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배우 이청아가 만난 ‘해빙’이라는 갈림길

입력 2017-03-04 08:00  


[김영재 기자 / 사진 백수연 기자] “연기 생활 15년 차라니. 믿기지 않는다”

배우 이청아를 떠올릴 때 제일 먼저 생각나는 작품은 단연 지난 2004년 개봉했던 영화 ‘늑대의 유혹’이다. 배우 강동원 및 조한선과 호흡을 맞췄던 그는 장선우 감독의 ‘성냥팔이 소녀의 재림’ 속 단역으로 데뷔한 지 2년 만에 대중의 진한 눈도장을 받는 행운을 거머쥐었고, 이후 13년 동안 부단히 노력하며 묵묵히 배우의 길을 걷는 중이다.

‘늑대의 유혹’에서 두 남자 사이의 한 여자 정한경을 연기했던 이청아에게 과거 청춘 로맨스 장르로 비롯된 가벼움이 이제는 많이 희석된 것 같다고 이야기하자, 이에 그는 “이제야 제 자리를 찾은 거 같다”며 기뻐했다. OCN ‘뱀파이어 탐정’ 등을 돌이켜 봤을 때 그가 한 이미지에만 고정되는 것은 아마 연기계의 손실이었을 것이다.

“벌써 10년도 더 된 이야기다. 당시 ‘늑대의 유혹’을 비롯해 총 세 편의 영화가 저의 캐스팅을 원했고, 결국 회사에서는 정한경이라는 인물을 선택해줬다.”

“후보작 모두가 ‘늑대의 유혹’ 같은 영화는 아니었다. 개중에는 그것과 상반된 분위기의 영화도 후보로 있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늑대의 유혹’은 분명 제 연기 인생에서 떼놓을 수 없는 분기점이기에, 가끔씩 ’아, 내가 다른 작품으로 시작했으면 지금과는 또 다른 배우 인생을 살았겠구나’라는 생각 하나가 머릿속을 맴돌곤 한다.”

배우에게 작품이란 어떤 인물로서, 무슨 연기를 했다는 포트폴리오의 한 줄이 아닌 미래를 결정하는 갈림길인 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이청아. 그의 필모그래피에 빼곡히 적혀있는 약 서른 편의 영화 및 드라마가 배우로서의 미래를 담보한다는 무거운 고민 아래 선택됐을 것을 생각하니 왠지 출연작들을 역주행하고 싶은 생각마저 든다.

그리고 3월1일 그런 그가 선택한 신작이 관객 곁을 찾아왔다. 수면 내시경 도중 환자의 살인 고백을 듣게 되는 심리 스릴러 영화 ‘해빙(감독 이수연)’이다.

이번 작품에서 이청아는 비밀을 감춘 듯 의도가 의심스러운 간호조무사 미연 역을 맡아, 의사 승훈을 연기하는 배우 조진웅과 앙상블을 이뤘다. 더불어 마주치는 신은 많이 없었지만 55년을 배우로 살아온 신구의 정노인 연기를 먼발치에서 지켜봤다.

“제가 선배님들에게 살갑게 구는 편인데, (조)진웅 선배님에게는 그렇게 못했다. 현장에 갔을 때 선배님이 딱 승훈으로 계시려는 듯한 분위기를 느끼니까 극중 미연과 승훈의 공적인 관계가 촬영 밖 현장에서도 오버랩 되더라. 그래서 선배님과 촬영했을 때는 나란히 각자의 시간을 갖으며, 내내 승훈과 미연의 속도와 친밀함을 유지했다.”

“이번에 언론시사회에서 영화를 보면서 신구 선생님 연기에 감탄했다. ‘어쩜 저렇게 정말 정노인처럼 아무 힘 들이지 않고 연기하시는데, 저렇게 임팩트가 셀까?’ 사실 배우가 ‘자, 나를 봐. 잘하지?’라는 느낌으로 연기하면 거부감만 든다. 하지만 선생님은 마치 카메라가 그 자리에서 돌고 있는 것처럼 자연스러운 연기로 저를 감탄케 만드셨다.”


배우에게 연기는 곧 삶과 동의어라지만, 촬영 중간 쉬는 시간마저 극중 인물의 감정을 유지했다는 이청아의 말을 들으니 그의 연기 열정이 가히 보통은 아님을 짐작할 수 있었다. 그렇다면 15년 차 배우에게도 고민이라는 것이 있는지, 과연 ‘해빙’에서는 어떤 연기 고민과 정면대결하며 그를 갈고 닦았는지 사뭇 궁금증이 샘솟았다.

“연기 생활 15년 차라니. 정말 미친 거 같다. (웃음) 아직도 저는 스스로가 연기의 맛을 봤는지 의문을 갖는 사람이다. 분명 혼자서 뿌듯해지는 연기를 펼쳤던 신이 가끔 있긴 하다. 하지만 다음 작품에 가면 그 느낌이 사라지고 처음부터 재시작하는 기분이 든다. 이어지지가 않는다. 그래서 선배님들에게 왜 연기는 누적이 안 되는지 묻곤 한다.”

“좋은 테이크가 나오면 그 다음 번에는 더 좋은 게 나올 거 같지만, 그것을 재현하려고 하면 오히려 티가 묻으면서 연기가 안 나오더라. 이번에 미연도 그랬다. 티가 나는 바람에 ‘좋은 건 없어. 다시, 다시’라는 생각으로 매번 다른 연기로 촬영했다. 그중 감독님이 좋은 걸 택해주실 거라는 믿음을 가졌는데, 다행히 적절한 것을 완성본에 써주셨다.”

대형 자본이 투입된 촬영장이란 이름의 전쟁터에서 연기라는 총검을 들고 싸우는 배우들의 긴장감은 분명 대단할 것이다. 그럼에도 그 기운에 눌리지 않고, 여러 방향의 노력을 시도하는 그를 보니 자연스레 연기의 껍질인 미연이라는 인물에게 관심이 쏠렸다.

“제가 미연이라는 배역을 맡았을 때부터 감독님과 제 약점, 미연의 역할 등 많은 상의를 거쳤다. 사실 전 몰랐는데 관객들이 저에게 가지고 있는 믿음과 신뢰감이 있더라. 미연과 상반되는 이미지기에 그것을 넘어서야 했고, 예민한 분들은 캐치하실 수 있는 머리 염색 같은 약간의 외모적 변화와 혀 짧은 끈적한 말투를 유지하려고 노력했다.”

“극중 미연의 시스루 의상을 언급하는 분들이 많이 계시다. 제가 군인 역할도 해봤는데, 유니폼을 입는 인물일수록 사복이 정말 중요하다. 제복에서는 감춰져 있던 개성이 사복에서 터져 나오기 때문에 ‘늑대의 유혹’ 때도 김태균 감독님이 엄청 신경을 쓰셨던 기억이 난다. 덕분에 겉과 속, 공과 사가 다른 미연의 개성을 함축적으로 전달할 수 있었다.”


더불어 이청아는 이수연 감독이 그에게 귀띔해준 “미연은 꿈이 없는 친구”라는 이야기를 취재진에게 전달하며 “미연은 참으로 이해하기 어려운 인물이었다”고 술회했다. 그리고 미연을 이해하기 위해 과거를 돌이켜봤다며 자신의 학창 시절을 이야기했다.

“제가 끈기가 없다. 미술부터 글까지 배우긴 참 많이 배웠는데, 2년을 넘긴 게 없었다. 특히 미술은 실기를 너무 늦게 시작해서 제가 원하는 학교를 위해서는 재수를 감수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그때 운명처럼 연극영화과가 생각났고, 지금에 다다랐다.”

“사실 연극영화과 준비 전까지는 ‘나 뭐에 맞춰 공부하고, 어디를 가려고 고민해야 하지?’라는 생각을 달고 살았다. 그리고 그 점이 미연과 저의 교집합이었다. 맞춰서 산다는 것. 하고 싶지 않은 일을 한다는 것. 왠지 미연도 저와 같은 시간을 겪었을 것 같고, 그래서 극중 그런 행동을 한다고 해석했다. 그때부터 캐릭터가 술술 풀리기 시작하더라.”

인터뷰를 마치며 이청아는 이수현 감독에게 약속했던 것을 타인에게 인정받았다며 아이처럼 기뻐했다. 그리고 그런 그의 열연이 녹아든 ‘해빙’을 관객들이 어렵게 받아들이지 않기를 소망했다. 환하게 웃는 그에게 연기란 업(業)이자 흥(興)인 듯 보였다.

“처음에 감독님과 배역 미팅을 할 때 이런 말을 건넸었다. ‘감독님, 저는 현장에서 엄청 혼나고 깨지더라도 자존심 안 상해요. 근데 제 지인들 모시고 영화 틀었을 때 그날만큼은 안 부끄러웠으면 좋겠어요’ 그 바람이 통했는지 언론시사회 때 기자님들이나 관계자 분들이 기교나 욕심을 안 부리려고 했던 제 의도를 알아봐주셔서 감사했다.”

“누군가 영화 감상평을 부탁하면 이렇게 말할 때가 있다. ‘아, 그 영화? 킬링 타임 용으로 괜찮아’ 정말 저희 영화는 킬링 타임 용으로 굉장히 좋다. 더불어 오늘 머리 쓰고 싶다는 분들은 러닝 타임 내내 이야기를 추리할 수 있는 영화기도 하다. 다행히 15세 관람가 등급을 받았는데, 20대 이하가 ‘해빙’을 만났을 때 과연 어떻게 볼지 궁금하다.”


이청아와의 인터뷰는 다른 배우와 비교한다면 개인을 향한 궁금증보다 작품과 연계된 질문이 더 많이 쏟아진 시간이었다. ‘해빙’이 해석 여지가 다양했던 영화 ‘곡성’처럼 반전을 가지고 있는 영화이기에 타 작품보다 이야깃거리가 많기도 했지만, 연기와 관련된 것이라면 무엇이든 장문의 열띤 대답을 내놓는 그의 연기 열정이 그 이유였다.

지금까지 이청아는 신뢰감을 주는 배우였다. 하지만 냉정히 말하면 그것은 지금까지 그가 맡았던 배역이 전달하는 믿음이었다. 그리고 때마침 ‘해빙’이 나타났다.

세상이 크게 변함을 비유하는 상전벽해(桑田碧海)라는 말처럼, 지금껏 연기했던 인물과 확 달라진 미연을 통해 배우 이청아는 자신의 본모습을 보여줄 기회를 얻었다. 앞으로 신뢰라는 외연뿐 아니라 열정이라는 내면까지 인정받을 그의 미래를 기대해본다.

한편 영화 ‘해빙’은 전국 극장에서 상영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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