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환기 예술을 키운 건 저 다도해 풍경과 바람…이제는 두 섬이 만나 하나의 섬이 되었네

입력 2019-10-06 14:41   수정 2019-10-06 14:42

‘한국 출신 화가 중 가장 그림값이 비싼 화가’로 꼽히는 수화(樹話) 김환기 화백(1913~1974). 그가 태어나 자란 곳은 섬이다. 신안의 섬 안좌도(安佐島). 그래서 안좌도 읍동마을에는 그가 살던 집이 국가민속문화재 제251호로 지정돼 보존되고 있다. 현재 소유자는 신안군이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생가에는 그의 대표작들의 복사본도 찾아볼 수 없다. 저작권 때문이다. 딱 한 점의 그림만 복사본이 걸려 있는데 대중에게는 잘 알려지지 않은 ‘요코하마 풍경’이란 작품이다. 그나마 이 그림이라도 걸려 있는 것은 김 화백이 결혼하기 전 고향에서 작품 활동을 할 때 사촌 동생에게 선물했기 때문이다.

안창도와 기좌도가 합쳐진 안좌도

신안군에서도 김 화백의 고향인 안좌도에 김환기 미술관을 세우려 했으나 무산됐다. 김환기미술관이란 이름의 사용을 허락받지 못한 까닭이다. 예술가에게 고향이 어떤 곳인가. 그가 살아 있었다면 그의 고향이 그토록 천대받도록 했을까. 고향을 떠나면서 소작농들에게 자신 소유의 논밭 모두를 나눠줬던 수화가 아닌가! 저작권이나 상표권도 소중한 것이니 누구를 탓하자는 뜻은 아니다. 외방을 떠돌던 수화가 내내 그리워했을 고향 섬을 생각하면 그저 안타까울 뿐이다. 그의 고향 섬에도 김환기란 이름을 가진 미술관이 꼭 생기길 소망한다. 수화의 뜻도 다르지 않을 것이다.


수화는 1913년 안좌도(당시에는 기좌도) 읍동마을에서 태어났다. 수화는 유년기를 섬에서 보내고 중학교 때 경성으로 유학을 갔다. 하지만 곧 중퇴하고 일본으로 떠나 그림을 공부한 뒤 1937년 귀국했다. 1974년 7월 수화는 뉴욕에서 뇌출혈로 쓰러져 지구별을 떠났다. 지금 수화의 생가는 한 채만 덩그러니 남아 있지만 원래는 마당과 공원 자리에도 몇 채의 행랑채들이 ‘뚤래 뚤래’ 들어앉아 있었다. 생가에 바로 인접한 오른편 집도 김 화백의 사랑채였다. 그 집에는 수화가 그림을 그리던 작업실도 남아 있다. 생가 뒤편 언덕에도 집이 또 한 채 있는데 그 집은 수화 가문이 세운 서당이었다.

안좌도는 49㎢의 땅에 3000여 명이 사는 제법 규모가 큰 섬이다. 안좌도는 본래 하나의 섬이 아니었다. 안창도의 남강리와 기좌도의 향목마을 사이 바다가 매립되면서 하나의 섬이 됐다. 두 섬의 이름에서 한 자씩 따와 안좌도라는 새로운 섬으로 재탄생한 것이다. 안좌도가 두 개의 섬으로 나뉘어져 있을 때 김 화백의 집은 기좌도였고 대지주 집안이었다. 김 화백이 태어난 집은 생가 바로 앞 길 건너에 있는데 지금은 다른 주인이 살고 있다. 남아 있는 생가는 김 화백의 아버지가 새로 건축해서 이사 온 공간이다.

음기를 누르기 위해 남자 성기 모양 바위 세워

수화는 새로운 공간에서 습작하고 작품 활동을 했다. 생가 입구 대문 앞에는 고인돌처럼 생긴 큰 바위가 하나 있는데 청년 김환기는 자주 그 바위에 앉아서 바다를 보며 스케치를 했다 한다. 그가 즐겨 찾던 또 한 장소는 생가 건너편 안산 꼭대기에 있는 부엉이 바위였다. 그 바위에 앉으면 다도해 섬들이 한눈에 들어왔다. 오른쪽은 하의도, 왼쪽은 해남반도까지 드넓게 펼쳐진 섬과 바다와 남도 산자락들. 그 풍경이 수화의 예술 세계를 성장시킨 자양분이었다. 1942년 수화는 안좌도를 떠났다. 살던 집은 팔았고 서당은 국민학교 선생들의 사택으로 기증했다. 또 그 넓은 농토들은 모두 농사를 짓고 있던 소작인들에게 무상으로 나눠 줬다 한다. 더 없는 미담이다.

이 땅 어느 산천을 가도 있게 마련이지만 안좌도는 유난히도 성기를 지칭하는 이름의 바위들이 많은 섬이다. 이 마을에서는 모두 여자 성기 모양의 바위들은 나무를 심어서 가려버렸다. 마을 여자들이 그 바위를 보면 바람이 나거나 오줌소태가 걸린다는 기이한 이유 때문이었다. 그러면서 정작 대리마을처럼 남자 성기 모양의 바위는 버젓이 들판 한가운데 세우기도 했다. 음기를 누르기 위해서라는 것이 이유였는데 참으로 특이한 상상력이다. 남자 성기 모양의 바위를 세운 것은 마을의 남자 원로들이었는데 그들은 정말 남자 성기가 여자들의 음심을 없애준다고 믿었던 것일까? 지금도 대리마을 들녘 한가운데에는 두 개의 남근 바위가 우뚝 서 있다. 마을 사람들은 망주석이라 부르기도 한다. 마치 남근석을 문필봉이라 불렀던 것과 같은 맥락이다. 이 바위가 세워진 것은 대리 마을 동북쪽에 있는 후동산(151m) 정상부의 여근바위 때문이다. 10m나 되는 거대한 바위인데 사람들은 여성 성기를 지칭하는 바위라 부른다. 역시 그 명칭이 민망한 이들은 공알바우라 부르기도 한다.

옛날 대리 마을 여자들은 바람기가 많기로 유명했다고 한다. 마을의 원로들은 바람기가 많은 원인이 후동산의 바위 때문이라고 지목했다. 결국 여성 성기 모양의 바위 주변에 소나무를 심어서 바위를 가려 버렸다. 그래도 걱정이 그치지 않았던지 마을의 원로들은 작당하여 마을 입구에 남근석 2기를 세웠다. 음기를 제압하기 위한 신앙적 행위였다. 하지만 바람나는 것이 여자들 탓이기만 했을까. 손뼉도 마주쳐야 소리가 나지 않던가. 남자들은 자신들의 바람기를 여자들에게 누명 씌우고자 했던 것은 혹시 아닐까. 그 후 대리 마을 여자들의 바람기가 잠잠해졌다는 후일담은 없다. 사람 사는 곳에 어찌 바람 잘 날이 있을까. 대리마을 남근석은 오늘도 저토록 우뚝하고 후동산 여근 바위 아래 계곡에는 여전히 맑은 물이 고이고 있을 테니 말이다.

선사시대와 고대문명의 흔적 즐비

안좌도에는 우실도 많이 남아 있다. 우실은 ‘울실’ ‘마을의 울타리’라는 뜻이다. 보통 숲이나 돌담으로 만들어졌는데 실용적인 목적과 신앙적 의미가 함께한다. 강한 바닷바람의 습격으로부터 농작물과 가옥을 보호하려는 현실적 목적과 외부로부터 찾아드는 액운도 막아보겠다는 비보(裨補)적 의미로 조성한 것이다. 그중 대표적인 것은 대리마을 팽나무 우실이다. 북서풍을 막아내기 위해 조성된 방풍림이다. 팽나무는 유독 바닷가에서 잘 자란다. 그래서 포구나무라고도 한다. 120여 그루의 팽나무 고목들이 마을 숲을 이루고 있는 모습은 경이롭다. 한 그루 한 그루가 다 천연기념물감이다. 우실 숲이 조성된 것은 400여 년 전이다.


대리마을의 농토는 본래 갯벌이었다. 안창도와 기좌도가 하나로 연결되기 전 대리마을은 안창도에 속했었는데 겨울이면 바다에서 거센 북서풍이 불었다. 이 바람을 막아내기 위해 대리마을 사람들이 방풍 숲을 조성했던 것이다. 우실로 인해 마을은 400년 동안 안전을 보장받았다. 마을 숲 하나를 가꾸는 데도 백년대계의 비전을 가지고 추진했던 섬사람들의 지혜. 도시재생이나 마을 살리기 같은 사업을 하면서 3~4년 만에 성과를 내겠다고 안달을 하는 요즘 우리 세대는 얼마나 소견머리가 짧은가. 대리마을 우실 숲에서 문득 깨닫는다.

안좌도에는 선사시대와 고대 문명의 흔적들이 즐비하다. 읍동의 안좌고등학교 뒤편에는 백제시대 석실고분 2기가 있다. 본래는 3~4기가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는데 일제강점기에 도굴되고 파괴되면서 2기만 남았다. 석재들도 다른 용도로 사용돼 유실되고 말았다. 주민들은 오랫동안 이 무덤들의 실체를 몰랐던 탓에 ‘고려장’이라 불렀다. 대리마을에도 3기의 석실분이 있다. 이 고분들은 마을에서 남동쪽으로 800m쯤에 위치하는데 ‘배널리’라고 부르는 바다와 인접해 있어 배널리 고분군이라 부른다. 옛날에는 몰무덤이라 불렸다. 2011년 동신대 박물관 조사단의 발굴 작업으로 3호분에서 5세기께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는 투구, 갑옷과 함께 칼과 창 각 5자루, 화살촉과 옥 수십 점이 출토됐다. 이 고분들은 가야계 수혈식 석곽분이고 갑주와 무기를 무더기로 부장하는 것은 가야의 풍습이다. 그래서 배널리 고분은 가야와 관련된 인물의 무덤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들 석실분과 유물은 안좌도가 고대 해양 교류의 근거지였고 섬에 강력한 군사집단이 주둔했다는 증거다. 배널리 고분군은 토착 해상 세력의 존재와 함께 고구려의 남진정책에 밀리면서 백제가 쇠퇴한 틈을 타고 가야와 신라, 왜가 서남해 섬들과 연안으로 진출했던 흔적으로도 추정되고 있다. 나주 영동리 고분, 영암 옥야리 고분, 해남 만의총 3호분, 담양 서옥고분 등이 모두 배널리 고분군과 같은 유형의 유적들이다.

칠성신앙을 신봉했던 칠성바위 남아 있어

지석묘라고도 하는 고인돌은 청동기시대의 대표적 무덤 양식이다. 돌을 고였다 해서 고인돌이다. 한반도에서 발견된 고인돌은 세계 고인돌의 40%에 해당할 정도로 많다. 남한에서 3만여 기, 북한에서 1만5000여 기가 발견됐다. 한반도야말로 거석문화의 본고장이었던 것이다. 안좌도에서 가장 규모가 큰 것은 방월리 고인돌군이다. 크게 4개의 무리 수십 기가 마을 곳곳에 산재해 있다. 그중 마을 우물가의 고인돌들은 칠성바위라 불리는데 매년 정월 보름날 거행되던 방월 마을 당제의 아랫당이기도 했다. 칠성바위는 본래 7기의 고인돌이 있었는데 도로 공사를 하면서 일부가 파손돼 버렸다. 고인돌 아래에서는 돌칼과 돌화살, 민무늬 토기 등이 출토됐다고 한다. 칠성바위란 이름은 안좌도 사람들이 칠성 신앙을 신봉했던 증표다.

칠성 신앙은 북두칠성을 신격화한 성신 신앙인데 칠성신은 인간의 수명과 부귀와 강우 등을 관장하는 신으로 신앙됐다. 칠성바위 아래는 마을의 공동 우물이 있다. 한때는 95가구 500여 명 넘는 사람들이 이 물을 길어 먹고도 남을 만큼 물이 풍부했다. 그야말로 칠성님 덕분이 아니었을까. 그래서 마을 사람들은 당제 때뿐만 아니라 명절 때에도 샘에 밥을 지어서 올리곤 했다. 생명을 주는 생명수인 샘. 선사시대 무덤인 고인돌이 칠성님이 되어 수천 년 섬사람들에게 생명의 물을 주었다. 바위가 어찌 그냥 바위겠는가! 신성한 신물이 아니겠는가. 고인돌은 안좌도 신들의 처소다.

■강제윤 시인은

강제윤 시인은 사단법인 섬연구소 소장, 섬 답사 공동체 인문학습원인 섬학교 교장이다. 《당신에게 섬》 《섬택리지》 《통영은 맛있다》 《섬을 걷다》 《바다의 노스텔지어, 파시》 등 다수의 저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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