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신일 한국산업양행 회장 "美 자존심 PGA웨스트 인수땐 타이거 우즈가 축하해줬어요"

입력 2020-06-01 17:35   수정 2020-06-02 00:32


작년 10월 22일 일본 지바현의 아코디아골프 나라시노CC 클럽하우스. 미국프로골프(PGA)투어 조조챔피언십 프로암 대회가 끝난 뒤 열린 만찬 자리의 주인공은 골프 황제 타이거 우즈(45)가 아니었다.

우즈와 케빈 나(37) 등 10여 명의 유명 선수들은 테이블에 앉은 한 한국인에게 다가가 축하인사를 건네기 바빴다. 당시 프로암에 참석한 유신일 한국산업양행 회장(68·사진)이 미국 명문 골프장인 PGA웨스트 인수 우선협상자에 선정된 게 알려지면서다. PGA웨스트는 PGA 정규투어는 물론 퀄리파잉 대회를 오랫동안 열었던 곳이다.

유 회장은 최근 한국경제신문과의 인터뷰에서 “선수들이 처음에는 말도 안 된다고 안 믿더라”며 “미국의 자존심으로 불리는 PGA웨스트가 동양인한테 넘어가는 게 말이 되냐는 분위기였지만, ‘하면 된다’라는 생각으로 인수를 마무리했다”고 말했다.

PGA도 인정한 가치 경영

유 회장은 미국과 일본에 25개 골프장을 보유한 ‘골프왕’이다. 보유한 홀 수만 522개로 한국인 가운데 가장 많은 골프코스를 갖고 있다. 나라별 골프장 가치는 천차만별이지만, 홀당 약 50억원(한국 기준)으로 따지면 2조5000억원을 넘는 규모다. 유 회장은 “이익에 집착하지 않고 코스 등 골프장의 가치를 높인 것이 좋은 결과로 이어졌다”며 “자식 같은 골프장들을 생전에 팔 일은 없을 것”이라고 했다.

PGA웨스트 인수는 녹록지 않았다. 매각하려는 상대방이 시민권도 없는 동양인의 인수를 탐탁지 않게 여겼던 것. 유 회장은 실력으로 정면 돌파에 나섰다. 그는 “매각 측 회사 중역들을 일본에서 운영 중인 지바 이즈미 골프장으로 초청했다”며 “2500개 일본 골프장 가운데 16년 연속 ‘최고 서비스 골프장’에 오른 골프장 상태를 보더니 PGA와 매각 주체들은 깜짝 놀랐고 이후 인수 작업은 일사천리로 진행됐다”고 말했다.

신뢰로 ‘100엔 인수 전설’ 만들어

1977년 현대상선에 몸담은 유 회장은 1982년 일본 지사 근무를 시작한 뒤 처음 골프를 접했다. 유 회장은 “뻣뻣하던 일본 거래처 담당자가 골프를 좋아한다는 얘기를 듣고 독학으로 골프를 배워 거래를 텄다”며 “골프가 너무 좋아 매일 골프만 칠 수 있다면 머슴살이도 하겠다는 생각을 하기도 했다”고 말했다. 이어 “차가 반파되는 큰 사고를 당해 피가 철철 나는데도 ‘골프를 못하는 건 아닐까’라는 걱정에 빈스윙부터 해보고 병원에 갔다”고 말했다.

유 회장은 1988년 한국산업양행을 설립했다. 평소 취미로 즐기던 골프 관련 사업을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가 향한 곳은 100년 전통의 코스장비 브랜드인 바로네스. 골프장 관리 사업에 주목한 그는 당시 바로네스 경영진에게 찾아가 “당신들의 경영철학을 훼손하지 않고 한국에서 성공하는 모습을 보여주겠다”고 계속 설득했다. 다섯 번을 찾아가는 정성을 들여 결국 사업권을 얻었고, 국내 골프장 코스 관리를 독점하다시피 하면서 사업을 키울 수 있었다.

골프왕 신화는 우연찮게 시작됐다. 곤지암CC와 자매결연을 맺을 때 도움을 줬던 요네하라CC가 매각 절차에 들어간 것. 유 회장은 “요네하라 오너가 회원권을 가진 주주 50%의 동의만 받으면 일본 민사재생법을 이용해 부채를 95% 탕감할 수 있으니 인수해보라고 한 것이 골프장을 운영하게 된 계기”라며 “이익을 좇지 않고 골프장을 과거처럼 가치 있게 만들겠다는 약속이 통해 2000억원짜리 골프장을 100억원에 살 수 있었다”고 말했다.

유 회장의 가치 경영은 일본 골프업계에서 전폭적인 신뢰를 받았다. 론스타 등 사모펀드들의 구조조정 후 되팔기라는 이익 추구 전략에 지친 골프장들이 너나할 것 없이 유 회장을 찾아 인수해주길 바라는 상황이 펼쳐진 것. 이즈미 골프장 회원의 95%가 인수를 찬성했고, 후쿠이 국제CC는 100엔(약 1141원)이라는 상징적인 돈만 내고 가져왔다. 올해 터진 코로나19 사태 속에서 그는 미국 내 골프장 중에는 유일하게 임시해고를 하지 않고 직원 전원을 유급휴가 보냈다. 유 회장은 “한국과 한국인의 철학은 다르다는 말을 듣고 싶었다”고 말했다.

유 회장은 작고한 정주영 회장에게서 배운 ‘못할 게 어딨어?’ 정신에 빚을 졌다고 했다. 그는 “일본말 한마디 못하고도 일본에 와서 부딪쳤던 게 지금의 나를 있게 한 것 같다”며 “청년들도 해외로 나가 부딪치면 블루오션을 찾을 수 있다”고 조언했다.

김순신 기자 soonsin2@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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