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험천만 한국 '외통수 외교'…구한말 '고립무원' 재현되나

입력 2019-05-31 17:50   수정 2020-11-15 20:28

국가 간 신뢰의 증표는 비밀을 공유할 수 있느냐다. 미·북 2차 정상회담이 열린 지난 2월 28일 베트남 하노이에서 한·미는 핵심 정보를 나누지 못했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 그의 참모들은 ‘5개 핵시설 폐기’를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에게 요구할 것이라는 점을 청와대와 외교부에 언질조차 하지 않았다. 6월 한·미 정상회담이 다가오는데 양국의 신뢰 회복은 오리무중이다. 미국 워싱턴 정가에선 “한국 정부가 북한과 친해지기 위해 미국을 이용한다는 의심이 파다하다”는 말이 나올 정도다.

31일 아침 인천국제공항. 정경두 국방부 장관은 착잡한 마음으로 싱가포르행 비행기에 올랐다. 제18차 아시아안보회의 참석을 계기로 일본 방위상과 회담하려던 계획은 결국 무산됐다. 수주간 공을 들였으나 허사였다. 청와대는 ‘일본통 조세영’을 외교부 1차관에 배치하며 일본에 ‘투 트랙’을 제안하고 있지만 ‘아베의 일본’은 요지부동이다. 한 일본 전문가는 “일본 언론에서 지한파들의 기사와 사설이 모두 사라졌다”고 말했다.

미·중 패권전쟁의 여파로 대중 외교도 갈팡질팡이다. ‘사드(고고도 미사일방어체계) 갈등’의 먼지가 다시 일 조짐마저 나타나고 있다. 김성한 고려대 국제대학원 교수는 “4강(미·중·러·일) 외교를 대북정책의 종속 변수로 취급하는 ‘외통수 외교’가 지금 같은 사면초가 상황을 초래했다”고 지적했다. 100여 년 전 ‘무능 외교’로 고립을 자초했던 구한말의 재현이라는 우려까지 나온다.

'고립무원' 한국 외교

한국 외교의 중추가 흔들리고 있다. 미·중·일 3강 외교가 동시에 ‘동맥경화’에 걸린 초유의 사태가 벌어지고 있다. 해결 기미도 보이지 않는다. 하나를 풀면 다른 쪽이 꼬이는 형국이다. 북핵과 과거사에 집착하는 정부의 ‘외통수 외교’가 낳은 결과라고 전문가들은 지적한다.



'삼면초가' 韓 외교'
'통화유출' 美와 서먹, '사드' 中과 냉랭, '과거사' 日과 반목


한국 외교, 기댈 언덕이 없다

루캉 중국 외교부 대변인의 지난 28일 발언은 한국 외교의 수준이 어느 정도인지를 적나라하게 드러냈다. 루 대변인은 이날 장하성 주중 한국대사와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 간 환담을 소개하며 “(한국이) 중국의 일대일로(육·해상 실크로드) 참여를 원한다고 했다”고 밝혔다.

외교부는 “일대일로 관련 얘기는 전혀 없었다”고 진화에 나섰지만 미·중 패권전쟁의 불똥이 한국으로 튀기 시작한 시점에서 나왔다는 것이 미묘했다. 우리 정부는 그간 미·중 어느 쪽 편에도 서지 않는 ‘전략적 모호성’을 택해왔지만 28일 루 대변인의 발언으로 취약점이 그대로 드러났다. 신상진 광운대 중국학과 교수는 “중국이 더 이상 중간 지대는 없다는 강한 메시지를 우리 정부에 전달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최근 사석에서 만난 중국 관료 A씨는 미국과의 패권전쟁을 설명하면서 “중국은 이제 힘을 숨기지 않을 것”이라며 “한·중 양국을 이어줬던 경제적 결속이 느슨해지면서 양국 관계도 약화될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전망했다.

전문가들이 한·중 갈등 조짐을 심각하게 보는 이유는 외교적으로 ‘기댈 언덕’이 없는 상황에서 발생한 일이기 때문이다. 미국은 대중 패권 전쟁의 전선을 무역전쟁으로 확대하면서 우리 정부와 기업을 향해 ‘반(反)화웨이 연합군’에 동참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

외교 라인은 개점휴업

엎친 데 덮친 격으로 한·미 간 소통 채널도 원활치 않다. 주미 한국대사관 직원이 한·미 정상 간 통화 내용을 유출한 사건 때문이다. 양국 ‘외교라인’은 사실상 ‘개점휴업’ 상태인 것으로 알려졌다. 외교부는 유출 당사자인 K씨에 대해 파면 결정을 내렸고, 다른 몇몇 대사관 직원까지 징계 대상에 포함시켰다. 조윤제 주미대사는 징계를 면하긴 했지만, 국가비밀을 제대로 관리하지 않았다는 도의적인 책임에서 자유롭기 힘들다는 지적이 나온다. 워싱턴 외교가의 한 소식통은 “대사관을 통한 한·미 간 일상적인 소통은 그대로 이뤄지고 있지만 화웨이, 북핵 등 민감한 현안은 다루기 힘든 상황”이라고 전했다.

6월 말 일본 오사카에서 열리는 주요 20개국(G20) 정상회의를 계기로 한·미 정상이 서울에서 회담할 것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이 같은 ‘불통 사태’는 자칫 엉뚱한 결과를 불러올 수 있다는 게 전문가들의 우려다. 김인한 미국 콜로라도대 정치외교학과 교수는 “문재인 대통령은 북핵 협상 재개를 위해 정상회담을 원하고 있겠지만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대중 패권전쟁에 동참하라고 강력히 요청하는 기회로 삼을 가능성이 높다”고 말했다.

회복 불능으로 가는 한·일 관계

일본과의 관계는 최악을 넘어 회복 불능 단계로 가고 있다. 지난 3월 청와대가 외국 기업 최고경영자(CEO)들을 초청한 자리에서 일본 기업들은 발언할 기회조차 못 얻었다. 청와대와 외교부는 과거사(정치)와 경제를 분리하는 ‘투트랙 전략’을 강조하고 있지만 실제 상황은 딴판이다. 산업통상자원부 장관과 주한 일본 기업 모임인 서울재팬클럽(SJC)의 연례 모임은 우리 측 요청으로 무한 연기됐다.

한국 측의 푸대접에 일본도 같은 방식으로 대응하고 있다. 일본 정부는 남관표 주일대사에게 지난 21일 오전 신임장을 수여하고, 오후에는 외무성에 초치해 강제징용 배상판결과 관련한 중재위원회 개최에 한국이 응하라고 요구했다.

최근에는 윤상현 등 총 20선에 달하는 야당 의원 5명이 일본을 방문했지만 비례대표 초선인 와타나베 미키 참의원 외교방위위원장 단 한 명과의 면담만 성사됐을 정도다. 지난 21일 한반도평화번영포럼 소속 의원단 대표로 일본을 방문한 박병석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박태준 전 국무총리 같은 대일 ‘파이프 라인’이 없다는 것이 너무나 아쉽다”고 한탄했다.

‘잔인한 6월’ 예고…동북아 외교전서 소외

한국 외교가 사실상 ‘실종’ 상태에 빠지면서 6월 치열하게 전개될 동북아 외교전에 우리 정부만 ‘왕따’를 당하는 사태가 발생할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오고 있다. 오는 28일 일본에서 G20 정상회의가 열리지만 한국만 일본 및 중국과의 정상회담 일정을 잡지 못하고 있다. 중·일과 미·일 간 연쇄 정상회담이 확정된 것과는 대조적이다. 일본은 한국을 건너뛰고 북한과 조건 없는 만남을 통해 직접 관계 개선에 나서려는 움직임을 노골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문제는 현재의 꼬인 매듭을 풀 만한 해법이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다. 한 외교 소식통은 “정부가 과거사와 북한 문제 해결에 외교력을 집중시키고 있다”며 “이로 인해 한국 외교가 꼼짝달싹할 수 없는 상황”이라고 말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평양에 ‘트럼프 타워’가 들어서는 날을 북핵 해결의 최종 순간으로 상정하기도 했다. 정한범 국방대 교수는 “중국의 귀엔 한반도가 자국을 위협하는 ‘미국의 송곳’이 될 것이라는 경고성 발언으로 들렸을 것”이라고 해석했다.

임락근/박동휘 기자/베이징=강동균/도쿄=김동욱 특파원 rklim@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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