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속에 잊힌 이정기와 제나라 [윤명철의 한국, 한국인 재발견]

입력 2020-06-07 09:50   수정 2020-06-07 09:52


사래 긴 논밭을 일구며 식구들과 소박하게 살아가는 삶이 있는가 하면, 격동과 해일, 절망과 환희, 죽음과 죽임을 오가는 역사의 삶도 있다. 고구려를 부활시킨 대조영, 고선지, 그리고 망각된 이정기 같은 삶 말이다.

781년 뜨거운 여름날 그는 당나라의 수도인 장안을 지척에 두고 대공세를 준비하고 있었다. 고구려 유민들을 주력으로 산둥지역을 지배하고, 영역을 넓히면서 오랫동안 숨기고 준비해 온 유민들의 한과 희망을 폭발시키려는 순간이었다. 당나라 정부가 당황해서 어쩔 줄 모르는 그 순간, 그는 악성종양으로 49세의 나이에 급서했다. 아들인 이납은 제나라를 선포했고, 멸망할 때까지 무려 55년 동안 고구려인들의 나라는 번영을 누렸다.

이정기의 탄생과 국제질서의 변화

고구려는 70년 동안의 긴 전쟁에서 패배했고, 복국전쟁까지 실패했다. 유민들은 산둥성, 장쑤성, 심지어는 간쑤성, 칭하이성, 쓰촨성까지 끌려갔고, 남은 일부는 요하를 사이에 둔 벌판에서 고달픈 삶을 영위하고 있었다. 그런데 발해의 수륙군이 732년에 당나라를 공격해서 대승했고, 바로 그 해에 이회옥이 태어났다. 그는 어린 시절부터 고구려의 역사와 발해인들의 존재를 알았고, 10대 후반에는 ‘고선지’라는 인물이 파미르를 통과하고 힌두쿠시 산맥을 넘어 거둔 탄구령 전투와 751년에 ‘탈라스’에서 벌어진 동서문명의 대결전에서 대패했다는 사실도 알았을 것이다. 그때 고선지와 그 병사들이 자기와 같은 핏줄임을 안 청년의 심정은 어떠했을까?

이렇게 성장한 그가 역사적인 인물로 등장하고, 또 다른 고구려를 부활시키는데 기회를 마련한 것은 국제환경이었다. 당나라는 통념처럼 안정되고, 동아시아를 장기간 지배한 나라가 아니었다. 초기부터 불안했지만, 8세기 중반에 이르면 더더욱 국제적으로 불안한 환경에 처했다. 멸망했던 돌궐은 부흥에 성공해서 제 2제국을 건설하면서 팽창 중이었고, 강력한 토번의 공격이 계속됐고, 이에 따라 파미르 지역의 산악 소국가들과 중앙아시아의 도시국가들은 당 체제에서 이탈했다. 한편 서아시아에서 발원한 아랍인들은 동진하면서 중앙아시아를 점령하고, 중국의 무역망을 빼앗으며, 영토까지 잠식하려 했다. 일전이 불가피한 현실을 자각한 당나라는 고선지를 다시 파견했지만, 그는 실패하고 말았다.

당나라의 분열과 안녹산의 난

한편 내부적으로 현종은 양귀비라는 애첩에 빠져 정사를 게을리 했고, 그녀의 오빠인 양국충이 권세를 장악하면서 정치는 더더욱 혼란해졌다. 중앙정부가 무력해지는 상황에서 ‘안녹산의 난’이 발생했다. ‘안(安)’씨 라는 성을 가진 그는 지금의 부하라인 ‘안국’ 즉 소구드 사람이었고, 어머니는 투르크인이었다. 그는 태생적으로 전투에 능했고, 상업의 중요성을 잘 알았으며, 국제정세를 간파하는 능력이 뛰어났을 것이다. 더구나 무력을 갖춘 절도사인 그가 반란을 일으키는 일은 당연했다.

절도사는 중앙 정부의 위임 아래 군사력을 바탕으로 해당 지역의 방어를 책임지면서 모든 권한을 가진 직위인데, 이방인들이 차지하는 경우가 많았다. 절도사들은 안녹산 등의 반군 세력들이 곳곳에서 정부를 공격하는 상황 속에서 군사적으로 팽창하면서, 독립적인 성격이 더욱 강해졌다. 심지어는 절도사들 간에도 패권을 놓고 무력 충돌이 빈번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고구려 유민들이 거주한 요서지역에서 두각을 나타낸 인물이 이정기였다. 안녹산의 군대를 토벌하는데 공을 세운 그는 761년에 사촌인 후희일과 함께 2만 명의 군대를 거느리고 발해를 건너 산둥의 등주로 이주했다. 더구나 뗏목을 타고 말이다. 항상 궁금했다. 도대체 누구의 생각이었으며, 하필 그 곳을 선택했을까?

동이의 옛 땅, 고구려 백제 유민들의 새 터전

산둥 지역은 고구려 유민들에게 의미가 크고, 세력을 확장시키기에 유리했다. 신석기 시대부터 벼농사가 발달한 곡창지대였고, 어업이 발달했다. 수로가 발달해서 내륙 물류망이 발달했고, 중국에서는 드물게 해양 교통이 발달한 지역이어서 약 7000년 전부터 요동지역과 교류했던 항구들이 발달했고, 원조선의 모피를 실은 무역선들이 도착했었다. 때문에 청동기 문화가 발달해서 중국 문화의 기본 토대를 이룩했으며, ‘강태공’ ’공자‘ ’한신‘ 등이 이 지역 출신이다. 또한 우리와 연관이 깊은 동이인들의 핵심 터전이기도 해서 주민들은 문물들을 갖고 수시로 서해를 횡단해서 경기만을 비롯한 해안지역에 들어와 정착했다. 물론 이 쪽에서도 많은 사람들이 건너가 살았고, 고구려 백제 신라의 사신단들과 승려, 유학생들도 산둥 북부 해안에 도착했다. 이 무렵에는 사료에 나타나듯이 끌려온 고구려 유민들은 물론이고, 끌려오거나 자발적으로 정착한 백제 유민들도 거주하였다. 정치적으로 독립하는데 필요한 우호집단들이 충분히 있었고, ’고구려의 부활‘이라는 명분을 내세우기에도 적합했다. 뿐만이 아니라 경제적으로 뛰어난 가치를 지닌 전략지구였다. 발해와 신라가 파견한 사신단들과 상인들이 상륙하던 무역의 거점으로서 특히 발해와는 말무역을 해서 경제적으로 이점이 컸다. 또한 훗날 재당 신라인들이 활용했지만, 역사 이래로 값비싼 소금의 생산지였다.(윤명철, 《장보고 시대의 해양활동과 동아지중해》)

유라시아 정치 질서의 변화와 이정기의 등장

이러한 지역을 토대로 이정기 세력이 성장하고 있을 무렵 동아시아의 정세는 어떠했을까? 일본은 나당연합군과 벌인 전쟁에서 패배한 후유증과 새나라 건국이라는 혼란기를 극복하고, 신라를 공격한다는 선언을 한 상태였다. 전쟁준비를 벌이는 한편 당나라의 현실을 정탐하고, 안정기에 들어선 발해의 문왕 정부와 군사동맹을 추진하는 중이었다. 반면에 신라는 경덕왕 때 지방을 정비하고, 왕권을 강화시키는 등 안정적이었으나, 이미 분열과 갈등의 조짐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또한 현재 운남성 일대에서는 737년에 남조국이 통일을 이룩하였고, 이어 토번과 동맹을 맺으면서 당나라와 대결했다. 754년에는 진압하러 간 당나라 군대 7만 명을 전멸시키기도 했으며, 이 무렵인 779년에는 수도를 대리(大理)로 옮기면서 성장하는 중이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갓 서른을 넘긴 이정기는 사촌인 후희일을 축출한 부하들에 의해 절도사의 지위에 올랐다. 당나라 조정은 765년 그에게 평로치청절도사의 관직과 이정기라는 이름, 그리고 ‘육운해운압신라발해양번사(陸運海運押新羅渤海兩蕃使)’라는 관직을 내렸다. 발해 및 신라와 맺는 정치적이고 경제적인 모든 관계를 관장하는 당나라로서는 동방정책을 추진하는 가장 중요한 거점의 직책이었다.

이정기의 공격과 제나라 건국

산둥 반도의 북부지역은 신라와 발해를 상대하는 데 유리했고, 발해와 벌이는 외교, 말 무역 등의 국제무역을 관장한 곳이다. 뿐만 아니라 남북으로 이어지는 물류망인 대운하의 북쪽 종점과 가까운 곳이었으므로 운하경제에도 손을 뻗쳐 경제력이 막강해졌다. 그는 끊임없이 발생하는 소요와 반란을 진압한다는 핑계를 대고 영토를 넓혔고, 마침내 산둥반도의 전 지역은 물론이고, 장쑤성의 일부 지역까지 차지했다. 775년에 이르면 15개주의 84만호(약 400여만 명)를 다스리는 번진으로서 사실상 국가의 위상을 갖추었고, 요양군왕으로 봉해진다.

이정기는 어떤 판단을 했는지, 779년에 거점을 청주에서 운주(?州)로 옮겼다. 이 곳은 대운하의 물류망을 장악하기에 유리한 곳이면서, 산둥 지역이면서도 수도인 장안과는 매우 가까웠다. 안녹산과 사사명의 반란을 경험하면서 절도사들의 위협을 실감한 조정은 이정기를 위협세력으로 간주한 후에 대병력을 집결시켰고, 이정기 역시 공격을 했다. 이렇게 해서 벌어진 강회지역의 전투에서 승리한 이정기는 10만의 병력으로 장안을 공격할 준비를 하였다. 하지만 그 해 여름, 고구려 부활의 과도한 집념 때문인지는 모르지만, 악성 종양으로 서거하였다(지배선, 《중국속 고구려왕국 제》). 다행히 아들인 이납(李納)은 명민하여 아버지의 죽음을 숨기고, 위기를 수습한 후에 절도사의 직위를 이었다. 이어 ‘제(齊)’ 라는 이름으로 나라를 건설하고, 자신은 왕위에 올랐다. 고구려 유민들의 꿈이 산둥에서 실현된 것이다. 그 후 이납의 아들들인 이사고(李師古)와 이사도(李師道)를 거치면서 모두 3대가 765년부터 819년까지 55년 동안 산둥반도 일대를 지배하고 통치했다. 중앙 정부는 강력한 제나라를 오랫동안 공격했으나 번번히 실패했고, 심지어는 신라에 3만 병력을 파병할 것을 요청하기도 했다. 결국 제나라는 전투에 패배하면서 멸망했는데, 당나라의 주력부대인 무녕군(武寧軍)에 참여해 군중소장으로 출세한 인물이 백제계 후예인 장보고(張保皐)였다. 이후 제나라 지역에 거주했던 고구려·백제계의 유민들은 새로 건너온 신라인들과 섞여 당나라의 해안과 대운하 주변에서 소위 ‘재당신라인’이라는 역사적인 존재로 탈바꿈했다.

한 개인의 삶에는 성공과 실패가 있고, 그 판단은 오로지 자신의 몫이다. 하지만 역사에는 성공과 실패, 승리와 패배라는 도식적인 평가가 가능하지 않다.

이정기(李正己)의 본명은 이회옥(李懷玉)이다. 그의 부모가 품은 ‘옥’은 무엇이었을까?
그는 고구려 후예라는 자기 역할을 충실하게 이행했고, 한민족의 역사에 큰 의미를 남겼다.
다만 후손들이 그를 망각했을 뿐이다.

윤명철 < 동국대 명예교수·우즈베키스탄 국립 사마르칸트대 교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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