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재수첩] '매국'이란 오해에 막힌 직업선택의 자유

입력 2020-06-17 18:05   수정 2020-06-18 00:22

장원기 전 삼성전자 사장에 대해 알게 된 건 두 달 전께다. 삼성 LCD(액정표시장치) 사업의 역사를 정리하는 기사를 쓸 때였다. 중요한 LCD 사업의 변곡점엔 항상 장 전 사장이 빠지지 않고 등장했다. 삼성 후배들은 그에 대해 “사내 블로그에 삼성 LCD의 역사에 관한 글을 연재할 정도로 삼성에 대한 로열티(충성도)가 강했던 선배”라고 회고했다.

지난 11일께 장 전 사장이 중국 정보기술(IT)기업의 부회장으로 갔다는 소식을 들었다. ‘돈, 명예 뭐 하나 부족한 게 없는 그를 중국으로 이끈 게 무엇일까’란 의문이 들었다. 수소문 끝에 장 전 사장과 연락이 닿았다.

그는 일하고자 하는 의지가 강한 사람이었다. 은퇴 후 운동, 모임을 소일거리 삼아 지내는 건 참기 힘들다고 했다. 39년 삼성맨으로 쌓은 ‘지혜’를 후진과 나누는 게 사회에 공헌하는 것이란 소견도 밝혔다. 중국행(行)은 고심 끝에 수락했다고 했다. 대신 “삼성과 경쟁하는 일은 하지 않겠다”는 조건을 달았다고 했다. 중국행을 결심한 뒤에도 “한국과 삼성에 피해가 가는 일은 결코 없을 것”이라며 “그 정도로 안목이 없진 않다”고 단언했다.

하지만 여론은 매서웠다. 기사엔 입에 담기 어려운 인신공격성 댓글이 달렸다. 주로 ‘애국심’ 관련 비난이 많았다. ‘중국 기업에 기술을 유출하려고 한다’는 비난도 끊이지 않았다. “왜 하필 중국 기업이냐”는 것이다.

장 전 사장에 대한 부정적인 여론은 ‘오해’ 때문에 확대된 측면이 있다. 글로벌 산업계에선 ‘기업 국적’의 중요성이 희미해지고 있다. 삼성전자는 계열사 제품을 놔두고 중국 업체의 패널과 미국 반도체를 납품받아 쓴다. LG전자는 필요한 반도체를 국내 업체 대신 대만 업체에 맡겨 생산한다. 철저히 이익 중심으로 움직이는 게 기업 생리다. 이 속에서 39년을 살아온 장 전 사장에게 기업 국적으로 비판하는 것을 두고 “현실을 모르는 것”이란 지적이 나온다.

업계에선 기술 유출 우려도 부풀려졌다는 평가가 우세하다. 장 전 사장은 30년 전 삼성전자 반도체 사업부를 떠났고 10년 전 LCD 사업에서 손을 뗐다. 1년 전 기술도 박물관의 유물 취급을 받는 상황에서 기술 유출로 그를 걸고넘어지는 건 과하다는 것이다.

장 전 사장은 ‘후배들의 만류와 삼성이 지게 될 부담’을 이유로 중국행을 철회했다. 오해와 비난 여론 때문에 직업 선택의 자유를 포기한 셈이다. 하지만 50·60대 대기업 임원들의 은퇴와 중국 기업의 성장이 맞물리며 ‘제2·제3의 장원기’는 계속해서 나올 가능성이 크다. 그때마다 중국 기업이라는 이유로 개인의 선택을 막을 수 있을까. 장 전 사장은 기자와의 통화에서 “내 얘기가 한국 사회에 뭔가 변화를 줄 수 있는 단초가 된 것 같다”고 말했다. 이제 우리 사회가 답을 준비할 차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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