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경에세이] 수박이 좋아

입력 2020-06-24 18:07   수정 2020-06-25 00:04

아파트 입구 넝쿨 장미가 붉을 대로 붉어졌다. 한낮의 태양도 연일 최고치를 찍는다. 장성한 나무들은 여름 벌레들을 맞을 준비를 하고 있을 것이다. 6월과 7월 사이, 여름은 진군하듯 성큼성큼 다가온다. 올여름은 얼마나 또 더우려나. 숨 막히는 더위에 후텁지근하고 끈적거리고, 밤새 귀를 때리는 매미는 또 얼마나 얄궂은가. 많은 이들이 할 수만 있다면 7월, 8월은 달력에서 오려내고 싶다고 한다. 하지만 난 여름을 즐긴다. 수박과 함께.

내게 수박은 과일의 제왕이다. 위풍당당한 모습은 다른 과일들을 제압하는 카리스마를 보여준다. 대부분의 과일이 인간 친화적이긴 한데 수박이 단연 최고다. 초록색 둥근 몸통에 검고 굵직한 줄무늬는 마치 추상화가의 붓터치 같다. 붉은 속내는 초록을 한순간에 압도한다. 수박만큼 보색 대비가 확연한 과일이 없다. 붉은 바탕에 총총히 들어앉은 까만 씨앗은 수박의 하이라이트다. 맛은 또 어떤가. 무더위에 지친 심신을 한 방에 거둬가는 초특급 갈증 해소 과일이다. 물론 알알이 달콤한 포도도 좋고, 아삭한 참외도 좋고, 해외파 과일들도 있지만, 수박 앞에서는 모두 얌전히 있어야 한다.

유년시절, 아버지는 가끔 퇴근길에 수박 한 덩어리를 사 오셨다. 수박은 잘라서 내오면 기분이 반감된다. 다 모인 자리에서 잘라야 맛이 난다. 식구들이 다 모인 자리, 어머니의 칼이 수박의 정수리에 닿을 때 우리 모두는 숨죽이며 수박의 최후를 지켜보았다. 초록이 쩍 하고 갈라지며 빨간 속살이 드러나면 우리는 동시에 환호성을 질렀다. 포도, 바나나 같은 과일들은 혼자 먹을 수 있지만, 수박은 함께 먹어야 제맛이다.

수박은 조용히 먹는 과일이 아니다. 우적거리며 들숨의 리듬을 타야 제맛이 난다. 립스틱이 다 지워져도 옷 앞섶에 단물이 뚝뚝 떨어져도 떠들썩하게 웃으며 먹어야 수박이다. 우아하게 포크로 찍어 먹는 수박은 수박이 아니다. 온 가족이 모여 앉아 모기향 피워 놓고 시시콜콜한 얘기를 나누며 먹었던 수박은 내 유년시절 한편의 그림으로 남아 있다. 따뜻하고 정겨운 추억들, 수박이 준 위안과 행복을 나는 잊을 수 없다. 그러니 어찌 수박을 예찬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퇴근길, 아파트 안에 과일 트럭이 왔다. 산지직송, OO농장. 달지 않으면 전액 환불이란다. 그중에서 제일 눈에 뜨이는 건 수박이다. 나의 입이 수박으로 호사를 누리는 계절이 온 것이다. 냉장고에 수박 한 통을 채워 놓았다. 보험을 들어 놓은 것처럼 든든하다. 입맛이 없을 때나 밥 차려 먹기 성가실 때 수박 한 쪽이 해결사다.

수박 한 쪽을 베어 문다. 붉은 속살이 입에서 사르르 녹는다. 아! 이 맛이야. 올여름 속 끓일 일이 있으면 수박을 먹자. 이왕이면 혼자 먹지 말고 여럿이 모여 먹자. 수박은 맛과 정을 나누는 과일이다. 난 수박이 좋다. 그래서 여름이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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