칭기즈칸, 점령국 '씨' 말렸지만…고려는 유일하게 왕조 지켜낸 나라

입력 2019-08-30 17:06   수정 2019-08-31 00:42


“몽골제국은 정복한 나라의 왕조들을 모두 무너뜨리고 직접 통치했다. 그런데 단 하나, 현지국의 왕이 통치하게 한 예외가 있었는데 바로 고려다.”

13세기 몽골 기마군단의 말발굽 아래 유라시아의 모든 왕국이 초토화됐다. 칭기즈칸은 저항하던 서하제국을 아예 지상에서 쓸어버렸다. 사라센 세계의 중심이던 호라즘제국의 도시들도 철저히 파괴했다. 그리곤 무슬림 세계에 ‘일 한국(汗國)’을 세워 직접 통치했다. 우크라이나의 키예프가 강력히 저항하자 대도시의 흔적을 아예 없애버리고 ‘킵차크 한국’을 세웠다. 중국도 마찬가지다. 송왕조를 없애고 원나라를 세웠다. 그런데 몽골제국에 30여 년을 끈질기게 저항한 고려는 멸망시키지 않았다. 전 세계에서 몽골제국에 거세게 맞선 데 이어 피정복 뒤에도 왕조를 유지한 유일한 나라가 고려다.

약탈전쟁을 정복전쟁으로 바꾼 칭기즈칸

13세기 몽골초원에는 몽골, 나이만, 케레이트, 타타르, 메르키트 등 여러 유목부족이 말과 양떼를 키우며 살았다. 칭기즈칸이 등장하기 전에는 유목민 특유의 ‘약탈-보복의 악순환’이 되풀이되는 약육강식의 초원이었다. 예를 들어 몽골족이 타타르족을 습격하면 타타르인들은 가축을 내다버리고 도망한다. 몽골 병사는 가축을 약탈하느라 적을 추격하지 않는다. 얼마 후 힘을 키운 타타르족이 몽골족을 기습하고 똑같은 약탈과 보복이 반복된다. 칭기즈칸은 초원에서의 게임 룰을 약탈전쟁에서 정복전쟁으로 바꿨다. 병사들의 개인적 약탈을 금지하고, 도망가는 적을 끝까지 추격해 정복하고, 항복한 부족민은 몽골 우르스의 일원으로 받아줬다. 물론 전투가 끝난 후 약탈물은 공정하게 나눴다.

이렇게 몽골 초원을 정복하고 난 뒤 칭기즈칸이 25년간 정복한 땅은 로마제국이 400년간 정복한 땅보다 넓었다. 몽골 기마군단의 압도적 힘은 놀라운 기동성이다. 몽골 병사들은 평균 4~5마리의 말을 끌고 전쟁에 나간다. 2~3일 정도는 말을 갈아타며 계속 달린다. 작은 몽골 말이지만 하루 200~300㎞까지 달리니 서울~부산 거리를 이틀 만에 질주하는 것이다. 원정을 갈 때 병사 한 명의 1년치 식량인 소 한 마리를 육포(보르츠)로 만들어 양의 오줌보에 넣어 말꼬리에 달고 다니니, 다른 군대와 달리 군량미 조달 문제도 없었다.

고구려의 전통을 이어받은 몽골의 기마사술(騎馬射術), 즉 말을 달리며 활을 쏘면 화살이 하늘을 시커멓게 덮고 날아가 적의 갑옷, 방패를 뚫는다. 이 정도면 현대전의 기총소사(機銃掃射) 수준이다. 칼과 창을 들고 맞붙기 전에 승패가 결정된다.


몽골군이 고전한 한반도

그런데 이 같은 몽골군의 기동성과 기마사술이 한반도에 들어와서는 맥을 못 췄다. 우선 대부분이 산지고 질퍽한 논이 많아 말이 신나게 달릴 수 없었다. 더욱이 압록강을 건너면 산성(山城)들이 늘어섰는데, 고려 군사와 백성들이 산성에 들어가 농성을 했다. 공성기(攻城機)를 쓸 수도 없고 몽골 병사가 극히 꺼리는 몸싸움을 해야 했다. 놀랍게도 고려군은 활을 잘 쐈다. 우리 국궁(國弓)은 만궁(彎弓)으로, 둥그렇게 두 번 휘었다. 몽골의 활보다 사거리가 길고 관통력도 뛰어났다.

고려의 만궁은 60m 정도가 유효사거리였다. 이 거리에선 성벽을 공격하는 몽골군의 어깨와 팔을 구별할 정도로 정확히 맞힌다. 말하자면 고려군은 공격엔 약해도 산성에 몸을 숨기고 활을 쏘는 수성(守城)에는 탁월했던 것이다. 귀주성을 공략한 뒤 칠순이 넘은 몽골의 한 장군은 “내가 수많은 전쟁을 겪었어도 이렇게 마지막까지 투항하지 않고 완강하게 싸우는 군민은 처음 본다”고 감탄했다(고려사, 권103). 우리 조상들이 이렇게 활을 잘 쏘니 당태종이 안시성에서 고구려군이 쏜 활을 맞았던 것이다. 몽골의 2차 고려 침공에서는 처인성에서 살리타이가 김윤후의 화살에 맞아 전사하고 몽골군이 철수했다.

다음으로 유목민족이나 한족과 다른 우리 민족 특유의 저항정신이다. 양과 말을 몰며 초지를 떠도는 유목민족은 강한 자가 나타나면 그 아래에 복속한다. 한족도 외적과는 싸우지만 일단 패하고 나면 순종한다. 이 점은 일본인도 마찬가지다. 그런데 역사적으로 우리 민족은 결코 패배를 인정하지 않고 끈질기게 외세에 저항했다. 지배계급만 저항하는 것이 아니다. 항몽(抗蒙)이나 임진왜란 때 보듯이 승려, 농민, 심지어 천인계급까지 외세에 맞섰다. 침략자에겐 아주 당혹스러운 상대다.

이 같은 점도 있지만 고려의 장기간 항몽이 가능했던 것은 또 다른 이유가 있다. 사실 한반도는 칭기즈칸 군대의 주된 공격 목표가 아니었다. 고려의 항몽기간은 1차 침공 때인 1231년부터 8차 침공(1257년) 후 항복하고 1259년 강화도에서 나오기까지 약 30년이다. 이 기간 몽골제국의 주된 적은 금나라와 남송이었다.

고려의 절묘한 입조(入朝)외교

망해가는 명을 따르고 청을 배척하다가 병자호란을 자초한 조선과 달리 고려는 몽골의 내분을 절묘하게 활용했다. 1259년 강화도에서 나온 고종은 몽골에 입조(入朝)하기 위해 태자(훗날 원종)를 몽케 칸에게 보냈다. 몽케 칸은 당시 쓰촨성에서 남송과 싸우다 죽게 된다. 도중에 이 소식을 듣고 태자는 선택의 기로에 섰다. ‘쿠빌라이를 찾아가느냐, 아니면 아리크부카를 찾아가느냐?’ 당시 쿠빌라이는 서거한 몽케 칸의 자리를 놓고 아리크부카와 치열한 쟁탈전을 벌이고 있었다.

“30년간 저항하던 고려의 태자가 스스로 그 먼 길을 찾아와 나에게 따르니 이는 하늘의 뜻(天命)이다.”(고려사, 권25)

쿠빌라이가 자신의 진영을 찾아온 원종을 보고 기뻐서 한 말이다. 이 민감한 시기에 정적이 아닌 자신을 찾아온 것은 고려가 자신을 몽골제국의 새로운 칸으로 인정한다는 엄청난 행운의 징표였다. 5대 칸으로 즉위한 쿠빌라이는 고려의 국호와 왕실을 인정해준다. 이것은 엄청나게 파격적인 항복 조건이다.

고려·몽골 관계 바로 읽기

‘잔인한 몽골군의 침략을 30여 년간 우리 조상이 막아냈다. 왕과 무신정권은 강화도로 천도하고 육지에서는 관군과 백성이 힘을 합쳐 싸웠다. 결국 왕이 항복하고 육지로 나갔어도 삼별초는 난을 일으켜 제주까지 도망하며 끝까지 저항했다.’ 지금까지 아무런 비판의식 없이 배운 자랑스러운(!) 항몽의 역사다.

옛날이나 지금이나 국가의 가장 중요한 의무는 국방이다. 외적이 쳐들어왔을 때 백성을 보호해야 한다. 백성은 육지에서 도륙당하게 내팽개치고 지배계급만 강화도로 도망간 것이 과연 잘한 것인가? 우리 역사는 전통적으로 천도를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그런데 1970년대 이후 무신정권이 주도한 천도를 부정적으로 평가하는 견해가 등장하기 시작했다. ‘최씨 무신정권은 항복하면 자신들의 권력 유지가 어렵다고 생각해 몽골군과의 적극적 싸움을 회피하고 강화로 천도했다’는 식의 비판이다.

백성을 진정으로 생각한 무신정권이라면 육지에서 결사항전을 하며 몽골군을 물리쳤어야 했다. 힘으로 막을 자신이 없으면 몽골이 입조를 요구할 때 화친해 백성을 보호했어야 했다. 이 점에선 차라리 한족왕조 한(漢)과 송(宋)이 우리보다 현명했다. 흉노, 거란이 강할 때 비단, 은, 공주를 보내 화친하며 어쨌든 백성을 보호하지 않았는가.

우리 역사는 몽골에 끌려가 천역(賤役)을 한 공녀의 비참함을 강조한다. 그런데 몽골의 역사를 보면 좀 다르다. “몽골의 황금씨족 청년들은 모두 몽골리안 처녀와 결혼해야 된다.” 신라의 성골같이 칭기즈칸 직계 순수 혈통인 ‘황금씨족’만은 같은 몽골리안 여인과 결혼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니 이들이 장가가려면 몽골 초원, 아니면 북방 몽골리안에 속하는 위구르, 거란, 그리고 고려에서 배우자를 찾을 수밖에 없었다.

공녀로서 고초도 많았지만 몽골 기록을 보면 고려 여인들의 상당수가 귀족의 부인이 됐다. 혜종의 황후같이 몽골제국의 황후도 세 명이나 나왔다. 진짜 비참했던 것은 당나라에 노예 신분으로 끌려간 고구려의 지배계층이었다. 어쩌면 역사적으로 한족이 북방 몽골리안보다 우리에게 더 잔혹했는지 모른다.

요즘 중화민족의 위대한 부흥을 꿈꾸는 중국은 칭기즈칸마저 ‘차이니스’로 포장하고 있다. 이건 명백한 역사 왜곡이다. 몽골제국은 북방 몽골리안으로서 수억 명의 한족을 100여 년간 지배했다. 원나라의 4등급 신분제에서 남송의 한족은 최하위계층 취급을 받은 반면 고려는 같은 북방 몽골리안 세계의 혈연국가로서 상당한 예우를 받았다. 한 번쯤은 되새겨볼 만한 역사다.

안세영 < 성균관대 특임교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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