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동휘의 베트남은 지금] 동아시아 '그레이트 게임', 한반도와 베트남의 운명

입력 2019-11-27 10:26   수정 2019-12-27 00:31


지정학은 국제 정치를 인문지리학의 눈으로 바라보는 학문이다. 동아시아를 분석할 때 지정학은 아주 유용한 분석 도구다. 예컨데 지도상에서 한반도와 베트남, 중국의 경계선을 지워보자. 가만히 들여다보고 있으면, 떠오르는 동물이 하나 있다. 닭이다. 한반도는 중국이란 거대한 닭의 주둥이쯤에 있고, 베트남은 다리에 해당한다는 걸 깨닫게 된다.

대륙을 차지한 중국의 역대 왕조들은 주둥이와 다리를 잃지 않으려 치열한 정복 전쟁을 벌였다. 한나라 무제가 대륙을 통일한 직후에 한반도에 한사군(漢四郡)을, 베트남 일대에 한구군(漢九郡)을 둔 것은 중국의 관점에서 볼 때 탁월한 선택이었다. 중국의 숱한 공세에도 불구하고, 한반도와 베트남은 끝까지 정체성을 지켜냈다. 부리와 다리가 흥하면, 몸통이 쇠했다. 고구려 정복에 실패한 수나라는 패망했고, 안시성을 정복하지 못한 당의 이세민도 그 이후로 기세가 꺾였다. 위대한 몽골군의 남정(南征)이 타의에 의해 멈춰 선 곳도 베트남 땅이다. 쩐 왕조는 두 번이나 몽골군을 패퇴시켰다.

근대의 여명과 함께 새로운 ‘플레이어’들이 동아시아 국제 질서에 추가되면서 상황이 보다 복잡하게 돌아가기 시작했다. 산업혁명과 해군을 등에 업은 양이(洋夷)들은 수백년 전 그들의 선조들이 경계했던 황화론(黃禍論)를 실천에 옮겼다. 베트남을 포함한 인도차이나 반도가 프랑스의 수중에 들어가고, 서양보다 더 서양이고 싶어했던 일본이 한반도와 만주를 차지하자 중국은 갈기갈기 찢겼다. 침략자들은 중국을 병자라며 비아냥 댔다. 몸통이 쇠했으나 이번엔 부리와 다리도 고통을 감내해야 했다. 대륙에 붙어 있는 반도국이라는 숙명의 가혹함은 변하지 않았다.

2차 세계대전 이후 한반도와 베트남은 전쟁으로 수백만명의 죽음을 제물로 바쳐야했다. 나치가 촉발한 ‘유럽 전쟁’에 참전함으로써 특유의 고립주의를 버린 미국은 중국, 러시아 등 대륙 세륙을 봉쇄하는데 총력을 기울였다. 붉은 깃발로 뒤덮힌 중국과 러시아는 미국의 지속적인 산업 발전에 방해물이었다. 오랫 동안 해양에서 우위를 보인 서양은 에너지와 물자가 오가는 바다를 지키기 위해 중국을 대륙에 묶어놓고자 했다.

닭의 형상을 닮은 지정학적 ‘게임의 룰’은 지금까지도 동아시아를 지배하고 있다. 이번엔 대륙에서 해양으로 뻗어가려는 ‘시진핑의 중국’과 이를 저지하려는 ‘트럼프의 미국’이 맞닥뜨렸다. 19~20세기 초 영국과 러시아가 중앙아시아 내륙의 주도권을 놓고 벌였던 패권 다툼에 ‘그레이트 게임’이란 명칭이 붙여졌다면, 미·중의 패권 전쟁은 ‘그레이트, 그레이트 게임’이다. 한반도와 베트남이 또 다시 전장(戰場)이 될 수 밖에 없음은 정해진 운명이다.

총성만 없을 뿐, 전쟁은 이미 시작됐다. 한반도 남쪽에 미군의 사드(고고도 미사일 방어체계)가 들어서자 중국이 경제 보복에 나선 건 전초전에 불과하다. 미국은 오랜 동맹국에 주한미군을 무기 삼아 협박을 일삼고 있다. 거액의 방위비를 부담하고 미국의 보호를 받던가, 아니면 북·중·러 등 대륙 세력에 의존하라는 양자택일을 강요하고 있다.

베트남은 ‘사회주의 혈맹’인 중국과 자국 동해(남중국해)의 영유권을 놓고 치열한 공방을 벌이고 있다. 중국이 보기에 베트남은 인도양과 태평양으로 ‘일대일로’를 확장하는데 장애물이다. 양국은 1979년에도 ‘중·월 전쟁’으로 불리는 국경 분쟁을 치렀다. 중국은 캄보디아와 라오스를 경제 식민화하면서 베트남을 고립시키고 있다. 베트남과 국경을 접한 캄보디아 남단의 휴양지인 시아누크빌을 거대 ‘차이나 타운’으로 만들었다. 베트남의 대표 휴양지인 푸꾸옥에서 불과 수킬로미터 떨어진 캄보디아 캄포트엔 중국의 해군 기지가 건설중이라는 소문이 파다하다. 중국은 베트남에 앙심을 품고 있는 캄보디아를 활용해 ‘사회주의 혈맹’을 압박하고 있다.

사정이 이렇자 베트남은 미국을 우군으로 끌어들이려 하고 있다. 중국이 자국 영해라고 주장하는 스트래틀리 제도 인근의 블루웨일 가스전 개발을 미국의 거대 에너지 그룹인 엑손모빌이 맡은 것은 ‘게임’의 양상을 정확히 웅변해준다. 1968년 미 해병대가 첫 발을 디뎠던 베트남 중부에 약 50년 만에 미 항모가 정박했다. 지난 20일 하노이를 방문한 마크 에스퍼 미 국방장관은 자유롭고 안전한 항행 자유를 실현하기 위해 동맹국을 방문했다고 밝혔다. 베트남은 미국산 LNG(액화천연가스) 수입을 검토하고 있다고 밝혔다.

베트남이 반중, 친미의 길로 가고 있다고 단정하기는 어렵다. 베트남의 지식인들은 현재의 상황을 “미·중의 갈등에 끼여 있다”고 표현한다.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하고 있다는 얘기다. 베트남 사람들의 오랜 반중 정서에도 불구하고, 중국과 베트남 공산당은 공동운명체나 다름없다. 아무리 갈등이 고조되더라도 양국 공산당의 ‘핫라인’은 유지된다.

‘차이나 머니’는 이미 베트남 곳곳에 깊숙히 스며들어 있다는 게 정설이다. 중국은 민간의 탈을 쓴 국영기업들을 베트남에 진출시키고 있다. 그들이 달러를 가득 실은 트럭을 라오까이, 랑선 등 베·중 국경을 넘어 베이징으로 가져간다는 설이 파다하다. 중국 공산당과 군부에 베트남은 어쩌면 비자금을 만드는 주요 통로일 지도 모를 일이다.

전문가들은 해양과 대륙 세력의 갈등이 앞으로 더 지속될 것으로 보고 있다. 여시재는 ‘석유의 시대’가 가고, ‘가스의 시대’가 도래했다고 진단했다. 셰일 혁명으로 세계 1위 가스 수출국으로 부상한 미국이 일본, 호주, 한국에 이어 베트남을 ‘가스 동맹’으로 끌어들이려 하고 있다는 것이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실각한다해도, 에너지 안보에 관한 미국의 외교 정책은 변하지 않을 것이라는 얘기다. 한반도와 베트남은 또 다시 가혹한 운명의 늪에 빠질 것인가.

박동휘 하노이 특파원 donghuip@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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