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부드럽게 요동치는 음악안에, 작곡가 윤일상

입력 2016-04-25 16:27  


[조원신 기자] 인심 좋은 아저씨 같았다. 그 모습에 속아 놓칠 뻔 했다. ‘윤일상’ 이 세 글자만으로도 그는 전설과도 같은 존재였다.

대중가요 황금기를 주름 잡던 그를 대한민국 최고의 작곡가라고 칭하는데 그 누구도 이견이 없을 터. 그는 그만큼 많은 것을 해왔고 앞으로 더 많은 것을 해나갈 존재였다. 부드럽고 온화한 겉모습이 믿기 힘들 만큼 터질듯 한 그의 에너지를 감히 그 누구와도 견줄 수 없었다.

시간이 흐른 뒤 대중음악 역사의 첫 문단에 그의 이름이 새겨질 것이고 그런 그의 행보를 동시대를 살아가며 바라 볼 수 있다는 것은 커다란 행운과도 같은 일이 될 것이다. 그와 bnt의 화보 촬영 그리고 면밀하게 진행 됐던 인터뷰를 통해 이와 같은 생각에 동조하게 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 작곡가를 시작하게 된 계기

네 살 때 피아노를 배우기 시작해 작곡은 6세 부터 시작. 그 당시에는 주로 클래식을 접했기 때문에 클래식 기반으로 작곡 했었고 초등학교 5학년 무렵 비틀즈를 알게 되면서 부터 팝 형식의 곡을 쓰기 시작했다. 그렇게 중고등 학교 시절 썼던 습작이 2~300곡이었다. 가요계 데뷔는 19살 때였다. 다른 작곡가에 비하면 상당히 빠른 편이었다.

- 음악을 전문적으로 배웠던 것인가.

우리 시절에는 가르쳐줄 정도로 지식이 있던 사람이 없었다. 화성학을 당시 친분이 있던 누나에게 배운 것이 전부였다. 정확한 매뉴얼이 있는 것도 아니었기 때문에 어렵게 해외원서를 구해서 보고 힘겹게 독학을 했다. 특히 법관이 되길 원했던 아버지의 반대가 컸다. 뜻에 따르려 법전을 읽기도 했었으나 고2 때 니체와 같은 철학을 읽고 록 음악에 빠지면서 반항적인 성향이 커지다보니 음악에 본격적으로 집중하게 된 계기가 됐다.

19세 때 작곡가로 데뷔하면서 독립을 했고 줄곧 정신적인 지원, 경제적인 지원 없이 혼자서 꿈을 키워왔다. 50원이 없어서 집 밖에 못나간 적도 있었고 영양실조에 걸려 응급실에 실려 간 적도 있었다.

- 작곡가로 데뷔하게 된 상황

녹음실 청소부터 온갖 일을 도맡아하면서 헬퍼로 시작했다. 악기살 돈이 없어서 직원들이 퇴근할 때 빌려서 작업을 해 곡을 썼다. 그렇게 시간을 보내던 중 내가 일하던 녹음실에 방문했던 프로듀서가 내 곡을 듣고 데뷔하지 않겠냐고 권유하였고 그렇게 시작하게 됐다.

당시 가수 ‘미스터투’가 데뷔했던 음악사였고 어린 나이였기에 계약서 없이 용돈 식으로 지원해줬었다. 그 돈으로 악기도 사고 작은 작업실도 마련했다. 그런 계기가 없었다면 불가능했었을 수도 있었거나 한참 늦게 데뷔했을 수도 있었을 것 같다. 운이 좋았다.

- 데뷔전 학창시절 꿈

유년 시절에는 그림을 그리는 것을 좋아해 음악으로 받은 상보다 그림을 그려 받은 상이 더 많았다. 그래서 화가도 되고 싶었고 아버지의 뜻을 따라 법대도 갈까 생각했지만 어쨌든 기본적으로 추구했던 건 음악이기에 좋아하는 것을 따르게 됐다. 사실 인생의 노선을 ‘작곡가가 돼야지’ 라고 그려 놨던 것은 아니었는데 좋아하고 내가 잘 하는 일을 꾸준히 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흘러 들어가게 됐던 것 같다.

- 데뷔한지 25년이 됐다. 초심을 잃지 않으려 어떠한 노력을 하는가.

내 스스로가 가장 열정적이었을 때, 내 자신이 가장 좋았을 때를 돌이켜본다. 데뷔 초에는 잠도 안자고 씻지도 않았을 만큼 작업에만 몰두했다. 심지어 사람들이 미쳤다고 할 정도로. 그 때 내 직업에 대한 포커스가 있었는데 ‘히트 작곡가’가 되기보다는 ‘남들이 안하는 곡, 남들보다 앞선 곡을 써야겠다’는 생각이 컸다. 그럼에도 하다보면 익숙해지고 내 음악이 히트되면 그 곡에 또 익숙해지는데 디제잉을 하고 락밴드를 만든 이유가 그렇게 ‘고이기 싫어서’다.

물론 음악을 직업적으로만 생각했다면 지치고 하기 싫어질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본질적으로 음악은 내 삶의 표현방식이라고 생각하며 방송하고 강의한다. 작곡가라는 분야는 금전적이고 직업적인 부분을 버리고 좋아서 해야 오래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 DJ DOC 3집 프로듀서를 맡으면서 처음으로 ‘밀리언셀러’를 달성했다.

벅이라는 신인가수의 프로듀싱을 했는데 당시 제작을 맡았던 철이형이 그 곡을 듣고 나를 직접 찾아와서 파격적인 제안을 했다. (당시 DJ DOC는 아주 인기가 높았던 때였으니까) 워낙 거침없이 일하던 시절이라 ‘걱정하지 말라’며 ‘좋은 음반 만들어 드리겠다’고 패기 있게 호언장담 했었다.

그 때 만들었던 ‘미녀와 야수(OK? OK!)’와 ‘겨울 이야기’가 동시에 1위 후보가 되는 유례없는 일이 일어나며 화제를 모았고 ‘리멤버(그녀의 속눈썹은 길다)’도 10위권 내에 들었을 만큼 인기를 끌었다. 이후 쿨도 나오고, 영턱스 클럽까지 내는 것 마다 거의 다 히트했었다.

이외에도 프로듀싱한 앨범들이 많이 히트를 했는데 건방진 소리로 들릴 수 있겠지만 그 당시에는 당연함으로 받아들여졌었다. 참여한 음반 중에 50만장 이하로 팔린 적이 거의 없었고 참여만하면 대부분 인기를 끌었기 때문이다. 다음 작업이 또 밀려있고 기본적으로 20팀 정도가 대기해 있는 상황이어서 뭔가를 따로 즐길 시간은 없었다. 근데 그 작업이 너무 즐거웠다.

- 수입도 엄청 났었겠다.

TOP100 순위권에 많을 때는 내가 많든 곡이 20~30%를 차지했었다. 요즘 순위권 안에 그렇게 들었다면 진짜 돈을 많이 벌었을 텐데 그 때는 저작권료도 잘 정리가 안 되던 시절이었다. 그래서 요즘 작곡가들에 비하면 수입이 많이 좋지는 않았다.

그렇지만 처음으로 인센티브를 받게 되었고 처음으로 큰돈을 벌었을 때도 그때다. 워낙 없이 살다가 큰돈을 받아서 어디다가 써야할 지도 몰랐고 은행에 넣는 방법도 몰라서 자동차 트렁크 안에 돈을 보관하기도 했었다. 그 돈은...매니저도 많았고 같이 다니는 사람들이 많았었으니 이래저래 많이 세어나가지(?) 않았을까(웃음).

- 워낙 잘나가던 시절, 자만심이 생기진 않았나.

음악 앞에서 항상 인간이 겸손해야 되지만 90년대 후반, 내 음악이 패션이 되고 내 음악 세계가 시장을 지배하게 되던 시절이다 보니 물론 자만했던 시절이 있었다. 근데 경험상 자만을 하게 되면 무조건 망가지더라.


 - 최고 작곡가상 재차 수상 후 '한 작곡가의 음악이 너무 많이 방송에 나온다는 이유'로 국내 유수의 두 방송사가 윤일상 음악을 금지시키는 움직임을 보이기도 했을 정도로 여파가 대단했다.

양대 방송사에서 한 작곡가의 음악이 너무 많이 나온다는 이유로 금지시켰다며 기사화도 됐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왜 그랬나 싶지만 그 때의 나는 지나칠 정도로 방송을 외면했었다. 음악 작업 이외의 섭외도 거절했고, 높으신 분들의 식사대접도 거절했다.

어린 마음에 ‘내가 왜 만나야 되지? 난 뮤지션인데’라는 마음이 있었다. 추측이지만 그런 것 들이 반감을 사서 당시 사건의 계기가 되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날 제외한 대부분의 작곡가 분들은 그런 만남에 능숙했었던 것 같다.

사실 지금 생각해보면 안 만날 이유는 없었는데 지나치게 외골수같이 너무 작업에만 집중했던 게 아닌가 싶다. 요즘에 와서 그런 만남을 갖게 되면 ‘옛날에는 그렇게 만나기 힘들었는데 이제야 만나게 됐다’고 말씀하시기도 한다. 지금은 애니타임 다 오픈되어있다(웃음).

- 방송 금지 이후

사실 방송 금지가 되니 본의 아니게 휴식을 취하는 시간이 주어졌었다. 그 시간이 나에게는 굉장히 중요한 시간이 됐다. 당시 모든 스케줄을 접고 미국으로 건너가 올랜도 부터 투어를 시작했다.

처음에는 나를 괴롭히던 사람들, 욕하는 사람들이 주는 이유 없는 고통에 그들을 많이 원망했었다. 20대 초반 경찰청, 검찰청, 국세청까지 갔었다. 그 중에 내가 하나의 혐의라도 있었다면 지금 이 자리에 내가 없었을 거다(웃음). 전부 모함이었다. 실제로 검찰청에서 ‘이 어린 사람한테 도대체 왜 이러지’라고 했을 정도였으니까.

예를 들면 국세청은 탈세라던가 수입을 조작했다며 세무 조사를 위해 내가 당시 사용하던 조그만 작업실을 뒤지기도 하고 건달들이 찾아와서 그들이 데리고 있던 작곡가의 곡을 표절했다는 둥의 협박도 받았었다.

심지어 모든 곡들이 거의 다 잘되니까 ‘곡을 써주는 다른 작곡가가 있다’, ‘혼자서 절대 할 수 있는 스케일이 아니다’라는 소리도 듣고. 또 본의 아니게 거절을 하게 되면 당한 이들은 그냥 나를 씹었다. 잘되면 이유 없이 무조건 욕먹더라.

그러한 모함이 요즘처럼 내가 외향적이었다면 덜 했을 텐데 당시의 나는 굉장히 폐쇄적이었기 때문에 더 그랬던 것 같다. 어린나이가 맞지만 초면에 반말하면 같이 작업을 안했으니. 나이가 어린 것에 대한 그런 자격지심도 있었던 것 같다.

미국가기 전까지 그 모든 것 들이 사실은 누구 때문에, 누구 때문에, 라는 생각이 있었는데 미국에 가서 생애 처음 보는 지평선을 바라보니 마음이 넓어지더라. 그때 깨달은 것은 ‘나에게서 일어나는 모든 일들의 중심은 결국 나로부터 시작 된다’라 느꼈다.

사람들이 주는 고통도 ‘내가 좀 더 겸손했으면’, ‘많은 사람들에게 다정하게 했으면 이렇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정신적으로 많이 힘들었었는데 생각을 달리 먹으니 마음이 편해지더라. 그렇게 그곳에서 쓴 곡이 터보의 ‘회상’이었다.

- 기억에 남는 에피소드
 
꽤 많다. 건모형과 ‘뻐꾸기 둥지 위로 날아간 새’를 작업할 때 ‘모든 걸 집어 던지고 노래를 해라’ 라는 디렉팅을 말버릇처럼 했었고 녹음 당시 음악에만 몰입하기 위해 건모형이 옷을 다 벗고 노래한 적이 있었다.

귀신 에피소드도 여럿 있다. 터보의 마이키와 ‘회상’을 녹음하던 당시 원래 녹음실 부스 문이 워낙 무거워 저절로 열릴 수가 없는데 자꾸 열리더라. 이상한 마음에 쉬었다 하려고 밥을 먹고 들어와서 보니까 보면 대가 완전히 뒤집어져있고 위에 놓여 있던 가사 집과 볼펜이 각 부스마다 하나씩 놓여 있어 소름이 돋아 도망쳐 나오기도 했었다.

구피의 ‘비련’때는 같이 부스에 들어가서 함께 디렉팅을 보고 있었는데 갑자기 헤드폰에서 이상한 소리가 났고 다 같이 동시에 들었다. 놀란 마음에 나와서 확인해봤지만 전혀 그런 소리가 녹음이 되어있지 않았었다.

김범수 ‘하루’의 경우 녹음하는데 6개월이 걸렸다. 나올 때까지 녹음을 해달라고 부탁을 해서 완성한 곡이다. ‘보고 싶다’는 곡을 부르기 위해 감정을 잡는 시간도 1년 반 정도 걸렸다. 길었던 호흡만큼 범수가 성숙하게 된 계기가 됐고 상상이상의 노력이 들어갔다.

- 함께 작업 해보고 싶은 뮤지션

국내에선 조용필, 최백호, 전인권 그리고 요즘 아이돌 친구들도 함께 작업해보고 싶다. 예전에 젝스키스도 해봤고 여러 댄스 그룹을 프로듀싱한 경험이 많으니 다시 한 번 아이돌들에게 맞는 곡을 써볼까 한다.

해외 쪽으로도 발을 넓혀서 미국 아티스트도 트라이 중인데 받아주기만 한다면 비욘세, 저스틴비버와 작업해보고 싶다. 동남아권 아티스트들과는 작업 할 예정으로 현재 조율 중이다.

- 주목하는 뮤지션

요즘 젊은 싱어송라이터들이 많이 나오고 있는데 형식에 얽매이지 않는 그들의 신선함에 배우는 부분이 많다. 특히 자이언티나 아이유도 굉장히 좋고 거의 다 잘하는 것 같다.

인디밴드 중에서는 밝으면서 자기 장르에 특화된 음악을 하고 있는 오리엔탈 쇼커스. 아시안체어샷은 개인적으로 팬이다. 그들은 전문 음악인이 봐도 깊이 있는 음악을 하고 있다.

- 기대되는 뮤지션의 앨범

타이거 JK와 윤미래는 알고지낸 시간이 길었는데도 친해질 기회가 없었는데 방송을 통해 만날 기회가 많아져 친분이 생겼고 함께 협업하면 좋을 것 같은 뮤지션이다. 곧 신곡을 발표한다는데 최근 짧지 않은 시간 힘든 일을 겪은 후 나오는 곡인만큼 좋은 곡이 기대된다.

건모형과 은미누나도 올해 안에 신보가 나올 예정이고 두 분다 레전더리한 보컬리스트이기에 기대가 된다. 요즘과 같은 분위기라면 실력 있는 아티스트가 더 큰 빛을 볼 수 있는 시기가 되지 않았나 생각한다.

- 인디 음악에도 관심이 많은가.

좋은 언더그라운드 음악이 없다면 좋은 오버그라운드 음악도 없다. 기본적으로 언더음악을 요즘 인디 음악이라고도 칭하는데 그들은 대중적이기 보다는 실험적인 음악을 한다. 그런 밴드들이 많아지고 그들이 잘 돼서 오버그라운드까지 영향을 미친다면 우리나라 전체음악이 좋아질 것이라 생각한다.

평소 악기는 독일이 만들고 새로운 음악은 영국이 만들고 판매는 미국이 한다고 생각하는 편인데 독일의 우수한 악기들이 없었다면 지금의 팝시장이 이렇게 생겼을 수 있었을까. 그 전 단계가 분명히 필요한 것인데 우리나라 인디 음악이 그러한 역할을 충분히 해줄 수 있다고 생각한다.

안타까운 건 알려질 수 있는 통로가 적다보니 그 부분이 너무 아쉽다. 내가 밴드를 하는 이유 역시 그 부분에 대해서 스스로 뭔가 도움이 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해서다. 그들은 반드시 존재해야한다.

- 인디음악의 발전을 위해서는 어떠한 노력이 있어야 할까.

공연문화도 발전이 있어야 하고 그들의 음악을 쉽게 접할 수 있는 사이트라든지 인디음악에 대한 기반이 나와야 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그런 구상을 하고 현재 실행에 옮기기 위해 많은 고민과 생각을 하고 있다. 물론 시간이 오래 걸리는 부분이지만 개인적인 욕심을 다 빼고 우리나라 음악 발전을 위해서 무엇이든 해야겠다는 생각을 항상 하고 있다.


- 서울예술전문학교 교수로 후배들을 양성하고 있다.

아이들을 가르치고 트레이닝 하는 일은 계속 해왔기 때문에 그에 대한 연장선이라고 생각하지만 나로서는 그들이 음악을 마주함에 있어 절박함이라든가 애착이 좀 덜한 것 같아서 안타깝다. 오히려 내가 그들을 더 독려하는 입장이다. 알바도 좋고 약속도 좋지만 음악을 공부해야 할 중요한 시기에 학생들이 좀 더 열정이 있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그런 부분이 아쉽다.

물론 요즘 젊은 세대들에게는 취업난부터 해서 여러 가지 부정적인 명제들이 너무나 많은 시기다. 바라는 것은 환경이 아무리 좋지 않다 하더라도 사회가 주는 부정적인 명제를 다 신경 쓰지 말라는 것이다. 일일이 신경 써 가면서 공부하는 것과 신경 쓰지 않고 공부하는 것은 하늘과 땅 차이다. 젊은 세대들에게 자기 자신을 믿고 강한 정신력을 가지길 바란다고 응원하고 싶다.

- 자서전

21주년 기념 음반이 나오고 난 뒤 나에 대해 한 번쯤 정리해볼 시간이 필요했고 글을 쓰는 친구들도 도와주겠다며 주변에서 많이들 권유했다. 그래서 쓰게 됐고 나라는 사람의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

막상 쓰고 보니 부족하고 부끄러운 점도 많았고 너무 잘난 척만 한 건 아닌가라는 생각도 들더라. 하지만 최대한 사실만을 기반으로 썼기 때문에 후회는 없다. 다음번에 또 이런 기회가 주어진다면 또 다른 시각에서 바라보고 책을 쓸 수 있을 것 같다.

- 최근 야드라는 밴드를 결성했는데.

첫 번째는 단순히 재밌어서 만들었다. 밴드를 하거나 디제잉을 하는 것은 또 다른 취미생활 중에 하나인데 방안에만 틀어박혀 작곡만 하는 것이 아니라 같은 음악 분야 안에서 더욱 활동적으로 해보니 에너지가 발산 되면서 음악 작업에도 도움이 많이 되고 있다.

또 다른 이유는 밴드가 됐든 EDM이 됐든 작곡가 윤일상이 아닌 다른 모습을 보여주고 싶어서다. 사실 아주 마음 깊숙이 하고 싶었던 것이었다. 대중가요를 하다보면 포기하게 되는 게 많고 많은 사람들을 대상으로 하다 보니 음악에 있어 서로 타협을 하게 되지만 밴드 활동은 오로지 나의 음악이기 때문에 그런 것 들을 표출하는 출구라고 할 수 있다.

사실 아내의 대학원 교수님이 밴드를 한다며 봐달라고 하더라. 한 번 봐달라는 요청에 별 생각 없이 가보게 됐었다. 근데 60세 넘으신 분들이 밴드를 하는 모습이 너무 좋더라. 저분들도 그렇게 열정을 갖고 하는데 나는 그간 말로만 하고 싶다고 했던 것에 대한 반성을 느끼며 본격적으로 결성하게 됐다. 그것이 큰 모티브가 됐다.

- 방송을 하면서 대중들에게 더 많이 알려졌다.

‘복면가왕’이 가장 핫할 때 출연했고 하차했기에 많은 사람들이 기억을 해주시는 것 같다. 처음에는 개념을 음악인의 한 사람으로 출발했는데 아무래도 예능이기 때문에 적응 안 되는 부분도 있었다. 내가 잘 할 수 없는 곳이 아닌가 고민하던 차에 ‘탑 밴드3’에 합류하면서 자연스럽게 하차하게 됐다.

탑 밴드는 전 세계 유일한 프로그램이었다. 밴드 컴피티션은 전무하다. 출연 내내 새로운 밴드와 어린 친구들을 많이 보면서 음악적으로 여러 가지 행복감과 기대감을 느꼈고 흥행과는 별개로 굉장히 행복했던 시간이었다.

방송을 하면서 몸은 힘들었다. 하루에 200팀씩 보고 체력적으로 너무 힘들었다. 시즌 1, 2때는 다른 심사위원들이 구급차에 실려 가는 해프닝도 벌어졌을 정도. 그게 이해가 가더라. 그렇지만 밴드 음악이 기본적으로 아주 익숙한 것을 하는 이들보다 다른 것들을 시도하는 편이기 때문에 다른 곳에선 느껴보지 못했던 에너지들을 많이 느꼈다. 그게 없었다면 버티기 힘들었을 것 같다(웃음).

‘위키드’는 아이가 태어나면서 아이들을 위한 음악을 세상에 내놓고 싶은 욕구가 있었다. 동요악상이 자연스럽게 떠올라 동요 제작사를 찾기도 할 때였다. 그러던 찰나에 뜻하지 않게 요청이 와서 바로 승낙했다. 아이들과 함께 한 시간도 행복했지만 체력에 한계를 느껴 그 뒤로도 많은 방송 제의가 들어오고 있지만 어느 정도는 휴식을 갖고 싶어 거절하고 있는 중이다.

뭔가 새로운 포맷의, 나만이 할 수 있는 그러한 음악 프로그램이 있다면 여러 가지 방송을 하기 보다는 전파력이 있건 없건 그 하나에만 매달려서 하고 싶다. 이를테면 ‘배철수의 음악캠프’처럼.

- 가장 친분이 있는 연예인.
 
은미누나. 건모형, 조피디는 가족처럼 가깝게 지내고 있다. 다른 분야의 방송인들 같은 경우 친하게 지내다가도 연락이 오랫동안 끊겨서 다시 연락하기 어색할 때가 있고 그런 경우가 상당히 많다. 아무래도 음악을 하다 보니 음악이라는 공통점이 있으면 더 오래가는 것 같다. 최근 ‘위키드’를 통해 만난 던 유연석도 사람이 진중한 것 같아서 오래보고 싶은 마음이 든다.

- 독신주의였는데 결혼을 전후로 생긴 변화 

결혼 전에는 모든 것에 있어서 음악이 중심이었다. 음악에 방해가 되는 지가 결정을 좌우하는 기준이었을 만큼 큰 의미였다. 결혼 이후엔 그 중심이 나 자신보다 중요했던 음악보다 가정이 되어버렸다. 이렇게 되리라고는 상상도 못했다. 이젠 음악을 버릴 순 있지만 가정을 버릴 수는 없게 됐다.

- 작곡가로서 목표와 계획

내가 세상을 떠난 뒤 100년~1000년 동안 내 이름은 모를지라도 그 때 까지 들을 수 있는 음악을 만드는 것이 꿈이다. 흔히 후진할 때 나오는 ‘엘리제를 위하여’를 듣고 저런 음악 한 번 만들고 싶다고 생각했다.

힐링이 되는 음악, 마음을 따뜻하게 하는 음악처럼 거창하게 생각할 것이 아니라 생활 속에서도 쉽게 접할 수 있는 곡이 생명력이 있는 음악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좋은 멜로디를 만들고 가는 것이 꿈이다.

애니메이션, 영화등 해보지 않은 분야에 대한 도전이 있을 해다. 중국과 관련해 준비 중에 있는 것들도 있고 신보 작업도 12개 정도 프로젝트가 있는데 그것을 잘 마무리 짓고 새롭게 만드는 것이 올해 목표다.

- 팬들에게.

내 음악을 좋아해주는 팬클럽이 있는데 그 친구들이 정말 꾸준하게 좋아해줬다. 중학교 때부터 함께해서 지금은 애기 아빠가 된 사람도 있을 정도. 그런 분들과 함께 최근 방송하면서 새롭게 좋아해주시는 팬 분들까지 다 마찬가지로 윤일상의 개인적인 부분 보다는 내 음악을 넓은 마음으로 봐주시고 고인 것 같으면 채찍질도 해주시면서 꾸준히 음악을 들어줬으면 하는 바람이다.

기획 진행: 조원신, 이주원
포토: bnt포토그래퍼 이호정
의상: 슈퍼스타아이, STCO, 반하트 디 알바자
슈즈: 팀버랜드
헤어: 라뷰티코아 네이슨 팀장
메이크업: 라뷰티코아 경연 디자이너

bnt뉴스 기사제보 fashion@bnt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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