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은 잡념 싹 씻어주는 '신안 순례길'…느릿느릿 걷다보면 어느새 섬 한바퀴

입력 2020-01-12 15:19   수정 2020-01-12 15:21

서울 사람들은 겨울에 서울이 추우면 전국이 다 추운 줄 안다. 하지만 남쪽 섬들의 상황은 완전히 다르다. 서울이 영하 10도일 때 남쪽 섬들은 영상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무려 10도 이상 따뜻하다. 그래서 남쪽 섬의 들판에는 한겨울에도 노지 배추와 시금치와 마늘과 대파가 자란다. 그 연하디연한 상추까지도 노지에서 자란다. 남쪽 섬들이 따뜻한 것은 해양성 기후 때문이다. 아주 혹독한 강풍이 부는 날이 아니라면 남쪽의 겨울 섬은 늘 따뜻하다. 그러니 추위 따위는 걱정하지 말고 겨울에는 무조건 남쪽 섬으로 떠나시라. 섬을 걷기에 가장 좋은 때가 겨울이다. 그 어느 때보다 한적하고 고적해 자신의 내면과 대면하며 걷기 좋다. 겨울에 피어나는 진짜 동백과 만날 수 있는 행운은 덤이다. 겨울에 걷기 좋은 남쪽 섬들을 소개한다.

감동의 현장 기점도, 소악도 순례자의 길

날마다 모세의 기적보다 더한 기적이 일어나는 섬들. 신안의 섬 기점, 소악도에서는 날마다 기적이 일어난다. 잠깐 물이 갈라지는 정도가 아니라 바다가 통째로 사라졌다 나타나길 반복하는 엄청난 기적이다. 밀물이면 바다가 됐다가 썰물이면 땅이 되는 갯벌. 이 부근에는 대기점도, 소기점도, 소악도, 진섬 등 네 개의 섬이 나란한데 이 섬들 사이에는 모두 노두길이 놓여 있다. 갯벌에 놓인 징검다리가 노두다. 요즈음은 포장이 돼 자동차도 다닐 수 있게 됐지만 부르는 이름은 여전히 노두길이다.

그런데 최근 이 노두길을 걷기 위해 섬을 찾는 이들이 부쩍 늘었다. 노두길이 순례자의 길로 변신하면서부터다. 순례자의 길은 모두 12㎞인데 1㎞마다 하나씩 12개의 기도처가 들어서 있다. 순례 도중 기도드릴 수 있는 성소가 생긴 것이다. 순례자의 길은 대기점도, 소기점도, 소악도, 진섬 등 4개 섬의 노두와 도로를 따라 이어진다. 이들 4개의 섬은 묶음으로 기점, 소악도라 부르기도 한다. 순례자의 길은 예수의 열두 제자 이름을 기도처 이름으로 차용했지만 특정 종교인만을 위한 것은 아니다. 기도처는 예배당일 수도, 성당일 수도, 암자일 수도 있다. 12개의 기도처는 11명의 국내외 작가들이 참여해 만들었다. 한국 작가가 6명, 프랑스 포르투갈 스페인 등 외국 작가 5명이 각각 하나 또는 2개의 기도처를 건축했다. 공동 작업에 참여한 작가도 있다. 기도처는 첫 번째인 대기점도 선착장, 베드로의 집에서 시작돼 12번째 가롯 유다의 집에서 끝난다. 기도처는 누구나 각자 신앙의 성소로, 무신론자는 자기 성찰의 장소로 사용하면 된다.

기도처들은 대부분 6.6㎡를 넘지 않는 작은 공간이다. 본디 기도라는 것이 함께 모여 있어도 혼자 드리는 의례가 아닌가. 공간이 클 필요가 없는 이유다. 대형 교회와 성당, 사찰 등의 팽창주의 건축물에 비해 이 작고 소박한 기도처들은 그 자체로 이미 신선한 감동이다. 작은 것이 아름답다는 진리를 새삼 깨닫게 해준다. 기도하는데 공간이 무슨 소용 있으랴. 어떤 신이 규정된 공간에서의 기도만 경청할까. 전능한 신들인데 어느 장소 어떤 목소리인들 듣지 못할 것인가? 그러므로 이 건축물의 외피를 입은 기도처 또한 하나의 기호나 상징일 뿐 기도를 가두는 괄호는 아니다.

순례자의 길 끝자락에서 놀라운 기적을 체험한다. 출입문도 없는데 무한히 열린 기도처가 있다. 바다와 섬들의 풍경을 차단하지 않고 고스란히 받아들일 수 있도록 출입문을 달지 않았다. 이 기도처에 이르러 순례자는 비로소 섬의 자연과 일체가 된 자신을 발견한다. 밀실의 기도처가 아니라 열린 기도처. 열어야 할 문이 없으니 누구에게나 열려 있고 닫아야 할 문이 없으니 어떤 종교로도 제한되지 않는 성소. 11번째 기도처다. 순례자의 길에 기도처를 만든 정신을 가장 명징하게 구현해낸 작품이다. 팝아트 작가 강영민이 만들었다. 기도보다는 저 의자에 앉아 하염없이 바다를 바라보며 술 한잔하면 참 달겠다는 생각이 먼저 든다. 이런 불경한 생각도 다 받아주는 열린 성소. 그래서 이런 작품을 만들어준 작가가 고맙다.

파도 소리 들리는 최고의 트레일 화태도 갯가길

제주 올레길 이후 섬들도 저마다 이름을 달고 길들이 조성됐다. 여수 갯가길도 올레가 낳은 자식 중 하나다. 화태도 갯가길은 여수 갯가길의 5번째 코스다. 화태도는 2015년 12월 돌산도와 다리로 연결되면서 섬의 시대를 마감했다. 여수와 이어진 돌산과 연결됐으니 육지로 편입된 것이다. 길은 돌산도 예교마을 화태대교 입구에서 시작된다.


다리를 건너자 ‘남면’이란 표지판이 서 있다. 여기부터 여수시 돌산읍이 아니라 여수시 남면에 속한다는 안내판이다. 300여m쯤 직진하면 화태갯가길 시작 지점인 치끝이다. 버스 정류장에서 왼편 둑길을 따라 길이 이어진다. 화태도 갯가길은 치끝에서 월전마을을 거처 독정이, 묘두, 뻘금을 지나 다시 치끝까지 되돌아오는 13㎞ 남짓의 트레일이다.

화태도는 췻대섬, 파태도, 수태섬 등으로 불리다 지금의 이름을 얻었다. 2.18㎢ 면적에 200여 가구, 400여 명이 살아가는데 섬사람들의 주업은 어류 양식이다. 100여 가구가 가두리 양식장에서 우럭, 도미 등의 어류를 기른다. 여수에서 어류 양식업을 가장 많이 하는 곳이 화태도다. 여수 전체 양식 어류의 40%가량이 화태도에서 생산된다.


둑길을 느릿느릿 걷다 보니 선착장 옆 웅덩이에서 노인 한 분이 뜰채를 옆에 놓고 가만히 앉아 있다. 저것은 필시 숭어를 잡으려는 것이겠지, 감이 왔다. 아니나 다를까! 웅덩이에는 숭어가 우글거린다. 들물에 들어왔던 숭어들이 썰물 때가 되도록 뻘을 먹으며 노느라 빠져나갈 생각을 않는다. 웅덩이를 따라 바다로 이어진 갯고랑으로는 여전히 숭어들이 오고간다. 하지만 바로 앞에 숭어떼가 있는데도 노인은 숭어를 잡지 않고 그저 바라보고만 있다. 뜰채만 가져다 대면 숭어들을 마구 건져낼 수도 있을 듯도 한데 말이다. “어째서 숭어를 안 잡고 그냥 보고만 계세요?” “아직 때가 아니요.” “어째서요?” “저기 갯고랑 물이 끊기고 숭어들이 웅덩이에 갇힐 때까지 기다리는 거요. 지금 건드리면 싹 다 나가부러.” 아! 그래서 숭어들이 저리 많은데도 안 잡는구나. 그런데 저러다 썰물을 따라 숭어가 다 빠져나가버리면 어쩌나? “그럼 어쩔 수 없지.” 노인의 대답이 담백하다. 놓치면 그만이란 말씀.

노인은 마지막 남은 한 마리까지 다 빠져나가도 꿈쩍하지 않을 태세다. “열 번 오면 다섯 번쯤 잡아요.” 숭어가 빠져나갈까봐 조급하게 굴면 다 놓칠 수 있지만 때를 기다릴 줄만 알면 절반은 성공한다는 말씀이다. 5할이면 얼마나 높은 승률인가! 조급하지도 욕심 부리지도 않는 것. 절반의 성공에도 만족할 줄 아는 어부가 진정한 고수다. 노인은 벌써 1시간 전부터 자리에 앉아 숭어들의 동태를 살펴보고 있었다. 또 30분쯤이 흐르자 비로소 웅덩이와 바다 사이 갯고랑의 물길이 끊겼다. 그래도 아직 제법 많은 숭어가 남았다. 노인은 뜰채를 들어 숭어를 건져내기 시작한다. 대체로 세상의 물고기들이란 때라는 그물에만 걸려든다. 낚싯바늘이 아무리 날카로워도 그물이 아무리 촘촘해도 때를 기다릴 줄 모르면 헛방이다. 섬을 걷다 보면 곳곳에서 고수들을 만난다. 인생도처 유상수다!


산길로 접어들어 20분 남짓 걷다 보니 마족포구다. 마족포구에서 다시 해안길로 접어든다. 길가에는 낡은 초소 건물이 버려져 있다. 해안 경비를 서던 초소다. 초소 안 벽면에 새겨진 구호가 아직도 섬뜩하다. ‘적은 반드시 내 앞으로 온다.’ 초소를 지나 숲길을 빠져나오니 월전포구다. 선창가는 낚시꾼들로 시끌벅적하다. 방송 영향인지 요즘 부쩍 어딜 가나 가족 단위 낚시객이 늘었다. 파출소와 우체국이 이 마을에 있다. 육지와 연결이 됐지만 독정이와 함께 돌산을 오가는 여객선이 아직도 기항하는 마을이다. 월전(月田)은 달밭이란 뜻이다. 그래서 월전의 옛 이름은 달밭기미다.

월전포구 도선장 끝에서 길이 끊어지는가 싶더니 다시 이어진다. 해변의 숲길. 옛날에 다들 갯것을 하고 나무를 하러 다니던 길이다. 이 해변을 돌아서면 섬의 서쪽이다. 독정이 포구에서 묘두까지 이어지는 해변길은 내내 파도 소리 들으며 걸을 수 있는 최고의 트레일이다. 묘두 마을이 보이는 갈림길에 이르니 이정표가 나타난다. 썰물 때는 해변 길로, 들물 때는 도로를 따라가라는 표시다. 묘두는 고양이 머리라는 뜻이다. 그래서 묘두를 괴머리라고도 부른다. 괴 혹은 괴이, 괭이는 고양이의 이 지역 말이다. 묘두 마을을 돌아 나와 도로를 따라 200m 남짓 걸으면 꽃머리산 입구다. 길은 더없이 고즈넉하다. 꽃머리산이라니! 이토록 어여쁜 이름의 산도 있을까? 꽃머리산을 올랐다 내려가니 다시 처음 그 자리다. 치끝. 가까운 길을 멀리 돌아왔구나 나그네여!

호젓한 해변 걷는 임자도 대광리 백사장길

한국에서 가장 긴 해수욕장은 어디일까? 임자도 대광해수욕장이다. 명성 드높은 강릉 경포해수욕장이 6㎞, 부산 해운대해수욕장은 1.5㎞인데 대광해수욕장은 무려 12㎞다. 물경 명사삼십리. 썰물이면 대광리에서 전장포까지 이어지는 백사장도 400여m다. 그런데 이 대광해변이 봄이면 꽃밭이 된다. 대광해변 튤립공원 일대에서 튤립축제가 열리기 때문이다. 해변을 수놓는 수백만 송이 튤립의 대향연. 형형색색 피어오른 튤립은 겨우내 춥고 어두웠던 섬을 밝히는 따뜻한 등불이 된다. 섬, 해변, 튤립이라는 이국적 정서와 풍경은 관광객을 유혹하기에 부족함이 없다. 그래서 사람들은 벌 나비보다도 더 열정적으로 꽃들의 구애에 응답한다. 임자도 튤립축제는 해마다 4월 중순부터 하순까지 열리는데 꽃을 보겠다는 일념으로 전국 각지에서 머나먼 남도의 섬까지 몰려드는 사람이 보름 남짓 동안 평균 5만여 명이나 된다. 인구 3400여 명에 불과한 작은 섬은 축제 때면 그야말로 인산인해를 이룬다.

임자도는 여름 보양식의 으뜸으로 꼽히는 민어 어장이다. 옛날에는 서해 곳곳에서 민어가 났지만 지금은 여름철이면 임자도 해역에서만 민어가 난다. 그만큼 귀물이 됐으니 가격도 만만치 않다. 백성의 물고기라 하나 민어는 옛날에도 가난한 사람들은 쉽게 접하기 어려운 귀한 물고기였다. 그래서 “복달임에 민어탕이 일품, 도미찜은 이품, 보신탕은 하품”이라 했다. 임자도 해역에 민어어장이 생긴 것은 새우 때문이다. 민어가 가장 좋아하는 먹이가 새우인데 임자도 앞바다는 새우 어장이기도 하다. 그래서 임자도의 전장포항은 전국 새우젓 생산량의 60%가 나는 새우젓의 중심지다. 전장포에서는 새우젓이 곰삭아 가는 토굴에도 들어가 볼 수 있다. 많은 사람은 튤립이 만발한 봄날이나 여름 피서철 대광해변을 찾지만 실상 이 해변을 느끼기 가장 좋은 계절은 겨울이다. 사람 자취 거의 없는 한적한 해변. 그 넓고 긴 해변을 온전히 나만의 해변으로 만들 수 있다.

아무 방해도 받지 않고 대광리에서 전장포까지 명사삼십리 해변 길을 혼자 걸을 수 있는 행운을 누가 쉽게 가질 수 있으랴. 주저 없이 떠날 수 있는 사람만이 누릴 수 있는 최고의 호사다.

■강제윤 시인은

강제윤 시인은 사단법인 섬연구소 소장, 섬 답사 공동체 인문학습원인 섬학교 교장이다. 《당신에게 섬》 《섬택리지》 《통영은 맛있다》 《섬을 걷다》 《바다의 노스텔지어, 파시》 등 다수의 저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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