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님재판과 여론재판…'이재용 재판'과 '최태원 재판' [여기는 논설실]

입력 2020-06-09 09:56   수정 2020-06-09 10:21


만담 같은 얘기로 시작해보자. 근대 이전, ‘원님재판’은 참 쉬웠을 것 같다. 높은 대청 위에서 사또는 열심히 뭘 들여다볼 필요도 없다. 말을 많이 할 필요도 없었을 것이다. 근엄한 표정으로 대략 세 마디면 족하다. “이- 노옴, 네 죄를 네가 알렸다”“매우 쳐라”“아직도 이실직고 하지 않느냐” 정도다.

사또나 수령이 플라톤의 공화국에 나오는 ‘철인’급 이라면 또 모를까. 현대의 법치주의나 민주법정의 관점에서 보면 원님재판은 엉터리다. 설령 이상적 인간의 철인이어도 ‘인치(人治)’라면 법치(法治)보다 나을 수 없다. 그게 인권의 역사요, 민주주의의 발전사다.

◆'이재용 재판’시작…‘최태원 재판’의 기억

구속은 면했다지만, ‘이재용 재판’이 시작된다. 상당히 길고 논쟁적인 재판이 될 것이다. 이재용 재판은 ‘현대판 원님재판’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수년전 ‘최태원 재판’의 기억을 소환해 본다. 최태원 SK회장 재판을 지켜본 언론계 출신의 한 인사는 이렇게 전했다. “법정의 판사가 판결에 앞서 길고 긴 훈시를 하는데, 목불인견이더군요. 만약 피의자가 최 회장이 아니라, 시장에 좌판 깐 아주머니였다면 판사가 인격침해 했다고 난리가 났을 겁니다. 그런데 재판장의 (후배)기자들도 그 점은 쓰지 않더군요”.

판사란 무엇인가. 적어도 형사법 위반 재판자라면, 검찰이 기소한 사안(사건)에 대해 피의자가 어떤 범죄(법 위반)을 했는지 명확하게 밝히고, 처벌 규정에 따르되, 대법원이 만들어둔 별도의 양형기준에 따라 선고를 하는 국가직 공무원이다. 그 과정에서 논리가 동원되기도 하겠지만, 법리적이어야 한다. 즉 유죄인 것을 오직 사실관계와 법 규정에 따라 적용하는 것이다. 피고인을 향해 준엄하게 질타를 하고, 교시를 늘어놓으며, 훈계를 할 권리가 판사에게는 없다. 그것은 월권이고 법치의 위반이다. 그 순간 판사는 ‘법대위의 작은 독재자’가 되고, ‘원님’이 되는 것이다. 유감스럽게도 대한민국 법정에서 흔한 일이다.

◆‘여론재판’‘코드재판’ 심지어 ‘인민재판’ 의 잔재

본 재판의 전 단계이지만, 행여라도 ‘국민의 59.5%가 이재용 선처를 바란다’는 여론조사 결과에 영향을 받아 불구속 수사가 진행됐다면 그것도 유감이다. 불구속 재판이라면 애당초 그럴 사안이었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즉 사실관계나 관련 ‘증거’(?)가 다 확보된 상황에서 법리적으로 유무죄를 따지면 되기에 불구속으로 진행이라는 결정이 나야 하는 것이다. 구속과 불구속의 가장 큰 기준은 늘 ‘도주 가능성’과 ‘증거인멸 우려’다. 이 점에서 요건이 맞으면 불구속 수사인 것이다. ‘법과 양심’이라는 판사의 기준은 이런 데부터 엄격히 적용돼야 한다.

하지만 우리법원을 지켜보노라면, 재판 전 단계부터 여론과 여론의 진행방향을 꽤나 보는 것 같다. 최근에는 김명수 대법원장이 “국민 눈높이에서 어떤 재판이 ‘좋은 재판’인지 생각하고 실천해야 한다”고 말해 큰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그것도 전국법관대표회의라는 공식 공개 자리에서였다. 이른바 여권의 핵심 인사들이 줄줄이 재판받는 과정에서 이런 대법원장의 발언을 일선 판사들은 어떻게 받아들일까. ‘여론재판’이라는 비판이 일어날 만 했다. 취지가 그게 아니었다면, 달리 말하거나 좀 더 신중하게 말했어야 했다. 굳이 여론재판의 의미를 조금이라도 찾는다면, 언론매체에서 나름의 일관된 시각과 잣대로 접근하는 게 여론재판이라면 그렇겠다.

‘코드재판’이 현실의 일이라면 법원은 존재가치가 없어진다. 3권 분립의 당위성과 의미를 이 시대에 다시 거론해야 한다면, 그 자체로 서글픈 일이 된다. 하지만 ‘정치 판사’‘진영 판사’들은 생기게 마련이다. 그래서 시스템으로 막을 필요가 있다. 베네수엘라의 우고 차베스가 집권하자마자 20명이었던 대법원 판사를 32명으로 확 늘려버린 적 있다. 늘어난 이 12명이 어떤 성향의 판사인지는 말할 필요가 없다. 중요한 것은, 이때부터 차베스가 떠날 때까지 이 나라 대법원은 정부에 반대하는 판결을 하나도 내놓지 않았다. <어떻게 민주주의는 무너지는가>라는 하버드 교수들 책에 자세히 나오는 내용이다.

죽창 든 ‘소수의 군중’이 ‘끌고 나온 피의자’를 겁박하고, 심지어 자아비판을 강요하는 식이 극단적이기는 하지만 ‘인민재판’의 이미지다. 생각만으로도 끔찍하니 건너뛰자. 하지만 ‘인민재판’의 속성이 지금 이 시대에 없다고 할 수 있을까. 북한의 인권을 문제 삼아도 시원찮을 판에 ‘대북삐라 금지법’인가를 만든다 하고, 과거 역사의 해석까지를 집권세력이 오로지 하겠다며, 무슨 비판 금지법을 만들겠다고 나서는 모습에서 ‘인민재판’의 어두운 그림자를 엿본다면 과민 반응일까. 청와대에 있다는 ‘국민청원’인가 하는 것도 차라리 없는 게 민주주의 발전에는 도움 될 것이다. ‘법대로 하자’고 할 일이지, 우르르 몰려가 ‘이렇게 해 달라’‘저렇게는 안 된다’는 식이면 법은 왜 있나. 우리가 우려하는 ‘떼법’과 과연 다른가.

◆민주사회의 대전제 '법리재판'되려면 법부터 잘 만들어야

재판이 ‘증거주의’와 ‘죄형법정주의’에 따르는 ‘법리 재판’이어야 하듯이, 입법도 제대로 되어야 한다. 국회에서 망치만 두드린다고 다 법이 될 수는 없는 것이다. 재판은 원님 식 몰아세우기 강요로 되어서도, 다수든 소수든 여론 추수로 흘러서도, 권력의 입맛과 기대에 부응해버려서도 안 된다는 게 중요하다. 또 철저히 법규에 정해진 것만이 범죄이고, 설령 사정에 따라 판사가 좀 봐주거나 조금 가중된 판결을 내리더라도 양형규정에 따라야 한다. 그러자면 법부터 잘 만들어야 하는 것은 너무나 중요한 전제다.

국회의 입법만능주의도 그래서 경계의 대상이다. 국회만이 아니라 모든 시민들이, 온갖 사회단체들이 강제법, 규제법을 만들어 달라며 국회로 달려가면, 그래서 실제로 법제화가 된다면 그 결과는 어떻게 되겠나. 툭하면 들고 나오는 정부의 육성법, 지원법도 그 안의 독소조항을 생각하면 무서울 때가 많다. 21대 국회가 개원 전부터 법안을 무려 80개나 쌓아뒀고, 어떤 이는 ‘1호 법안’을 만들겠다며 보좌진이 며칠씩이나 미리 접수 줄을 섰다는 소식은 한편의 코메디였다. ‘우리는 시민들이 자유 의지로 만든 공화국에 살고 있나’ 싶을 때가 적지 않다.

허원순 논설위원 huhws@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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