끼리끼리 모여있을 때 더 커지는 '집적의 이익'

입력 2020-05-01 17:14   수정 2020-10-13 19:18


“그럼 요즘 자네, 계속 단역만 하고 있는 건가?” 할리우드의 캐스팅 디렉터인 마빈(알 파치노 분)은 한물간 액션배우 릭(리어나도 디캐프리오 분)에게 묻는다. 한때 서부 영화 주연으로 잘나갔지만 인기를 잃고 하락세를 타고 있는 릭은 의기소침하게 답한다. “뭐, 그렇죠. 악역이에요.” “격투 신에선 매번 지고?” “당연하죠. 악역인데.” “풋풋한 놈들한테 얻어터지다 보면 자네 이미지는 그렇게 고정돼버리는 거야. 릭, 다음주엔 어떤 놈한테 맞을 건가?”

1969년 할리우드는

‘원스 어폰 어 타임…인 할리우드’는 1969년 할리우드를 충격에 빠뜨렸던 ‘샤론 테이트 사건’을 재구성해 만든 영화다. 황금기로 불렸던 1940~1950년대를 지나 격변의 시기를 맞이한 1960년대 후반 할리우드를 배경으로 한다. 캐스팅을 기대했던 릭은 마빈과의 미팅에서 큰 소득 없이 돌아온다. 자신의 전속 스턴트맨이자 로드매니저인 클리프(브래드 피트 분) 앞에서 울먹인다. “난 이제 끝이야. 한물갔어. 아주 대놓고 뼈 때리더라.”

그래도 릭이 희망을 잃지 않는 이유가 있다. 여전히 할리우드에서 일하고 있기 때문이다. 작은 악역이라도 괜찮다. 할리우드에 있는 한 다시 기회가 올 것이라고 믿는다. 릭은 스타 감독인 폴란스키와 그의 부인이자 배우인 샤론(마고 로비 분)이 자신의 이웃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일이 더럽게 안 풀려도 지금 내 옆집에 누가 사는지 봐. 세상에서 가장 핫한 감독이 산다고.”

감독과 배우뿐만이 아니다. 촬영기사, 스턴트맨, 소품 담당자, 캐스팅 매니저까지…. 영화를 꿈꾸는 이들은 할리우드에 모여든다. 폴란스키 감독의 아내인 샤론도 마찬가지다. 연기를 하겠다는 목표를 위해 할리우드에 입성한 인물이다. 재능있는 배우인 샤론은 자신이 출연한 영화를 보기 위해 극장을 찾으며 즐거워한다. 사진을 찍어달라는 팬의 요청에 영화 포스터 앞에서 선뜻 포즈를 취해주기도 한다.

릭은 배역을 따낼 수 있을까

미국 로스앤젤레스(LA)에 있는 할리우드는 영화 중심 클러스터(집적지)다. 2019년 기준 미국의 영화시장 규모만 113억2000만달러(약 13조8000억원). 할리우드는 세계의 반짝이는 인재들을 끌어들인다. 이렇게 특정 산업과 관련한 회사와 종사자들이 한데 모이면 긍정적인 효과가 생긴다. 이를 ‘집적의 경제’라고 한다.

회사들이 집적으로 얻을 수 있는 가장 큰 이익은 중간재 생산요소를 공유하면서 생긴다. 할리우드로 치면 영화 소품업체와 음악회사, 시나리오 작가 등이다. 영화 제작사는 이를 공유하면서 생산비용을 크게 줄일 수 있다. 섬유산업이 발달한 서울 동대문 근처에 의류 상점들이 입점해 있는 것과 마찬가지다. <그래프>처럼 집적으로 생기는 이익보다 불이익이 커지기 전까지 집적화는 계속된다. 중간재 업체의 결과물이 만족스럽지 않으면 회사는 근처의 또 다른 거래처를 찾으면 된다. 노동자로서도 이직과 구직이 쉽다. 릭이 폴란스키가 자신의 이웃이라는 사실을 알고 기뻐하는 것도 할리우드라는 집적된 환경을 이용해 배역을 따낼 수 있을 것이란 기대 때문이다.

영화계는 스타를 사랑하지만

집적 수준이 높은 할리우드에선 그만큼 ‘스타 쏠림 현상’도 일어난다. 비슷한 회사들이 모여 있어 특정 인재에 대한 수요가 늘어나면 회사 간 경쟁이 벌어지고, 결국 해당 인재의 몸값 인상으로 이어진다. 게다가 영화라는 상품은 개봉 전까진 소비자의 반응을 예상하기 어렵다. 그래서 영화 제작사들은 어느 정도의 수요를 담보해주는 스타들을 찾게 된다. 릭이 마빈과의 미팅 후 눈물을 보인 건 자신이 이 같은 스타 시스템에서 밀려났다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어떤 영화는 주연급 스타 한 명의 출연료가 총제작비의 30%를 넘기도 한다. 일각에선 주연 배우의 출연료가 제작비의 20%를 넘지 않도록 제한하는 일종의 ‘샐러리캡’을 도입해야 한다는 주장도 나온다. 스타 한 명을 캐스팅하기 위해 지나치게 큰돈이 들어가면 다른 배우의 출연료가 깎이거나 꼭 필요한 다른 예산이 줄어들 수도 있기 때문이다.

할리우드의 집적 경제는 곧 규모의 경제로 이어지기도 한다. 한 영화 제작사가 비용 문제에 부딪혔을 때 다른 제작사와 협업해 제작비를 마련하는 식이다. 고정비용(생산량과 상관없이 드는 비용)이 크고 한계비용(생산물 한 단위를 추가로 생산할 때 드는 비용)은 작은 영화산업의 특징 때문이기도 하다. 영화는 한 번 제작할 때 막대한 초기 자본이 필요하다. 하지만 작품을 완성한 뒤엔 여러 차례 상영한다고 해서 추가로 큰돈이 들어가진 않는다. 즉 규모의 경제를 통해 대형 영화를 만들어 제작비를 회수하고 나면 이후 흥행 수입은 거의 순이익이 된다.

꼭 최고가 아니라도…

책을 읽으며 자신의 촬영 순서를 기다리던 릭. 책의 내용을 묻는 여덟 살 아역배우의 질문에 갑자기 북받쳐 울음을 터뜨리고 만다. 책 주인공이 ‘젊어선 최고였지만 부상을 당한 뒤 점차 쓸모가 없어지는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릭은 주인공을 이렇게 묘사한다. “이젠 최고가 아니야. 최고와 거리가 멀지. 그래도 받아들이고 있어. 매일 조금씩 쓸모없어진다는 걸.” 이후 이어진 촬영에서 릭은 ‘인생 연기’를 펼친다. “내가 본 최고의 연기였다”는 감독과 동료 배우들의 칭찬에 릭은 눈시울을 붉힌다.

릭은 할리우드를 떠나 이탈리아에서 ‘스파게티 웨스턴(이탈리아식 서부영화)’을 찍어보자는 마빈의 제안을 수락한다. 자신의 경쟁력을 확보하기 위해 시장을 이동하기로 결정한 것이다. ‘임금격차설’에 따르면 노동력은 대체로 임금이 낮은 곳에서 높은 곳으로 이동한다. 이탈리아 액션물 주연을 맡은 릭은 적지 않은 돈을 번다. 하지만 이탈리아 영화 네 편을 찍은 릭이 돌아온 곳은 다시 할리우드다. 당장 돈을 벌지 못한다 하더라도 세계 영화산업의 중심지, 할리우드가 지닌 매력을 외면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영화가 샤론을 살려낸 까닭은

릭이 형제처럼 지내던 로드매니저 클리프에게 “형편이 안 된다”며 해고를 통보한 날, 둘은 릭의 할리우드 집에서 마지막으로 술을 함께 마신다. 그리고 그날 찰스 맨슨 일당이 그 집에 쳐들어온다. 실존 인물인 찰스 맨슨은 1969년 폴란스키 감독의 집에 침입해 임신 중이던 샤론을 비롯한 5명을 잔인하게 살해한 범죄자다. 다행히도 영화는 끔찍했던 실제 사고와는 다르게 흐른다. 그날 밤의 잔혹했던 살인마들은 액션배우인 릭과 스턴트맨 출신인 클리프에게 말 그대로 ‘박살’이 난다. 현실에서 비극적인 운명을 맞았던 샤론도 영화 속에선 무사하다. 이 일을 계기로 샤론이 릭을 자신의 집에 초대하는 장면으로 영화는 마무리된다. 릭이 그토록 바라던 것처럼 폴란스키 감독과 친분을 쌓을 기회를 얻은 것이다.

영화가 실제와 달리 샤론을 살린 이유는 무엇일까. 어쩌면 할리우드 역사상 가장 비극적인 사건의 ‘희생자’로만 기억됐던 재능있는 배우 샤론을 영화에서나마 구해내고 싶었던 것일지도 모르겠다. 더 크게 보면 이 영화는 수많은 배우와 감독이 꿈을 품고 모여드는 기회와 낭만의 땅, 할리우드 그 자체에 대한 헌사인 것이다.

고은이 기자 koko@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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