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바윗길을 가다(27) 인수봉 여명길 / 70년대 이 땅의 젊은이들이 만들어 낸 불멸의 자화상

입력 2014-09-25 16:12  


[김성률 기자] 인수봉 오아시스에서 바라다 본 여명길은 그저 만만한 바윗길처럼 보였다. 거무스름해서 다소 미끄러울 것 같은 첫째 마디 슬랩을 지나 확보를 하고 ‘고구마 바위’라고 부르는 약간의 오버행성 바위를 넘어 왼쪽으로 튀어 오른 바위를 인공등반으로 오르면 될 것 같아 보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과연 그럴까? 여명길은 최고난이도 5.11a의 결코 만만치 않은 바윗길이다. 뿐만 아니라 한 치의 방심도 허용치 않는 준엄한 바윗길이다. 특히 여명길 둘째 마디는 난이도도 높지만 확보를 하지 못했을 경우에 치명적인 부상을 입을 수도 있다.


여명길은 인수봉 대슬랩 위 오아시스의 왼쪽에서 등반이 시작된다. 거리 113미터에 여섯 마디로 이루어져 있다.


오아시스에서 출발을 기다리고 있는데 바로 오른쪽 영길에서 선등자의 추락이 두 번이나 이어진다. 영길의 첫째 마디 슬랩 난이도는 5.10b 정도인데 마지막 한두 발에서 추락이 이어진다. 이 선등자는 결국 작은 배낭을 내려놓고 첫째 마디 크럭스를 돌파한다.



“훌륭한 선등자는 어떤 일이 있어도 끝까지 오르는 등반이 아니라 실력이 되지 않으면 돌아서 내려올 줄 아는 사람이다”라는 말이 있다. 실력이 안되는 길을 오른다는 것은 등반의 원칙에도 어긋나는 일이고 설령 등반을 마쳤다 하더라도 사고로 이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최근에도 선등자는 끊임없이 배출되고 있지만 내용을 조금 들여다보면 제대로 된 선등훈련을 받지 못하고 있어 안쓰러운 부분이 많다. 가장 문제가 되는 선등훈련은 선등자가 기본적인 훈련도 없이 선등에 나선다는 것이다. 난이도 5.8~5.9 정도의 크랙등반을 제대로 하지 못해 원래의 길이 아닌 다른 길로 오르는 경우도 있는데 이 같은 경우는 암장운동을 통해서 더 힘을 기른 다음에 선등에 나서도 늦지 않을 것이다.


선등자가 10여미터도 넘는 등반거리를 캠도 치지 않고 그냥 등반하는 경우도 보았다. 오랜 등반경험이 있는 선등자라면 또 모를까 초보 선등자라면 등반거리가 멀어질수록 캠을 쳐서 안전을 확보해야 하는 것은 상식이다. 등반거리가 이렇게 긴 거리를 캠을 하나도 치지 않고 아슬아슬하게 등반하는 모습을 보면 모골이 송연해진다.

단 한 번의 실수로 추락하면 당장 큰 부상으로 이어지고 그렇게 되면 선등은 고사하고 반년 이상을 등반도 못하는 상태로 지내야 할텐데 이 같은 현상이 심심치 않게 목격되는 것은 빌레이를 보는 선배들도 등반의 원칙을 제대로 모르고 있다는 말과도 같다.



“우리 때는 다 그랬어” “이 정도에서 무슨 프렌드를 치나?” 이 같은 말을 무시로 하는 선배라면 특히 조심해야 할 필요가 있다. 클라이머의 안전은 스스로가 지켜야지 누구도 지켜주지 못한다. 등반자의 부상은 등반자 개인 뿐 아니라 등반하는 동료나 산악회, 가족, 친구들에게 큰 고통을 안겨 주기 때문이다.

선등의 위험을 이렇게 여러 번 강조하는 이유는 최근 여명길에서 사고가 발생했기 때문이다. 다음은 10월5일 기자가 작성한 암벽등반사고 기사이다.


가을철 암벽등반사고 급증 “실력에 맞는 등반코스 선택이 중요”
[김성률 기자] 가을 본격적인 암벽시즌을 맞아 암벽사고가 자주 발생하고 있다. 10월3일 하루에만 무려  6건의 등산객 추락사고가 발생했다. 오후 1시경에는 북한산 인수봉에서 암벽 등반 중이던 22살 신 모 씨가 산 아래로 굴러 떨어져 양쪽 발목이 부러졌다. 신 씨는 구조대에 의해서 무사히 구조됐다.


오후 5시경에는 일행과 함께 인수봉 여명길을 선등하던 여성등반자가 등반중 약 5미터를 추락하여 안면부 함몰과 좌측어깨골절 사고를 당했다. 구조당시 사고자는 머리에 충격을 받아 뇌진탕 증세에 저체온증까지 겹쳐 상태가 심각한 상황이었다. 다행히 사고자는 북한산경찰산악구조대에 의해 헬기를 통한 신속한 후송으로 생명에는 지장이 없는 상태이다.


이날 사고자는 그동안 30여 년간 암벽등반을 해온 베테랑 산악인으로 누구도 이 같은 사고를 미처 예상치 못했다.


김창곤 북한산경찰산악구조대장은 “암벽에서의 사고는 등반실력과 상관없이 횟수에 좌우된다고 보아야 합니다. 아무리 등반실력이 뛰어나다하더라도 집중력이 떨어지고 실수를 하게 되면 사고의 위험에 노출되게 됩니다”라고 말한다.


김 대장은 또 “최근 스포츠클라이밍과 인공외벽을 즐기는 동호인들이 늘면서 암벽등반인구 또한 증가추세에 있습니다. 졸속으로 만든 인터넷 암벽카페에서 서투른 등반을 하다가 사고를 당하는 경우도 많으니 특별한 주의를 필요로 합니다”라고 지적한다.


암벽등반의 경험이 많아 고난이도의 등반을 할 수 있는 등반자라 하더라도 당일 컨디션에 맞추어 큰 어려움 없이 등반할 수 있는 바윗길을 등반하여야 한다. 암벽에서 무리한 등반은 사고로 이어질 수 있기 때문에 어려운 코스는 안전이 확보된 실내암장이나 인공외벽에서 연습을 하고 자연바위에서는 자신의 체력으로 큰 어려움 없이 갈 수 있는 바윗길을 선택하여 등반하여야 사고를 사전에 예방할 수 있다.
 
또 암벽등반을 희망하는 경우에는 가능하면 등산학교 등을 통해서 정확한 등반기술과 정보를 습득하고 등반장비를 제대로 사용할 수 있도록 충분한 연습을 해야 한다. 암벽등반을 기초부터 체계적으로 배울 수 있는 등산학교로는 코오롱등산학교, 한국등산학교, 서울등산학교, 정승권등산학교 등이 있다. 


한편 올해 들어 북한산 일원에서는 인수봉 인수C코스의 추락사망사고를 비롯 총 6건의 사망사고가 발생하여 등산객들과 클라이머들의 안전등반이 더욱 각별하게 요구되고 있다.



여명길 등반이 있던 날은 사고가 있던 날로부터 불과 일주일 후였기 때문에 다소간의 부담을 안고 첫째 마디를 출발하게 되었다. 첫째 마디 슬랩은 각도가 그리 세지는 않지만 검게 변한 바위는 생각보다 더 미끄럽다. 확보볼트에 가까워지면 커다란 크랙이 있어서 이것만 잡으면 안심이다. 그러나 볼트에 확보하기 전에 추락을 하게 되면 바닥까지 떨어지는 형국이기 때문에 아무래도 선등자는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다. 거리 23미터에 난이도는 5.8.

드디어 크럭스인 둘째 마디다. 확보지점에서 약간 왼쪽으로 미끄럽고 가파른 슬랩을 올라 일명 고구마바위를 타고 넘어가야 한다. 이 부분이 바로 여명길의 최고 난이도 5.11a인 곳이다.
그런데 직상하는 구간이 미끄럽고 턱을 넘어서는 것이 부담이 크기 때문에 많은 선등자들이 고구마 바위를 오른쪽으로 우회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원래의 길로 오르지 않고 우회하는 행위는 위험이 따른다. 고구마 바위를 오르는 것까지는 쉬울지 모르지만 좌측으로 트레버스하여 볼트에 확보하기까지는 만만치 않은 힘과 담력을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여명길 사고의 주인공도 고구마 바위를 우회하다가 추락하여 왼쪽 얼굴과 어깨를 고구마 바위 왼쪽위의 튀어나온 바위에 부딪힌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기자가 등반하는 날에도 빌레이어가 고구마바위를 우회하여 등반하고 좌측으로 트레버스하다가 추락하여 곧바로 이 부분에 부딪쳤다. 후등자이고 자일에 텐션이 되어 있었길래 망정이지 만약 선등자였다면 어떤 일이 벌어졌을까? 뉴스에 나온 사고와 똑같은 상황이 연출될 것이 분명하다.


기자는 고구마 바위를 직상하여 오르고 만만치 않은 인공구간을 가능한 신속히 통과했다. 인공구간에서 시간을 오래 지체하면 힘을 낭비하게 되고 등반이 더욱 힘들어지기 때문이다.



셋째 마디는 다시 슬랩과 크랙으로 이루어진 구간이다. 거리는 36미터에 난이도는 5.7. 여유 있게 등반을 하다 보니 주위의 경치가 한 눈에 들어온다. 크럭스를 돌파했다는 뿌듯함에서  나오는 여유일 것이다. 셋째 마디와 다소 떨어져 있는 넷째 마디는 거리 30미터에 난이도 5.7의 수월한 구간이다. 여명길의 등반은 대부분 셋째 마디나 넷째 마디에서 끝나지만 원래 여명길은 여섯 마디로 구성되어 있다. 다섯째 마디는 좌향크랙으로 이루어져 있고 여섯째 마디는 슬랩과 크랙을 타고 소나무까지 오르게 된다.

여명길은 1973년 여명산악회의 차창희, 윤종만, 김기흥, 이찬경, 박용욱, 김순욱 등이 개척한 길이다. ‘여명’이라는 이름은 여명산악회에서 따온 것으로 보인다. 1970년대 가장 활발한 활동을 하던 여명산악회는 회기의 심볼이 바로 군화였다. 암벽화가 따로 없던 시절 젊은 그들의 기개를 보여주는 단면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그것은 투박하고 불편한 군화일망정 어떤 바위고 오르고야말겠다는 1970년대 이 땅의 젊은이들이 보여준 불멸의 자화상이기도 했다.


* 트레버스(traverse) : 트레버스란 가로지르거나 횡단하다는 의미로 등반에서는 등반자가 위로 오르지 않고 왼쪽 또는 오른쪽으로 이동하는 것을 말한다. '펜둘럼(Pendulum) 트레버스란 등반자가 자일을 잡은 상태에서 횡으로 이동하는 것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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