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경에세이] 자가 치료법

입력 2020-04-12 19:01   수정 2020-04-13 00:05

실내 생활이 쉬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밖과 안의 구분이 이토록 엄중한 시절이 있었을까 싶다. 문명사의 새 차원이 열리는 것일까. 돈을 얼마나 쓰느냐가 아니라 시간을 어떻게 경영하느냐가 당면과제다. 때에 맞게 사는 것이 시중(時中)이고, 시중을 잘 실천하는 이가 시성(時聖)이니 지금은 ‘혼자 놀기’의 명수가 시성인 시대다.

홀로 시간을 보내는 좋은 방법이 뭐 없나 싶어 이것저것 뒤적이고 따라해 본다. 조선 후기 실학자였던 다산(茶山) 정약용은 시(詩) 치료의 선구자다. 문사철(文史哲)에 능통해 천하를 굽어보던 그였지만 당대와 불화해 유배를 당하는 불운을 겪었다. 조선이 낳은 최고의 실천적 지식인이 20년 가까이 유배지에 갇혀 살았다면 심각한 신경 계통의 병증에 시달릴 법하다. 의연한 철인이었던 다산은 시 쓰기로 우울증을 이겨냈다.

‘약은 놈 비단옷 찬란히 빛나는데/ 못난 놈은 가난을 괴로워하네/ 커다란 강령이 이미 무너졌으니/ 만사가 막혀서 통하지 않네/ 한밤중에 책상 치고 벌떡 일어나/ 높은 하늘 우러러 길이길이 탄식하네.’

손택수 시인이 6년 만에 펴낸 시집 《붉은빛이 여전합니까》에서 또 하나의 치료법을 발견한다. 초등학교를 중퇴한 시인의 아버지가 부산진 시장에서 대접받은 까닭은 화물전표 글씨를 전담한 필체 덕분이었는데 시에 등장하는 동료의 해설이 구수하다. 일당벌이 지게를 지던 민초의 글씨, 이제는 지상에 없는 ‘지게체’다.

‘전국 시장에 너거 아부지 글씨 안 간 데가 없을끼다 아마/ 지게 쥐던 손으로 우찌 그리 비단 같은 글씨가 나왔겠노/ 왕희지 저리가라, 궁체도 민체도 아이고 그기/ 진시장 지게체 아이가.’

글씨 얘기를 하자니 ‘한국의 디오게네스’라고 불리던 민병산 선생(1928~1988)이 떠오른다. 별칭이 ‘거리의 스승’이었던 그는 철학자이자 전기(傳記) 연구가로 알려졌지만 실상은 서예가이자 바둑 애호가로 기억된다. 선생은 독학으로 서예를 공부한 뒤 가는 날까지 즐겨 붓을 들었고, 자신이 쓴 글씨를 아는 이들에게 나눠주길 좋아했다. 그의 글씨는 미풍에 등잔불이 춤추는 것과 같다 하여 ‘등잔불체’라고 불린다. 평범하고 쉬운 글이 좋은 것이라고 했던 선생이 남긴 한마디가 약이다. “붓글씨는 보약을 먹는 것과 같은 효과가 있다.”

서울 인사동 찻집에 정물처럼 앉아 계시던 선생을 생각하며 차 한 잔을 따른다. “안 좋은 일이 있을 때, 먼저 천천히 물을 마셔보라”고 했던 그의 작은 목소리가 들려온다. 힘든 시기에는 먼저 마실 것을 음미하며 자신을 차분하게 눌러주라던 그 뜻이 지금 절실하다. 진액이 빠져나가 팍팍하고 바스락거리던 삶은 음수(飮水)로 촉촉하게 차오른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에 수분 섭취가 좋다고 하니 일석이조라 할 음료 치료법이다. 그래도 봄빛은 여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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