위한 길', '별을 따는 소년', ‘유선대 리지’, '삼형제 리지' 등을 떠올리게 된다. 그렇게 어렵지도 않으면서 재미있게 등반을 할 수 있는 곳이기도 하고 아름답던 초보시절의 추억을 떠올릴 수 있는 장소이기도 하며 이름에 걸맞게 아름다운 풍광을 자랑하는 바윗길이기도 하다.

설악산에는 그밖에도 ‘솜다리의 추억’, ‘4인의 우정’, ‘경원대길’, 울산바위의 ‘비너스 리지’  등등 많고 많은 바위길이 있지만 그중에서도 빼어난 풍광을 자랑하는 곳이 있으니 그곳이 바로 천화대 리지. ‘하늘의 꽃밭’이라는 닉네임을 가진 바위길이다.

천화대 리지를 '천 개의 꽃이 피어난 길'이라고 지칭하는 사람들도 있는데 한자표기가 천화대(天花臺)인 것을 보아서는 ‘하늘에 핀 꽃밭’이라는 표현이 더 적확할 것 같다.

얼마나 아름다운 바위길이기에 이 같은 별명을 얻었을까? 천화대 리지는 설악산 뿐 아니라 전국의 리지길을 통 털어서도 가장 아름다운 축에 드는 바위길이다. 특히 가을 천화대의 경치는 설악 중에서도 발군에 속한다.

천화대 리지는 아름다운만큼 클라이머들의 굳센 체력과 인내심을 요구한다. 설악산 소공원에서 출발하여 천화대 리지와 범봉 등반을 모두 마치고 다시 소공원으로 돌아오는데 소요되는 시간은 평균 17시간을 헤아리기 때문이다.

17시간이라면 워킹산행으로 쳐도 장거리 종주에 속한다. 게다가 등반의 특수성 때문에 배낭의 무게는 10킬로그램이 훌쩍 넘는다. 약 4킬로그램(자일의 길이는 통상 60미터이며 1미터당 자일의 무게는 약 63그램 전후) 내외의 자일과 등반장비 그리고 최소 2리터 이상의 물과 식량, 비상식량, 보온재킷 등이 기본으로 들어있기 때문이다. 이 정도의 무게를 매고 등반을 하게 되면 체력의 소모가 순수한 워킹에 비해서 훨씬 더 많다고 보아야 한다. 


흔히 천화대 리지는 등반의 난이도가 중급이라고 하지만 등반 못지않게 하산길이 만만치 않다. 잘못 건드리면 굴러 떨어지는 낙석은 안전에 문제를 일으키기도 하고 발 끝에 힘이 많이 들어가는 너덜지대 통과는 그만큼 인내심을 필요로 한다. 이른 새벽부터 등반을 시작했더라도 하산 시점은 오후 5시 이후가 되기 십상이고 범봉을 하강해서 소공원까지 가는 길은 약 3시간이 소요되므로 해가 떨어져 어두워지면 길을 잃기가 십상이다.

하산길은 등산객들이 많이 다니지 않는 계곡길이어서 길을 잃게 되면 계곡을 여러 번 오가면서 하산길을 찾아야 한다. 새벽 3시에 등반을 시작했다가 하산길을 잃어서 21시간만인 밤12시에 하산을 완료하는 경우도 있다. 때문에 천화대 리지는 경험이 많은 선등자와 등반을 하는 것이 필수적이다. 

금요일밤 열 한 시. 사당역에서 모인 일행은 승용차 편으로 도망치듯 올림픽도로로 빠져든다. 올림픽도로 끝자락에서 서울춘천고속도로로 길을 바꿔 타고 미시령을 넘어 설악산태극종주를 위해 통과했던 목우재를 지나니 어느새 설악산국립공원 입구. 시각은 새벽 2시, 서울 사당서 약 3시간이 걸렸다. 빵과 음료수로 간단하게 야참을 먹고 비선대 대피소로 향한다.

소공원입구에서 비선대 대피소 가는 길은 기자가 등산학교를 다닐 때 매일처럼 아침 구보와 체조를 하던 곳이어서 낯설지가 않다. 더 높은 산을 오르고 싶은 열정과 함께 아름다운 암릉과 박진감 넘쳐 보이는 몸짓이 부러워 시작한 기자의 암벽교육은 8일의 수업기간중 3일 동안 비가 내렸어도 마냥 기대가 되고 설레던 하루하루의 연속이었다.

비오는 밤 비선대 대피소 식당에서 토니 쿠르츠(Tony Kurz)의 실화를 그린 영화 ‘내사랑 아이거(Nordwand North Face)’를 볼 때는 얼마나 감동적이었는지… 악천후에도 불구하고  굳세고 강직하게 북벽을 등반하고 영화속 픽션이기는 하지만 밤새 애인이 부르는 격려의 성원에도 불구하고 매듭을 푸르지 못하고 죽어가는 토니의 모습은 초보 클라이머의 가슴을 애처롭게 만들었다. 
 
비선대 대피소에서 식수를 보충하고 대청봉 방향으로 천불동계곡을 올라 천화대 출발지점을 향한다. 설악골 입구의 철다리를 건너 왼쪽으로 경사진 능선을 오르고 작은 암봉을 우회하여 100미터 정도 더 올라가면 20미터 높이의 벽이 나타나는데 이곳이 바로 천화대 리지의 출발지점이다. 비선대 대피소에서 이곳까지는 약 30분 정도가 소요된다.


첫 마디는 서서히 몸을 풀어주는 정도의 난이도다. 긴장만 하지 않으면 잡기 좋은 홀드들이 계속 나타난다. 굳이 난이도를 매기자면 약 5.8이나 될까? 천화대 리지 등반은 거의 전구간을 통털어 최고난이도가 5.9정도에 불과하다. 첫 마디를 통과하면 이후로는 마디의 개수를 손꼽기 어려울 정도로 많은 등반과 하강의 연속이다.

통상적으로 천화대 리지는 2인1조의 등반시 출발지점에서 왕관봉을 거쳐 희야봉을 넘어 요델산악회의 석주동판까지 가는데 6~7시간을 잡는다. 이곳에서 다시 범봉까지 등반을 마치게 되면 추가로 3~4시간이 소요된다. 여기에 설악동에서 출발지점까지 어프로치 시간 약 2시간과 범봉하강 이후 소공원까지 걸리는 시간 3시간을 합하면 모두 14~16시간이 소요되는 셈이다. 그러나 이 시간계획은 숙련된 등반가 2인1조일 경우이며 어디까지나 계획일 뿐이다. 10여 시간이 넘는 등반을 하게 되면 항상 예기치 못했던 일들이 발생할 수 있으므로 항상 넉넉한 산행시간을 계획하는 것이 좋다.

어둠 속에 출발한 리지 등반은 서서히 여명이 터오면서 암릉 주변의 장쾌한 풍경과 맞닥뜨리게 되니 인수나 선인에 익숙해진 눈이 호사를 하게 된다. 시야가 더 넓어지고 사방으로 펼쳐지는 파노라마가 마치 영화의 한 장면과도 같다.

등반 초반에는 등반방향으로 계속 왕관봉과 희야봉을 바라보게 된다. 이곳 리지는 또 다른 바위길인 흑범길과 석주길을 만나게 된다. 왕관봉 못미처에서 약 40미터의 사선크랙이 등장한다. 커다란 크랙이어서 출발은 쉽지만 중간에 벙어리크랙이 있어서 조금 힘을 써야 한다.


사선크랙 위 봉우리에서 왕관봉 어깨 정도의 능선 사이는 일명 '통닭구이'를 하는 구간이다. ‘통닭구이’는 티롤리안 브리지로 건너가는 모습이 마치 통닭을 굽는 모양과 흡사하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이 구간을 "티롤리안 브리지로 가는 것이 빠르냐" 아니면 "하강 후 등반이 빠르냐"는 둘째치고라도 오른쪽으로 멀리 동해가 바라다 보이고 끝없이 높고 푸른 하늘을 보며 티롤리안 브리지로 이동하는 순간은 마치 신선이 된듯 기분이 짜릿하다.

티롤리안브리지(tyrolean bridge)는 원래 협곡이나 격류를 건널 때나 빙하의 크레바스나 아이스 폴 등을 건널 때 이용되는 기술이다. 양쪽으로 팽팽히 묶여진 자일에 손과 발로 매달려 건너가는 방법과 자일 위에 몸을 업드린 채 몸 전체를 싣고 발을 휘감아 걸어 밸런스를 유지하면서 양손으로 번갈아 자일을 잡아당기며 몸을 앞으로 전진시키는 두 가지 방법이 있다.

자일의 한 쪽은 상대적으로 높은 암릉의 볼트에 고정시키고 자일의 다른 한쪽 끝은 협곡 건너편 나무에 확보한다. 두개의 자일을 하네스의 카라비너에 걸고 확보기의 길이를 조절한 후 확보기 카라비너에도 자일 한쪽을 걸면 준비는 완료. 자일이 약간 늘어진 부분까지 하강하면 그때부터는 손으로 잡아당기면서 올라가야 한다. 두 줄의 자일 이외에 한 개의 자일을 더 설치(가이드 자일)하여 건너편에서 잡아당기면 비교적 수월하게 이동을 마칠 수 있다.

왕관봉에서 희야봉까지는 이른바 나이프리지(칼날능선)다. 들고 가는 자일이 불편하지 않게 배낭에 넣던가 등에 잘 묶어서 오르면 확보기 카라비너에 자일만 통과시켜도 무방할 정도로 수월한 길이다.

구름이 바로 손에 잡힐듯 아스라한 희야봉 정상에서 40미터와 20미터 하강을 하게 되면 석주길 동판 아래로 내려서게 된다. 등반시간이 부족하면 과감하게 이곳에서 하산을 하여야 한다. 이곳에서 비선대대피소까지는 약 2시간 30분이 소요된다.

여기까지만 와도 천화대 리지 등반은 성공이라 할 수 있다. 설악은 역시 기후의 변화가 심하기 때문이다. 비라도 흩뿌리고 일기가 불순하면 더 이상 등반을 할 도리가 없다. 이제 다시 범봉을 향한 등반이다. 범봉은 공룡능선에서 천화대로 내려가는 암릉 중간에 우뚝 솟은 바위 봉우리다. 범봉은 세 개의 암봉이 겹쳐 있어 '범봉연봉리지'로도 불린다. 1967년 요델산악회에서 개척한 길이다. 


석주길 동판 아래에서 등반은 다시 시작된다. 첫째 마디는 수직에 가까워 보이는 30미터의 크랙길. 그러나 홀드가 워낙 좋아 여유 있게 등반을 마칠 수 있다. 둘째 마디는 약 20미터에 가까운 침니 형태의 크랙 구간이다. 셋째 마디는 다시 칼날능선이다. 이곳을 우측사면으로 통과하고 35미터, 10미터 하강을 마치고 안부로 올라서게 된다.

넷째 마디는 약 15미터 길이의 벽이다. 이 벽을 오르면 드디어 천화대 - 범봉 리지의 클라이막스라 할 수 있는 범봉과 만나게 된다. 범봉 정상 아래쪽에는 이 범봉 리지길을 개척한 요델산악회의 동판이 눈에 들어온다.

이제 범봉에서 세 번의 하강을 마치면 드디어 천화대-범봉 리지의 대장정이 끝난다. 하강이후에는 다시 설악산 소공원을 향한 지리한 워킹이 계속될 것이다. 그러나 그런 것들은 아무래도 상관없다. 하늘에 핀 꽃밭 천화대와 범봉 리지 등반은 미처 이곳을 찾지 못했던 클라이머들에게 암벽등반의 희열과 성취감 그리고 인내와 고통을 함께 안겨주는 꿈과 희망의  실크로드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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