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산 칼럼] 기업 생사 걸린 감사의견, 극히 신중해야

입력 2020-02-03 18:39   수정 2020-02-04 00:16

“노 모어 벳(No more bet).” 딜러가 구령과 손짓으로 베팅 마감을 선언하면 곧이어 회전반이 정지되고 주사위가 멎은 눈금에 돈을 건 쪽의 환호와 놓친 쪽의 탄식이 교차한다. 건 돈의 36배를 챙기는 룰렛은 마감 후 3초 정도면 결판난다. 그 3초 후를 모르는 것이 인간의 한계다.

20세기 초반까지 회계는 역사적 원가를 중심으로 과거 거래와 실제로 청산된 가치를 따지는 구조였다. 거대 기업이 등장하고 외상거래와 주식·채권 유통이 활발해지면서 미래 예측을 반영한 자산·부채 평가의 비중이 높아졌다. 금융상품이 갈수록 복잡해지고 미래의 불확실성을 거래하는 파생상품이 확대되면서 전문가도 따라잡기 힘들 만큼 변화무쌍하다. 보유 자산뿐만 아니라 미래에 부담할 보험금 채무까지 예측해 이자율 변동을 감안한 현재가치로 평가하는 보험회계는 복잡성의 끝판왕이다.

현금을 빼돌리거나 기업 명의로 차입해 사주나 경리담당이 착복하는 것이 전통적인 회계부정이다. 최근에는 실물에 영향이 전혀 없는 항목도 회계부정으로 도마에 오른다. 부도 발생 기업에 대해 ‘계속기업으로서의 존속 가능성에 대한 의문’을 방치했다는 지적을 받는 사례도 늘고 있다. 1999년 7월, 연 30%가 넘는 고금리를 2년 가까이 버틴 대우그룹이 부도 처리됐고, 2015년 7월에는 대우조선해양의 대규모 분식회계가 공표됐다. 당시 경영진은 불경기가 일시적이어서 기업경영을 계속하면 회복할 수 있을 것으로 판단했고, 채권단도 그런 희망으로 자금 지원을 계속했다. 그러나 미래를 정확히 예측하기는 정말 어렵다.

‘계속기업으로서의 존속능력에 대한 유의적 의문을 초래할 사건이나 상황’에 대한 회계감사기준은 명확하다. 감사증거 입수가 불충분하면 의견거절, 계속기업 전제가 적합하지 않으면 부적정 의견, 중요한 불확실성에 대한 공시가 부적절한 경우는 한정의견 또는 부적정 의견을 밝혀야 한다. 이런 유형의 감사의견이 표명되면 주식 거래는 중단되고 금융회사의 자금 회수가 몰려들어 기업이 문을 닫게 된다. 계속기업 관련 감사의견이 기업 도산으로 이어지는 ‘정보의 상호유도(information inductance)’ 현상이 현저하다는 것이 회계학 연구의 결론이다.

오 헨리의 단편소설 《마지막 잎새》는 청년 화가 존시의 폐렴 투병기가 소재다. 캘리포니아 출신이어서 뉴욕의 차가운 겨울 공기를 견디기 어려웠는데, 이웃 벽돌집 담벼락에 매달린 잎새가 떨어지는 것을 죽음에 대한 예고로 받아들이면서 마지막 잎새를 절망적으로 지켜봤다. 이 소식을 전해 들은 아래층 노인 화가가 담벼락에 잎새 하나를 그렸고 그것을 진짜로 믿은 젊은이는 삶의 의지를 되살렸다. 그러나 비바람을 맞으며 밤새 그림을 그렸던 노인은 다음 날 폐렴으로 죽었다.

인간 생사보다는 기업 존폐와 관련된 변수가 훨씬 복잡하고 예측이 어렵다. 부실감사 책임을 걱정해 비관적 감사의견을 무리하게 내놓으면 감사 대상 기업은 부도위험에 몰린다. 회사정리와 같은 조직변경에 대한 상법 규정은 나라마다 다르고, 국제회계기준에서도 자본 관련 회계 처리는 국가별 법규와 관행을 존중한다. 회계학계, 감독기관 및 회계 실무계가 지혜를 모아 계속기업 관련 감사의견 결정에 관한 합리적 기준을 마련해 정착시켜야 한다. 단정적 감사의견 대신 공시 확대로 보완하는 방안도 검토해야 한다.

부도나 자금경색 단계에 개시되는 특별감리에서 한참 지난 감사조서를 놓고 감리시점에야 드러난 정보를 들이대며 왜 이런 문제를 놓쳤는지를 사후적으로 따지는 것은 불합리하다. 감사가 실시된 과거 시점을 기준으로 감사절차의 합리성을 사전적 관점에서 판단해야 한다. 작년에는 기업 실적이 대폭 악화됐고 올해부터 감사법인 주기적 지정제가 실시돼 계속기업 논란이 증폭될 가능성이 높다. 감독당국은 회계감리 인원을 업종별로 나눠 감사현장에 투입해 계속기업 존속 가능성 평가에 대한 예방적 감리를 병행하는 방안을 강구해야 한다. 기업 생사가 걸린 감사의견은 회계법인과 감독당국 모두 극히 신중하게 다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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