숙고하는 개인과 높은 수준의 리더십…위기 돌파하는 '쌍두마차'

입력 2019-08-30 17:31   수정 2019-08-31 00:14


가장 큰 위기는 자신과 자신이 속한 공동체가 ‘위기에 봉착했다’는 사실을 모르는 무식이다. 가장 절망적인 위기는 그 위기를 타개할 전략가가 없다는 사실이다. 전략가란 위기가 다가왔을 때 대중이 다 알거나 원하는 대책이 아니라 자신의 판단을 숙고할 화두를 던져 대중이 감동하고 승복할 만한 청사진을 제시하는 자다. 그런 흠모할 만한 청사진은 과학자 아인슈타인이 상대성이론을 고안할 때 사용했다는 오랜 ‘사고실험’ 훈련을 통해 만들 수 있다. 국가적 위기를 극복할 수 있는 역량은 숙고하는 국민과 이해관계로 복잡하게 얽힌 그들의 염원을 수렴해 최소공배수를 산출하는 예술이다. 소용돌이처럼 휘몰아치는 정세에서 무엇이 정의이고 무엇이 자유이며, 무엇이 공정이고 무엇이 최선이냐는 이데올로기 싸움 양상으로 가면 그 공동체는 희망이 없다.

위기

태권도를 배우기 시작해 노란 띠나 파란 띠 정도의 실력을 가진 자들이 항상 상대방을 무시하고 싸움을 건다. 검은 띠 수련을 마친 사람은 쓸데없이 상대방을 자극하거나 자신의 발차기를 보여주지 않는다. 그는 오랜 세월 수련을 통해 상대방의 마음과 움직임을 미리 알고 급소의 허점이 보일 때 조용하고 신속하게 공격한다.

기원전 5세기 그리스는 오늘날 대한민국처럼 위기에 빠졌다. 지금의 이란 지역에서 페르시아 제국이 등장해 그리스에 곡식을 공급하던 곡창지대인 이집트와 그리스인의 정신적 고향인 소아시아를 정복해 식민지로 삼았다. 그리스 반도의 많은 도시 중 아테네는 깊은 고민에 빠졌다. 삼면이 바다로 둘러싸여 해상무역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지만, 지중해 항구들은 이미 페르시아 제국의 소유가 됐다. 그리스인들은 군주정치를 기반으로 한 페르시아 제국을 이길 힘은 ‘위대한 개인’과 그 위대한 개인이 리더가 되는 ‘민주주의’라고 판단했다.

‘위대한 개인’의 탄생

그리스의 전범(典範)이 담겨 있는 호메로스의 <일리아스>와 <오디세우스>의 가치는 전쟁을 통해 획득된다. 경쟁을 통한 승리가 가져다주는 ‘명성’과 이후 ‘귀향’을 찬양하는 그리스의 디오니시아 종교축제를 기원전 5세기 아테네에 등장한 ‘민주주의’를 위해 정교한 정치교육으로 탈바꿈시켰다.

기원전 6세기 아테네 참주였던 페이시스트라토스(Peisistratos·기원전 600~527)는 디오니시아를 도시축제로 제정했다. 아테네는 왕정시대를 종결하고 유능한 지도자에게 통치권을 이양하는 참주시대로 진입했다. 페이시스트라토스와 그의 두 아들 히파르코스와 히피아스는 참주시대 지도자들이다. 당시 아테네는 평지에 거주하는 지주계급인 페디에이스(pedieis)와 해변에 거주하며 해상무역에 종사하는 파랄리오이(paralioi)들이 정치적 주도권을 잡고 있었다. 페이시스트라토스는 참주 권력을 강화하기 위해 가난하지만 다수였던 히페라크리오이(hyperakrioi), 즉 ‘산지에 사는 이들’의 전폭적 지지를 받으려 했다. 이들이 아테네 민주주의의 주역이 된다.

귀족이란 뜻의 영어단어 ‘아리스토크랫(aristocrat)’은 숨겨진 본래 의미가 있다. ‘자신에게 주어진 의무를 깨닫고, 그것을 발휘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 사람’이란 뜻이다. 그리스 철학자 플라톤은 아레테(arete: 어떤 종류의 우수성, 또는 도덕적 미덕)를 ‘인간 노력의 탁월함’으로 발전시킨다. 그는 아레테를 가르칠 수 없다고 말한다. 그것은 인간 내면에서 노력하는 과정에 서서히 등장하기 때문이다. 아레테는 자신이 최선을 이루겠다는 결심과 노력이다. 운동선수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최선을 다하겠다는 지속적인 마음이다. 자신이 무엇을 이뤄야겠다는 확신, 이를 지속적으로 완성해나가려는 겸손에서 아레테는 시작한다.

그리스 교육체계는 암기가 아니라 참여다. 매일 체육관에서 운동을 통해 육체를 연마하는 것과 같다. 그동안 알지 못하던 세계로 진입하기 위해 자신의 무식을 인정하는 비판적인 사고를 통해 무아(無我) 상태를 연마해 정신적인 최선을 지향한다. 거기에는 사지선다가 없다. 시험에서 중요한 것은 좋은 성적이 아니라 경쟁이다. 이들은 육체적으로 올림픽 경기를 통해 경쟁하는 것처럼 시·산문·연극·음악·그림·연설을 통해 아레테를 연마했다.

아리스토크랫은 자신에게 주어진 육체적·정신적 환경에서 벗어나 다른 사람의 입장에서 자신을 바라보는 연습을 끊임없이 한다. 타인의 다양한 마음을 진실로 이해하고 그들 입장에서 세상을 바라보는 연습이 공부다. 이런 공부를 많이 한 사람은 다른 사람들의 희로애락을 자신의 것처럼 상상하고 느낄 수 있는 능력의 소유자다. 이에 따라 공동체는 그를 지도자로 인정해 자연스레 그를 ‘선’과 ‘존경’의 화신으로 여긴다.

그리스어로 ‘티메(time)’는 아레테가 가져다주는 명예(名譽)다. 육체적·정신적으로 최선을 지향하는 노력이 아레테다. 스스로 최선을 이뤘다고 생각하는 순간, 아레테는 떠나버린다. 오랜 연마를 통해 아레테에 이른 이에게 공동체는 공적으로 명예를 부여한다. 개인이 아무리 탁월하다 하더라도 도시라는 공동체 안에서 자연스럽게 드러나 인정받아야 한다. 명예는 한 개인이 자신의 고유 임무를 훌륭하게 완수하길 시도할 때 공동체 구성원이 그에게 주는 신의 선물이다.

‘위대한 정치제도’ 민주주의

고대 그리스 아테네는 기원전 500년 이전에 존재하지 않았던 새로운 정치제도인 ‘민주주의’를 실험하기 시작했다. 새로 등장한 이 제도는 불안정했다. 철학의 시조인 소크라테스, 그의 수제자인 플라톤과 크세노폰은 아테네 민주주의의 실효성을 의심하고 비판했다. 크세노폰이 저자는 아니지만 그의 이름으로 출간된 <아테네 정체에 관하여>라는 소책자에서 그는 아테네 민주주의를 민중을 위한 정치체계로 한정했다. 사회악을 만연시키고 ‘최선의 질서’ 추구에는 관심이 없다고 평가한다.

민주주의가 안정적 정치제도로 정착하고 모든 시민을 위한 정치제도가 되기 위해서는 다음 세 가지가 필요하다. 첫째는 사회 구성원의 의견을 수렴하고 숙고해 모든 사람이 수용할 수 있는 제도다. 제도는 수많은 시행착오를 거쳐 서서히 정착된다. 둘째는 그 민주주의의 원칙을 잘 이해하는 시민집단이다. 시민들은 학교 교육을 통해 폭넓은 교양과 다양한 세계관을 배우고, 미디어를 통한 시민 교육으로 숙고하는 인간이 된다. 민주주의의 성공은 숙고하는 개인의 수에 달려있다. 숙고하는 개인은 민주주의의 근간이다. 세 번째는 높은 수준의 리더십이다. 리더는 위급한 사태에 직면해 다양한 사람의 지혜를 경청하고 공동체를 위한 최선의 방안을 시민들에게 설득하는 자다. 이 세 가지 정치제도 중 가장 중요한 요소는 리더다.

대부분 정치가는 대중의 욕망과 편견에 부합하거나 부추기는 말을 통해 인기를 얻는다. 페리클레스는 매년 자신의 신임을 대중에게 물어야 하는 취약한 상황에도 불구하고 민중에게 아첨하거나 그들의 편견에 편승하지 않았다. 그는 아테네 시민들이 당면한 현실이 아무리 절망적이라고 할지라도 있는 그대로 전달했고, 그와 함께 대처해나가자고 설득했다. 페리클레스는 아테네 시민 스스로가 만든 공포를 초월하자고 설득했고, 단기간의 이익에 탐닉하지 말자고 촉구했다. 그는 필요하다면 시민을 꾸짖고 그들의 분노도 감수했다. 토론이 민주주의 정책 결정의 중요한 보루이기 때문에 민주시민은 현실을 있는 그대로 직시하는 직언을 들었다.

아이스킬로스, 소포클레스, 그리고 에우리피데스는 민주주의의 성공 요인을 시민 교육에서 발견했다. 페리클레스는 아테네 시민에게 물질적 풍요뿐만 아니라 정신적이며 영적인 비전을 제시했다. 아테네 시민들은 이 비전으로 자신의 일상이 던지는 어려움조차 인내로 극복하는 삶의 지혜를 얻게 됐다.

아테네가 기원전 6세기 인류 최초로 ‘민주주의’란 개념을 만들어내고 그 제도를 과감하게 실행한 원동력은 무엇인가? 민주주의는 천재들의 상상력의 결과인가? 이전엔 한 번도 존재하지 않았던 혁명적이고 파격적인 정치 형태가 실행되기 위해서는 어떤 과정과 절차가 필요했나? 민주주의라는 고귀한 가치와 제도는 시민의 자발적 참여와 높은 수준의 교양을 필요로 한다. 민주주의가 한 사회에 정착하기 위해서는 성숙한 시민의식이 필수적이기 때문이다.

배철현 < 작가 ·고전문헌학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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