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명철의 한국, 한국인 재발견] '아시아의 바이킹' 발해…동아지중해 누비며 무역 강국 자리매김

입력 2020-04-10 17:04   수정 2020-04-11 02:03


우리는 발해의 역사 그리고 거친 자연환경을 극복한 발해인의 생각과 능력을 잘 알지 못한다. 발해가 백두산 화산 폭발 때문에 멸망했다는 ‘가십’ 정도만 알고 있을 뿐이다. 그런 게 올바른 역사 인식일까. 고구려 유민이 주력인 소수의 독립군이 부활시킨 나라, 문명국인 고구려 변방에 터를 잡고 거친 자연 및 덜 세련된 주변 종족과 더불어 새 질서, 새 문화를 재창조한 나라, 그 발해를 중국에서 해동성국(海東盛國)으로 부르게 한 실질적인 원동력은 무엇일까?

발해 산업의 실상은 생태환경과 후발 국가들, 계승 민족들의 삶과 일본의 기록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노성(백두산 근처)의 쌀이 유명하고, 책성(훈춘)의 된장은 수출품이었으며, 만주 일대와 연해주라는 지경학적 환경을 활용해 특수한 산업을 발전시켰다. 위성(함경북도 무산)의 철도 유명했는데 ‘철주’라고 부른 요동 안시성 일대는 동아시아 최고의 철 생산지였다. 발해는 고구려에서 물려받은 기술력으로 풍부한 철을 가공해 농기구와 무기 등을 대량 생산했다. 또 풍부한 금과 은(삼강평원 일대)으로 일본제 수은을 활용한 공예품을 만들었는데 일본에서 ‘당나라에서 진귀한 것을 많이 보았으나, 이런 기괴한 것(공예품)은 없었다’고 할 정도로 극찬받았다(방학봉 《발해경제사연구》).

흑룡강 중류 이하, 송화강 하류, 목단강 하류, 우수리강 유역은 대규모 침엽수림지대라서 약초를 비롯해 꿀·산삼·인삼·녹용 등의 수출품이 풍부하게 나왔고, 호랑이·표범·곰·사슴·늑대·토끼·여우·족제비·담비가 서식했다. 발해는 원조선(고조선)·부여·고구려처럼 모피 가공을 주요 산업으로 발전시켜 왕실과 수령의 부를 확장시키는 수출품으로 활용했다. 러시아가 17세기 중반부터 극동 지역으로 진출한 중요한 이유는 질 좋은 모피를 획득할 수 있었고, 모피 세금 또한 많았기 때문이다. 베링해를 발견한 것은 해달피를 얻기 위해 이동하는 과정에서였다.

또 강(江)어업도 중요한 사업이었다. 사료에는 미타호(흥개호)의 붕어만 특산물로 기록돼 있지만, 흘러든 유기물로 인해 물색이 검게 된 송화강 하류 그리고 흑룡강(아무르강)에는 엄청난 크기의 물고기가 많았다. 이 때문에 근대까지도 어업은 동만주의 주력 산업이었고, 소수 민족은 생선을 식량·비료로 사용했으며, 껍질로는 의복·신발·장식품을 생산하는 어피문화를 발전시켰다.

산둥 제나라로 말(馬) 수출

부여는 명마(名馬)의 산지였고, 원조선과 고구려는 말 수출 국가로 유명했다. 발해 또한 지역적인 특성상 목축업이 발달했다. 특히 솔빈부(우수리스크)의 말은 뛰어나서, 고구려 유민인 이정기(李正己) 일가가 세운 산둥반도의 제(齊)나라로 수출했다. 말 떼를 육로로 압록강 하류까지 몰고 간 후 단둥시 외곽인 박작구(고구려의 박작성)에서 운반선에 실어 서해 북부 해양과 발해 해협을 통과해 등주(지금의 봉래시)에서 하역했다. 발해 유민들이 압록강 하구에 세운 정안국도 말을 대규모로 보유했고, 송나라에 매년 1만 필 이상을 수출했다(《송서》). 어느 때인지 분명하지는 않지만 발해의 배(船)는 동중국해 절강 지역(저우산군도·舟山群島)까지 나아갔다(《여지기승》).

본격적인 무역 국가로 성장한 발해는 당나라에 무역을 겸한 사신단을 132차례나 파견했고, 투르크(돌궐)와도 교역했다. 특히 고구려 후기부터 교류해온 소그드인(우즈베키스탄 지역)과 함께 실크로드 무역망에 참여했으며, 경교(동방기독교) 같은 서쪽 문화도 수용했다. 그런데 국가 정책, 과학기술과 산업, 발해인들의 기질과 능력이 발휘된 분야는 일본과의 해양 무역이었다.

8세기의 발해와 일본은 신라를 남북에서 압박하기 위한 정치·군사 교류에 비중을 뒀다. 특히 일본은 항해 능력이 달려 견당사(遣唐使)를 파견하기 어려웠기 때문에 국제 정세에 관한 정보를 얻고, 선진 문물을 수용하기 위해 발해와 적극적으로 교류했다(구난희 《발해와 일본의 교류》). 하지만 9세기에 가까워지면서 냉전 시대가 끝나고, 무역의 시대로 바뀌며 발해·일 관계도 ‘쌍방교류’에서 경제교류가 주목적인 발해의 ‘일방교류’로 전환됐다.

일본에 34차례 공식 사절단 파견

발해는 일본에 공식 사절단을 34차례나 파견했다. 사신선에는 관리와 상인 외에 지방세력인 수령도 정책적인 배려로 동승할 수 있었다. 그런데 746년에는 발해인과 철리부(하바로프스크 추정) 사람이 무려 1100여 명이나 출우(아키타현)에 도착했다가 송환됐다. 이런 사례를 보면 발해의 민간 상인은 동해를 건너 일본 지방세력과 사(私)무역을 벌였고, 철과 주석을 교환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일본에 상륙한 사신단 일부는 항구에 세운 객관(客館)과 객원(客院)에서 몇 달씩 장사를 했으며, 나머지는 수도로 들어가서 외교 활동을 벌이고 본격적인 무역을 했다.


발해 상단은 담비·호랑이·표범·말·곰 같은 짐승 가죽 등 양질의 모피, 꿀·인삼·산삼 등 토산품, 철·동 같은 광물, 명주·해표피·해상어 등으로 만든 수공업 제품, 다시마 같은 수산물과 함께 대모배(동남아시아산 붉은 바다거북 껍질로 만든 술잔) 등을 수출했고, 면·명주·수은 등과 돈을 받아갔다. 871년에 온 사신단에 일본 정부가 지급한 대금은 무려 40만전(錢)이나 됐다. 자연스럽게 발해악(樂) 등 각종 문화가 일본에 전파됐고, 정치적인 영향력도 행사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자 일본 정부는 심각한 무역 역조를 개선할 목적으로 발해 사신단 활동을 제한하기에 이르렀다. 9세기 초에는 사신이 입국하는 횟수를 12년마다 정하고, 1회 입국 인원을 105명으로 제한했는데 이를 위반하면 추방했다.

모피·꿀·철·명주·다시마 등 무역

그렇다면 험난한 겨울 동해를 건너다닌 발해인의 항해술과 조선술은 어느 수준이었을까? 뗏목 ‘발해 1300호’는 1997년 12월 31일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항을 출항했다. 항해 25일째인 1998년 1월 24일 새벽에 오키제도의 도고섬에 좌초해 4명 전원이 유명을 달리했다. 발해선도 두세 번의 예외를 두고는 음력 10월에서 1월 사이에 북서풍을 이용해 동해를 건넜고, 귀국할 때는 남동풍(信風)을 타고 3월에서 8월 사이에 항해했다. 당연히 ‘천문생(天文生)’이란 항법사가 동승했다. 842년에 발해가 일본에 보낸 문서에는 ‘배들이 바람을 점치고 때를 기다려 출항한다’는 내용이 있다(《속일본후기》). 하지만 험난한 항해라서 첫 사신단 파견 때는 승선자의 3분의 1이 희생당했고, 739년에는 1척이 표류해 40명이 죽었다. 776년에는 187명 중 46명만 생존했으며, 786년에는 표류하다가 65명 중 12명이 하이인(아이누족)에게 죽고 41명만 생존했다.

조선술은 전(前)근대에는 국가 산업으로 경제력과 과학·공학기술의 결정체였다. 발해선은 초기엔 20명 전후가 승선할 수 있는 소선(小船)이었고, 17척으로 325명(771년)이 일본에 간 경우도 있다. 9세기부터는 거의 100명 이상이 승선할 수 있을 정도로 배가 커졌다. 보통은 일본의 견당선과 비교해 발해의 조선술이 뒤떨어지는 것으로 알고 있다. 그러나 이는 항해 상황을 왜곡하고, 항해술과 조선술의 메커니즘에 무지한 일본 학자들의 주장을 추종한 결과다. 일본의 사신단은 항해 횟수가 얼마 되지 않았고, 무수한 희생을 치렀으며, 때로는 승려·상인과 마찬가지로 발해선과 신라 민간선의 도움을 받아 당나라와 교류하는 수준이었다.

작고 날렵하며 바닥이 뾰족한 발해船

발해선은 동해의 황천(荒天)항해(폭풍·태풍 등의 악천후 속에서 항해하는 기술)가 가능하도록 건조돼야 한다. 그렇다면 침엽수를 사용해 선체는 작고 날렵하며 내구성이 강했을 것이다. 또 편서풍을 견딜 수 있는 튼튼한 돛대에 사각에 가까운 단순한 형태의 돛을 장착하고, 흘수가 깊고 바닥이 뾰족한 첨저선(尖底船)이었을 것이다. 이런 발해선은 동해 망망대해에서 울릉도와 독도를 좌표로 삼아 항해해 혼슈 북부의 아키타현·니가타현·이시카와현의 노토반도와 후쿠이현의 쓰루가 등에 도착했다. 후기에는 남쪽으로 내려가 돗토리현·시마네현의 오키제도와 이즈모·야마구치현, 심지어는 대마도(쓰시마)까지 내려갔다. 그런데 시대 상황과 해양환경을 고려하면 발해선단은 오호츠크해와 동해가 만나는 타타르해에서도 활동하면서 오호츠크해 문화권과 교류했을 가능성도 있다(윤명철 ‘발해의 해양활동과 동아시아의 질서재편’·1998).

나라 안보와 경제적 이익을 위해 죽음도 무릅쓰고 고난도의 항해를 부단히 시도했던 ‘아시아의 바이킹’ 발해인, 그들을 잊고 있었던 탓에 우리는 지금 발해 역사를 중국에 빼앗길 지경에 이른 것이 아닐까?

윤명철 < 동국대 명예교수·우즈베키스탄 국립 사마르칸트대 교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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