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마을] 낯선 세계 뛰어든 여성들…생생한 현장연구 분투기

입력 2020-02-06 18:09   수정 2020-02-07 00:41


이스라엘 제2의 도시 텔아비브에는 고립된 섬처럼 숨겨진 공간이 있다. 도시 남서쪽에 있는 소규모 주거지역 네베셰아난이다. 이스라엘에서 가장 악명 높은 우범 지역이자 빈민가로 알려진 이곳에 2010년 한국 여성이 발을 들였다. 텔아비브대에서 인류학 박사과정을 밟고 있던 임안나 씨(서울대 비교문화연구소 연구원)였다.

네베셰아난에는 필리핀 이주노동자뿐만 아니라 네팔·인도·스리랑카·태국·중국 등 다양한 국가에서 온 노동자와 난민들이 섞여 있었다. 그중에서도 주로 여성인 필리핀인은 거의 모두 특정 아파트에 입주하고 있다는 게 흥미로웠다. 10~20여 명이 함께 사는 아파트는 외부와 차단된 폐쇄적인 공간인 동시에 내부적으로는 모든 입주자의 사생활이 공유되는 개방적 공간이었다. 치안이 불안한 데다 수시로 들이닥치는 이민경찰 때문에 외부인을 경계하지만 입주자들은 주말에 파티를 함께 즐기고 필요한 물품과 서비스, 정보를 공유했다.

네베셰아난에서 2년 동안 살면서 현장연구를 수행한 임씨는 필리핀 이주노동자의 이주공간 형성에 관한 주제의 논문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시행착오와 위기도 많았지만 필리핀 여성 노동자들과의 끈끈한 인간적 유대는 현장조사가 끝난 뒤에도 이어졌다.

《여성 연구자, 선을 넘다》는 임씨를 비롯해 낯선 해외 현장에서 연구 열정을 불태운 인류학·지리학·지역학 연구자 12명의 현장연구(fieldwork) 분투기다. 다국적 기업에 의한 필리핀 광산 개발과 그에 저항하는 주민들을 연구한 엄은희 서울대 사회과학원·아시아연구소 선임연구원의 이야기를 비롯해 홍콩(장정아), 이란(구기연), 베네수엘라(정이나), 중국(최영래·노고운), 일본(김희경·지은숙), 미얀마(홍문숙), 베트남(육수현), 태국(채현정) 등에서의 연구 과정이 생생하게 담겨 있다.

낯선 사회, 낯선 사람들 속에서 이뤄지는 현지조사는 불확실성의 연속이다. 미리 정한 연구 주제가 현지 상황에 따라 바뀌기도 하고, 연구 기간도 길다. 의사소통부터 사람들과의 라포(친밀한 관계) 형성, 면접, 인터뷰, 관찰, 자료 조사에 이르기까지 무엇 하나 만만한 게 없다. 저자들은 연구 과정의 다양한 이야기와 함께 현지에서 외국인 여성으로서 겪어야 했던 사회적 차별과 신체적·성적 위협, 불안정한 법적 신분과 불안한 정치 상황, 건강상의 문제와 각종 스트레스 등 소소한 에피소드까지 흥미롭게 들려준다.

홍콩인의 경계와 정체성이 형성되는 과정을 연구한 장정아 인천대 교수(중국·화교문화연구소장)는 국가와 민족에 관한 정체성이 약한 홍콩인들의 변화를 이야기한다. 지난해 6월 홍콩 의회 앞에서 200만 명이 참가한 반중 시위 현장으로 달려갔던 그는 “(현지조사를 했던 20여년 전) 한국인과 달리 소속감이 별로 없어 피를 흘려 뭔가를 지켜본 적이 없다며 씁쓸히 웃던 그들은 이제 매일 길거리에서 피를 흘리고 있다”며 변화하는 홍콩의 미래에 질문을 던진다.

구기연 서울대 아시아연구소 선임연구원은 이란의 젊은 세대의 감정과 자아에 대한 연구를 통해 통제와 검열이 심한 사회에서 현지조사를 하는 연구자의 심리적 갈등과 성찰의 과정을 보여준다. 육수현 서울대 사회과학원 선임연구원은 베트남에서 공감 능력이 타문화를 이해하는 문화적 해법이 될 수 있다고 제안한다. 태국 북부 치앙라이의 국경 교역 현장을 연구하면서 상인들과 함께 국경지역을 여행하고 동행한 채현정 서강대 동아연구소 전임연구원의 이야기도 흥미진진하다.

부산외대 HK연구교수를 거쳐 쿠바 아바나대 의대에서 수학 중인 정이나 씨는 베네수엘라 수도 카라카스의 빈민가 바리오에 정착하는 이야기를 통해 연구자와 현지인이 ‘우리’가 돼가는 과정을 보여준다. 특히 풍부한 석유와 미녀의 나라로 유명했던 베네수엘라에 21세기 사회주의가 등장하고 실패한 이유에 주목하면서 연구자가 단순한 관찰자가 아니라 좀 더 전면적으로 관계를 맺으려는 행위자로 함께하는 ‘참여인류학’의 필요성을 제기한다.

중국의 연안을 연구 주제로 삼았던 최영래 미국 플로리다국제대 교수는 남쪽 지방에서 만난 다양한 출신과 외모의 중국인들을 하나로 규정하는 건 불가능에 가깝다면서 중국의 국가 권력은 사회집단에 따라 완전히 다른 방식으로 작동하고, 국가의 통치영역 밖에서 지내는 사람도 무수하다고 지적한다.

인류학의 대모로 불리는 마거릿 미드가 현장연구를 위해 폴리네시아의 사모아에 도착한 것은 1925년. 스물네 살 때였다. 여성의 사회활동이 드물었던 당시로선 파격적인 도전이었다. 연구자들이 훨씬 많아지고 연구지역이 다양해진 지금도 여성 연구자들에게 현장연구는 도전이다. 남녀 공통의 어려움 외에 여성이어서 감당해야 하는 몫까지 있어서다.

저자들은 ‘선을 넘다’란 책 제목에 대해 자신들은 선을 넘는 사람들이라고 설명했다. 직업 연구자가 되기 위해 심리적 선을 넘어야 했고, 연구 대상이 국경 너머에 있는 만큼 지리적 선을 넘어야 했으며, 여성학자로 살아남기 위해 사회문화적 선도 넘어서기 위해 도전하는 사람들이라는 것이다. 이들의 분투에 공감과 박수를 보내는 이유다.

서화동 선임기자 fireboy@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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