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을 무시하면 대가 치른다"…대중은 이들 '입'을 더 신뢰했다

입력 2020-04-19 17:03   수정 2020-07-18 00:04


지난달 25일 워싱턴DC 백악관에서 폭스뉴스 취재진을 만난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아무도 예상치 못한 발언을 꺼냈다. “부활절(4월 12일)까지 이 나라를 다시 열고 싶다”는 것. 트럼프 대통령은 “부활절은 다른 이유로 중요하지만 이 이유(경제활동 재개)로도 중요한 날로 만들 것”이라고 했다.

당장 백악관의 코로나 태스크포스(TF)에 참여하고 있는 앤서니 파우치 미 국립보건원 국립알레르기·전염병연구소(NIAID) 소장이 반대하고 나섰다. “날짜를 검토할 수는 있지만 매우 유연해야 한다”며 사회적 거리두기의 이른 해제에 반대의견을 분명히 했다. 다른 전염병 전문가들도 무리라면서 트럼프 대통령의 계획에 우려를 나타냈다.

트럼프 대통령은 결국 사회적 거리두기의 시한을 4월 30일까지로 미루고 5월 경제활동을 다시 시작하는 것으로 바꿨다. 이 역시 파우치 소장이 지난 13일 “5월부터 경제활동을 부분적으로 재개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하면서 가능해졌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사태로 과학의 시대가 도래하고 있다. 미국 경제지 포브스는 “과학을 무시하면 값비싼 대가를 치른다는 것을 전염병 팬데믹(세계적 대유행)이 일깨워줬다”고 지적했고, 미국 정치 미디어 폴리티코는 “사람들은 트럼프 대통령이 아니라 파우치 소장으로부터 듣고 싶어 한다”며 “코로나19가 정치인들로 하여금 전문지식의 중요성을 인정토록 하는 계기로 작용했다”고 분석했다.

전염병과 함께 창궐한 미신과 권위

코로나19 초기 인류는 온갖 미신과 권위에 빠졌다. 중국에선 지도부가 전통의학을 권유하는 바람에 개나리로 만든 솽황롄이라는 약이 품귀 현상을 겪기도 했다. 인도에선 정치인들이 소 배설물로 코로나19를 예방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한국에서조차 교회와 군대에서 소금물과 양파가 대응책으로 등장했다.

많은 정치 지도자는 “코로나19는 독감 수준” “우리 국민은 이겨낼 수 있다”는 과학적 근거가 전혀 없는 발언을 쏟아냈다. 그러는 사이 바이러스는 암살자처럼 곳곳에 스며들었다. 한국의 신천지 무더기 확진(2월 18일), 말레이시아 무슬림 부흥회(2월 28일), 스페인의 여성의 날 집회(3월 8일) 등의 변곡점은 지도부의 방심이 낳은 산물이다.

전문가들의 견해는 무시되기 일쑤였다. 대표적인 사례가 유람선 다이아몬드 프린세스호 사건이다. 3700여 명이 탑승한 이 배가 2월 3일 일본 요코하마항에 도착하기 직전 이 배에서 코로나19 환자가 생겼다는 사실이 보고됐다. 전문가들은 배가 밀폐된 공간이고 의약품이 부족한 만큼 빠른 하선이 필요하다는 의견을 냈다. 하지만 아베 신조 총리가 이끄는 일본 정부는 전문가들의 의견과 달리 한 달 가까이 해상 격리하는 조치를 내렸다. 그 결과 탑승자의 20%에 달하는 712명 확진, 12명 사망이라는 참사가 빚어졌다.

과학에 기반한 정책이 신뢰받아

작년 말 중국 우한의 화난수산시장에서 코로나19가 처음 보고된 이후 중국 정부는 대유행 가능성의 증거가 없다며 일상생활에 제약을 가하지 않았다. 우한시 정부는 1월 19일 시내 한복판에서 4만 명이 모이는 춘제(중국 설) 행사까지 열었다.

정부의 이 같은 움직임에 경종을 울린 전문가가 나타났다. ‘2003년 사스(중증급성호흡기증후군) 퇴치의 영웅’으로 불리는 중난산 중국공정원 원사였다. 한국으로 치면 공학한림원의 원로인 인물이다. 그는 1월 20일 CCTV 인터뷰에서 “코로나19가 사람 간 전염되는 것이 확실하다”고 말했다.

중 원사의 발언은 시민뿐 아니라 정부 관료들도 상황의 심각성을 인지하는 계기가 됐다. 중국 정부는 23일 우한을 시작으로 후베이성 17개 도시 전체를 봉쇄했다.

봉쇄, 자택 대피, 사회적 거리두기 등 코로나19 예방을 위한 필수 조치들이 자리잡는 데까지도 상당한 시일이 걸렸다. 패트리스 해리스 미국의학협회 회장은 “거리두기가 전염병 확산을 막는 가장 효과적인 수단임이 100년 전 스페인독감에서 이미 증명됐지만 우리는 여전히 사실과 증거보다는 이념과 정치에 치우친 결정을 보고 있다”고 지적하기도 했다.

새로운 영웅이 된 과학자들

미국인뿐 아니라 세계에서 가장 주목하는 코로나19 전문가는 파우치 소장이다. 1940년생으로 올해 80세인 그는 에이즈(후천성면역결핍증)가 전 세계로 확산하던 1984년부터 NIAID 소장을 맡고 있다. 2008년에는 미국 시민 최고 훈장인 대통령 자유의 메달을 받았다. 에볼라바이러스 공포가 극에 달했던 2014년에는 에볼라에 걸렸다 회복된 간호사를 일체의 보호장구 없이 포옹하는 모습을 보여주면서 재감염을 우려하는 시민들을 안심시켰다.

파우치 소장의 전문성은 코로나19 초기부터 드러났다. 미국 내 확진자가 단 7명이던 지난 2월 2일 그는 “우한 폐렴이 굉장히 빠르게 퍼지고 있으며 거의 확실하게 팬데믹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지속적으로 사태 악화를 경고하면서 미국 50개 주(州) 전체가 자택 대피령을 내리도록 유도했다. 백악관 내에서 경제활동 재개 주장이 나올 때마다 그는 “결정하는 것은 바이러스”라며 설득했다.

이번 코로나19 사태를 계기로 정은경 질병관리본부장 등 각국의 전염병 전문가들이 새로운 명성을 얻게 됐다. 정 본부장은 일관되고 솔직한 언급, 정보에 근거한 분석, 침착함 등으로 신뢰를 얻고 있다. 월스트리트저널(WSJ)은 “정 본부장이 ‘바이러스는 한국을 이기지 못할 것’이라고 말하자 사람들은 본능적으로 그를 믿었다. 그 스스로가 이를 믿고 있다는 점을 알았기 때문”이라고 평가했다.

영국은 코로나19 발병 초기 ‘집단 면역’ 실험을 하다 보리스 존슨 총리까지 감염되면서 체면을 구겼다. 이후 전문가들의 의견을 반영해 다른 나라처럼 사회적 거리두기에 들어갔다. 패트릭 발란스 영국 과학기술 수석고문은 지난 7일 “모두 힘들겠지만 아직 정점은 아니다. 봉쇄 조치는 다음달까지 계속해야 한다”고 주문했다. 영국 정부는 지난 16일 봉쇄 조치를 3주간 연장하기로 했다.

강현우 기자 hkang@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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